기간 : 2009년 7월 15일 ~ 2009년 7월 20일(앵콜 공연)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작․연출 : 사카테 요지
출연 : 선종남, 장성익, 김은석, 윤상화, 이기동, 성노진, 한동규, 정만식, 염혜란, 김태희, 이주원, 손지원, 이소희, 김영진, 김예리, 이진희, 송명기
주최 : 아르코예술극장
제작 : 아르코예술극장, 극단 린코쿤
기획 : 코르코르디움
누굴까? 다락방은 만든 최초의 인물은
사카테 요지가 쓰고 연출한 연극 <다락방>은 동생이 자살하기 전에 마지막 5개월을 머물렀던 다락방으로 ‘형’이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대학 좁은 기숙사에 갖다 놓은 더 작은 1평 남짓한 다락방, 동생은 과연 이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무엇이 동생을 삶을 내던지는 극단으로 내몰았을까.
형은 다락방에서 한 가지 단서를 발견한다. 다락방을 전전하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들을 구원한다는 ‘다락방 헌터’를 그린 그림이다. 헌터의 그림을 벽에 크게 그리면 다락방 헌터가 나타나 구원을 한다는 소문은 정말일까. 하지만 ‘동생’은 죽지 않았는가. 은밀하게 거래되는 다락방. ‘형’은 누군가는 최초로 오리지널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동생을 비롯한 히키코모리들이 은둔과 고립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택한다고 생각한다. 누구일까. 이 따위 자살을 조장하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의 다락방, 아니 감방을 만든 놈들은? 혹시 다락방 헌터?
다락방, 사회가 만든 형태
다락방과 감방은 자의이든 타의이든 격리를 전제로 한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다락방은 물리적 감시와 통제가 없지만 정신적 통제 상태에 빠져들면 형기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하는 천형의 징벌방이 되기도 한다. <다락방> 에피소드 중에는 자살 이후의 영혼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들은 죽은 뒤에도 다락방을 떠나지 못하거나 다시 찾아온다. 붙박인 지박령이 된 것이다.
연극의 대부분은 형의 다락방 오리지널 제작자 찾기와 상관없이 다락방을 둘러싼 2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다. 다락방은 시시때때로 형사들의 잠복 공간, 산에서 길을 잃은 등산객이 찾아든 산악 대피소, 에도시대 닌자들이 염탐하는 처마 밑, 이라크 민병대의 공격을 피해 도망친 일본 자위대가 피신한 이라크 방공호 등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한다. 일본 원작 그대로 배경을 바꾸지 않은 <다락방>은 히키코모리 현상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지 않는다. 과거 암살을 목적으로 숨어든 닌자나 이라크 전에 참전했다가 포격을 피하는 자위대의 상황은 자의가 아닌 사회적 인습 혹은 문제로 인해 주변으로부터 이질화된 이들의 군상을 보여준다.
다락방과 같이 떠도는 인생
다락방은 정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숨거나 살기 위해 찾은 다락방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장소지만 언제 들킬지, 부셔질지 모르는 임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왕따를 당해 등교를 거부하고 다락방을 거처로 삼은 여학생 에피소드가 등장하지만, 코앞에서 자위나 해대는 친구 아닌 친구나 되레 고민을 털어놓으며 울부짖는 선생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곳이다. 은둔과는 거리가 먼 표적 공간이다. 소녀가 낭독하는 ‘안네의 일기’처럼 누가 언제 들이닥쳐서 헤집어 놓을지 모르는 달걀껍질 같은 곳이다.
천변 다락방(비슷한 임시 거처)에 자리를 잡은 노숙자들이야말로 더 내줄 무엇도 고통을 받을 걱정도 없으니 그야말로 ‘정주’ 공간이다. 유유자적한 삶이지만 예기치 못한 폭우에 범람한 물은 다락방을 쓸어내 버린다. 매물로 나온 다락방이 사고 팔리면서 차에 실려 어딘가로 끊임없이 오고 가듯이, 그 안에 있는 인생들 역시 계속 바뀌거나 같이 떠돈다. 이런 다락방의 ‘비정주성’은 고시원, 월세방 등 비슷한 환경을 떠도는 대한민국의 ‘비정규직’ 인생과 오버랩이 된다.
다락방 헌터를 부르는 방법
임시방편 불안전한 사회 시스템을 상징하는 이 따위 다락방을 누가 왜 만들었을까. 연극 처음에 등장했던 형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드디어 다락방 헌터를 찾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딘지 모를 마지막 꼭대기까지 올라가자 다락방을 제작하는 공장이 나온다. (그곳은 한 평 남짓으로 좁히고 앞으로 끌어당긴 무대의 뒤 극장의 원래 무대로, 가렸던 막을 걷어 내자 마치 갑자기 무대가 무한 확정하는 효과를 준다.)
알고보니 다락방헌터는 말도 못하고 팔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전신마비 장애인이다. 그리고 다락방의 한 평 크기는 딱 그가 편하게 누울 수 있는 공간이다. 헌터의 형은 동생을 위해 동생이 마음에 들 때까지 비슷비슷한 다락방‘들’을 만들고 있다. 다락방은 유폐의 감옥이 아니라 역으로 형이 동생을 위해, 그리고 동생이 절망에 빠진 누군가를 위해 세상으로 내보낸 선물이다!
헌터는 육체적 감옥에 갇혔으나 다락방마다 자신의 사인을 남겨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 찾아온 누군가‘들’과 ‘소통’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들은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를 잡듯이 ‘다락방 헌터’라는 장난 같은 괴소문을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박하게 ‘구원’을 기다린 사람들이다. 한 평 공간에 ‘나’와 실물 사람 크기로 ‘다락방 헌터’를 그리면 모르스 신호처럼 보내고 받아서 ‘우리’라는 관계망을 형성한다. 애써 이해하자면 헌터의 영혼이 자유롭게, 때로는 신비스럽게 시대와 공간의 3차원을 넘나들면서 다락방에 스스로를 가두었거나 갇힐 수밖에 없는 외로운 사람들과 소통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내 안의 다락방, 그 사유의 공간
다락방 헌터는 위안을 해줄 수 있을 뿐, 그들을 구해주거나 꺼내줄 수는 물리적 능력이 없다. 흔히 ‘꿈’ 혹은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한 상징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알을 깨고 나오는 힘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발화되어야 한다. 위가 뾰족한 5각형 구조의 다락방은 뇌의 생김새를 닮았다. 1평 남짓한 다락방은 마치 두개골 안을 가득 채운 한 명분의 뇌처럼 정확하게 1인을 위한 공간이 아닌가. 내 안에서 나오는 상상력만이 오로지 나를 구원할 수 있다.
어쩌면 다락방의 에피소드들은 다락방 헌터의 뇌 안, 즉 내 안에서 벌어지는 상상력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연계성이 없이 따로 떨어진 각각의 에피소드는 불편한 몸 대신 사유의 능력이 확장된 헌터의 뇌를 떠도는 수많은 사유의 발로일 것이다. ‘형’이 맨 꼭대기 층에서 다락방 공장에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들이 떠 있다. 저 수많은 별들은 과학 지식과 상관없이 인류의 시작과 함께 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얼마나 많이 넓혀 주었는가. 다락방은 사방을 막인 밀폐 공간이 아니라 두 눈과 두 귀와 두 코와 입이 뚫려 있는 두개골처럼 열린 공간이다. 또한 그곳은 연극 속 다락방 제작소가 별이 가까이 보이는 어딘가 건물의 최고 층 옥상이듯이 세상을 조망하고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머리에 있다.
리좀(rhizome 根茎)처럼 세계로 확장하는 1평짜리 무대
<다락방>은 사회적 문제인 히키코모리를 중심에 놓고 다루지만, 그들에 대한 어설픈 진단이나 동정, 고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에 앞서 사유의 지평을 넓히지 못하고, 히키코모리처럼 자기만의 독단과 독선에 빠져 있는 일본인들과 그들이 구성하고는 사회를 풍자한다. 비단 사카데 요지의 진단이 일본 사회에만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8개국, 15개 도시에서 한 평 남짓 <다락방>은 옮겨 다니면서 공연을 펼쳤다. 한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은 ‘사카테 요지 페스티벌’ 참가작으로 극단 린코군과 함께 직접 연출을 맡아 한국의 배우들과 함께한 <다락방>은 예정에 없던 앵콜 공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사진 출처 - 아르코 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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