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초연 이후 30주년 서울연극제를 맞이해 다시 올라간 <봄날>입니다. 오현경 배우가 출연해서 화제를 모았지요. 연세가 있으셔서 중극장 무대와 객석을 채우기에는 목소리가 작으셨지요. 전 객석에서 볼 때 무대 오른쪽 오두막집 세트 바로 앞에 첫째줄에 있어서 상관이 없었지만요. 이대연 씨를 비롯해 장석익 배우, 작년 동아연극상-신인연기상, '히서 연극상-기대되는 연극인상', 대한민국연극대상- 신인상 3관왕을 거머쥔 박완규 배우 등 좋은 배우들이 두루두루 참여한 수작입니다. 올 봄에 다시 재공연을 올렸지요.
제목 : 봄 날
극작 : 이강백
연출 : 이성열
출연 : 오현경, 이대연, 장성익, 강진휘, 정만식, 박완규, 유성진, 김민선, 김현중
일시 : 2009년 4월 22일(수) ~ 4월 28일(화)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극단 : 백수광부(http://baeksukwangbu.cyworld.com)
봄, 찾아온 30주년 서울연극제
김의경, 오태석, 윤조병, 이강백, 이윤택, 이해제, 이현화, 정복근, 최인훈. 열거한 이름은 한국 연극이라는 백두대간을 잇고 버티어 온 거대한 산들이다. 연출로도 배우로도 이름 있는 이들은 연극의 기본 뼈대랄 수 있는 희곡작가로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왔고, 또 여전히 활화산처럼 활동하기도 한다.
굽이굽이 이들이 펼쳐놓은 마룻금을 따라가면 한국의 연극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보인다. 연극이라는 눈 앞에서 실제로 펼쳐지는 현재진행형의 예술을 통해 30년 전에 쓰인 작품이 지금 이 순간, 오늘의 관객들 앞에서 오늘의 배우들이 무대에 오를 때, 오늘의 이야기가 되어 내일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품을 그러모은 연극축제가 한창이다. 지난 4월 16일에 '서울연극제'는 5월 24일까지 이어진다. 올해는 서울연극제 30주년 기념하는 해로, 그동안 서울연극제를 통해 선보인 290편 가운데 작품성과 흥행성을 갖춘 대표작 9편을 엄선했다. 여기에 더해 70대의 오현경, 김인태, 이호재, 박웅 등과 중년의 전국환, 김성녀, 예수정, 서이숙 등 대표선수급 배우들은 TV나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던 긴 호흡과 내공을 바탕으로 농익은 연기로 후배 배우들을 이끌고 있는 참이다.
봄, 하지만 봄 같지 않은 객석
하지만 아이돌 스타 한 명 등장하지 않은 무대가, 다시 말해 젊은 관객들에게 <가요무대> 정도로 보일 서울연극제 30주면 기념작들이 연극계에 새로운 봄날을 가져올지는 미지수이다. 25년 전에 초연한 ‘봄날’(이강백 희곡, 이성령 연출)이나 일제시대, 탄광촌의 질박한 삶을 담은 리얼리즘 연극인 ‘풍금소리’(윤조병 희곡, 윤광진 연출)를 보러 봄싹처럼 젊은 관객들이 찾아올까. (풍금소리는 무대 위 삼층으로 된 갱도를 쌓아서 정신대와 징용에 끌려가 죽은 과거의 영혼, 무너지는 갱도 속에 죽은 현실의 영혼을 달래는 한풀이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 옆으로 경사로 위 풍금 다방, 사실적인 표현을 최대한 자제한 무대는 압축미를 살리면서 리얼리즘 연극에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두었다. 20년 전과 다른 새로운 관객을 위한 고심의 흔적이 보인다.)
더군다나 올해에는 9편의 재공연 작품에 걸맞은 창작 신작 1편을 같이 묶을 예정이었으나, 28편의 새로운 응모작 중에서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번역극인 ‘피카소의 여인들’(브라이언 매커베라 희곡, 폴 게링턴 연출)을 개막작으로 올리는 아쉬운 현실이 서울연극제를 마냥 기쁘게 즐길 수만은 없게 한다.
2009년 봄
그럼에도 연극은 언제나 축제이고, 관객과 배우들이 서로 가슴이 설레며 만나는 소통의 현장이다. 더욱이 원로 작가들과 원로 배우들을 극장 주변과 무대 위에서 직접 마주대하는 기분은 정치․종교 등 한국사회의 원로들을 대할 때와는 상반되는 벅찬 감흥으로 다가온다. <봄날>에서 초연이후 25년 만에 또다시 아버지 역으로 무대에 서는 배우 오현경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2시간 내내 무대 위를 뛰어다는 ‘현역’이자 ‘광대’이지 않은가.
<봄날>은 역시 가장 이목을 끈 작품이다. 이강백, 연출에, 이성열, 출연에 오현경과 이대연, 그리고 장성익, 강진휘, 정만식, 박완규, 유성진, 김민선, 김현중 등 극단 백수광부의 장인들이 어울려서 빚은 ‘봄날’은 잘 익은 두견주처럼 그 봄꽃향기가 여태 흩어지지 않고 진하다.
이강백의 봄날
이강백의 <봄날>의 배경인 50년대는 지금처럼 꽃구경한답시고 좋아할 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보릿고개의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보리 서 말에 목숨을 건지고, 한 말에 색시를 사서 장가를 갈 수 있는' 인고의 시간이다. 겨우내 가을 양식마저 다 떨어져 굶어죽을 판에 사방에 먹지 못할 꽃만 만발하니 그 요사스러움에 더욱 환장할 노릇이다.
연극이 시작하자마자 번지는 청계산 산불은 겨울과 봄의 갈등이 극에 달한 빚어낸 결과이자, 죽음을 앞두고 탐욕스레 변하는 아비와 밖으로 뻗칠 기운을 주체 못하는 자식들과의 갈등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하지만 역으로 청계산 산불은 백운사에 기거하던 동녀(童女)를 집으로 이끌었고, 동녀의 양기가 늙은 아비와 병약한 폐병장이 막내아들을 거두어 생명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 이는 자식들이 동녀를 장난삼아 땅에다 심고는 생명의 나무, 우주목(宇宙木)에 비유한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차남 : (관객들에게) 신화 속에서 나무는 세계를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죠. 나무는 하늘과 지상과 지하 3계를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지의 중심부, 곧 대지의 배꼽에서 솟아나 하늘의 배꼽인 북극성에 닿아 있어요. 따라서 나뭇가지는 천상 높이 퍼져 있어 세계의 여러 영역을 두루 덮고 있고, 그 뿌리는 지하계의 바닥에 까지 뻗쳐지는 것이지요. 대지의 여신이 이 나무속이 아니면 뿌리에 살고 있고, 장차 인간들의 애기가 될 영혼들이 새처럼 깃들이고 있고, 해와 달 또한 그 보금자리를 나무에 틀고 있어요.
그리하여 봄은 코러스를 맡은 아들들이 한 자락씩 읊는 시인들의 노랫가락, 봄을 노래한 시처럼 축복을 주는 계절임에는 분명하다. 겨울이 있어야 세상 만물이 쉬면서 힘을 비축하듯이, 봄에 꽃이 피어야 가을에 결실을 얻듯이 세상의 이치로 도는 계절의 이치는 자식으로 대를 이어 반복되는 삶의 틀거리로, 멀게는 한 인생의 윤회와도 맞닿아 있다.
다만, 아비의 돈을 훔쳐 달아나 풀 한포기 돋지 않는 콘크리트 도시에서 군인으로, 사업가로, 노동자로 사는 아들들에게 계절의 윤회는, 봄의 만발하는 기운은 아지랑이처럼 코를 간질이는 봄놀이 정도의 유희로만 남는다. 계절의 축을 압축하고 왜곡하여 공장에서 매일매일 캐내고, 뽑고, 만드는 결실을 너머 탐욕의 세계에 정착한 아들들은 이제 안부편지 한 장 집에 띄울 여유조차 없다. 어미의 젖가슴처럼 부드럽고 생명을 길러내는 흙을 관뚜껑처럼 단단하게 덮어버리는 작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결국 늙고 나면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 탐욕스러웠던 아비도 이제는 자식들을 그리워한다. 남성성을 상실하고 대리 어미 역을 맡아 동생들을 키운 장남과 생산성을 잃은 병약한 막내,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폭력성이 사그라진 세 부자만이 동녀와 어긋나지 않고 땅의 기운에 의지해서 봄을 다시 맞이한다.
새로운 봄
지구온난화로 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단다. 물처럼 흐르는 계절이 그렇듯 다시 오지 못할 봄을 보내고 초여름에 접어드는 요즘, 압축과 찰라의 예술인 연극은 그 절박함이 봄과 꽤나 잘 어울린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어쩌면 오현경의 <봄날>은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가, 찰라의 아쉬움을 두고두고 아쉬워 하는 게 어리석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이치인지도 모르고. 또 그래서 그렇게들 봄날을 노래하고 시를 짓고 연극으로 올리는지도 모르고.*
영원함,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영원함은 과거완료형도 아니고, 미래예정형도 아니며 언제나 현재 진행되는 것이다. 희곡이 그렇다. 희곡(대본)을 읽어 보라. 모든 말과 행동이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있다. 희곡을 연극으로 공연해 보라. 모든 등장인물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아주 실감나게 볼 것이다. -한국일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이강백 편 중에서
사진출처 - 극단 백수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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