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비극의 일인자] 비극은 계속 되어야 하는가

구보씨 2016. 11. 5. 14:57

제목 : 비극의 일인자

일시 : 2016/11/05 ~ 2016/11/20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극작 : 김성민

연출 : 임후성

배우 : 김준삼, 김태훈, 주수정, 문형주, 장우정, 김나미, 노창균

주최/주관 : 극단 피오르(Theatre fjord)



<비극의 일인자>는 2012년 창작팩토리 대본 공모 당선작으로 2013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연극우수작품 제작지원 사업 및 2014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연극우수작품 재공연지원 사업으로 선정되어 공연을 올린 바 있다. <비극의 일인자>가 2016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연극분야 재공연지원작으로 다시 한 번 선정되었다.

 

연극으로 사고를 요구하는 인문학을 풀어낸다는 건, 시간을 되감을 수 없는 장르 특성상 쉽지 않은 작업이다. 촬영 기록으로 남길 수는 있으나 관객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접근 방식이 아니다. 삶이 그렇듯, 남의 삶이 나의 삶과 다르듯 같은 작품도 작년 혹은 내일 올라갈 작품 역시 오늘 내가 본 작품과 동일하지 않다. 극단이나 관객이나 모험이지만 허나 이런 도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2016년 올해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노래가사가 문학적인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이런저런 의견이 있지만 듣기로 노년의 밥 딜런은 우리가 여전히 기억하는 젊은 시절 평화, 인권, 반전을 노래하는 모습과 달랐다. ‘Blowin' In The Wind’를 비롯해 시대저항가수로 사람들이 기억하나 그는 훗날 자신의 노래에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고 말했다. 여전히 반전을 노래하는 동시대 존 바에즈와 전혀 다른 행보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억하는 혹은 기억하고 싶은 밥 딜런은, 스웨덴 한림원이 준 상은 과거 60년대 자유의 상징으로 강하게 남은 밥 딜런에게 준 상이지, 현재 밥 딜런을 향한 찬사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밥 딜런은 선약을 핑계로 시상식에 가지 않기로 했다.) 허나 한 사람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게 의미 있는 작업일까. 대중은 '스타'를 결국 늙고 추하고 치매에 걸린 '돌'로 기억하지 않고, 빛나는 '별'로만 기억한다. 타인의 기준으로 과거와 현재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연극 <비극의 일인자>는 남녀 사이 '사랑'과 유한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같은 선상에 두고 다룬다. 죽음 앞에서 사랑도 결국에 이별일 수밖에 없으니 비극이다. 죽음을 맞기 전에 우리는 사랑을 쉽게 망각하는데, 주인공 고일봉은 죽은 아내를 기억에서 불러와 계속 복기를 하면서 새로운 기억을 덧씌운다. 그러나 그가 불러낸 아내는, 그가 상상하는 아내는 실제 그녀가 맞는가. 비슷할 수는 있으나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아내가 아니다.

 

죽음은 강렬한 기억으로 생채기를 남긴다. 아내를 잊지 못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틀을 만들고 틀 안에 살아 있는 누군가를 들이지 않고, 오로지 아내를 위한 공간으로 보존하면서 기억을 보존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부질없다. 아내가 살아 있다면 아내는 그가 불어낸 그녀와 전혀 다른 존재일 것이다. 젊지도 상냥하지도 예쁘지도 않을 것이며, 쉽게 상처를 내고 상처를 받을 것이다.

 



예민하고 까칠한 남편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이혼 서류를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남편은 전혀 다른 여자와 그것도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누군가와 산다는 점에서 작가로 최고의 명예인 노벨문학상을 받지만, 비극의 일인자가 될 수밖에 없다. 냉정하게 보면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이런 판단을 하는 이유는 남편과 아내 사이,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일상의 소소한 감수성을 나름 포착했다고 보지만, 우리가 아는 사랑 이상으로 혹은 각종 매체를 통해 봤던 사랑의 행태 이상으로 딱히 더 각별한 이유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느 가정에서도 있을 법한 풍경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각별할 수도 있다. 작가의 의도는 그렇게 보인다. 불치병은 아내를 향한 사랑에 시한을 정한 유한성을 바탕으로 조급함 혹은 간절함을 더한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지는 않다. 인문학적 접근에 감성을 덧대는 방식은 좋은 시도지만 관객의 이해를 끌어냈는가, 끌어내는 작품으로 기획이나 추상적인 무대를 비롯해 연출 전반에 걸쳐 그러한가 돌아보면 그렇지는 않다.

 

결국 연극에서 다루는 죽음 혹은 존재의 유한성을 남녀 사이로 좁히고 빗대는 자체가 공감대를 형성했는지 고민스럽다. 막 사랑을 꿈꾸는 젊은 관객들은 어찌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사람이 유한하게 살면서 결코 알 수 없는 무한을 이야기하는 건, 관계에서 지루하고 끝없는 굴레를 느끼게 하게 때문이다. 어떤 의도로 작품을 만들었건 좀 더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평가를 박하게 하는 이유는 초연이 아니라서 그러하다. 2013년 이후 네 번째 공연이라면 실험적 시도라고 보기에는 무리다.*




사진 - 극단 피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