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전화벨이 울린다_NEWStage 2017] 낯선 전화를 받지 않는 시대

구보씨 2017. 1. 5. 11:20

제목 : 전화벨이 울린다.

일시 : 1. 5.(목) - 1. 8.(일) 

장소 : 동숭아트센터 동숭소극장 

작 · 연출 : 이연주

출연 : 신사랑, 백성철, 이선주, 최지연, 안병식, 박옥출, 이지혜, 서미영, 박수진

스텝 : 드라마터그 이양구, 무대디자인 신승열, 조명디자인 남경식, 사운드 목소, 의상 김우성, 분장 장경숙, 그래픽디자인 황가림, 조연출 류혜영, 기획 조하나

제작 : 전화벨이 울린다

후원 : 서울문화재단, 서울시




2016년 2월, 이연주 연출의 연극 <삼풍백화점>을 인상 깊게 봤다. 리뷰를 찾아보니 '기억하는 자가 바로 당사자다'라는 극중 대사를 적어놨었다. 우연히 발생한 사고로 인해 아이러니하게 행운아가 되어버린 ‘주변인’일 수밖에 없는 살아남은 자들이 된 관객들과 당사자도 제삼자도 아닌 주인공 사이 교감을 잘 이끌어냈다.

 

각색을 맡은 <삼풍백화점>과 달리 <전화벨이 울린다>는 과거 콜센터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연극을 보고난 뒤 휴대폰 통화목록을 보니 통신사, 보험사, 카드사, 은행, 관련 서비스업체의 그녀들과 통화한 내역이 적지 않다.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난, 그들이 추켜세우듯 호의적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이유로 쉬이 대했던가. 일전에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가 무표정한 얼굴이나 적대적이고 귀찮은 얼굴로 보는 한 무리의 여성들을 본 적이 있다. 뭉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 그들은 같은 건물 한 층을 사용하는 통신사 콜센터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대화가 없었다. 어른들인데도 세상에 불만 가득한 여중생 일진들처럼 보였다. 쉬는 시간, 그들이 원하는 건 입을 열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그들의 얘기를 가능한 한 가깝게 밀착해 무대로 올리고, 또 그간 연극에서 제대로 다룬 적이 없지 않았나 싶어 감정노동자의 실체를 공유하려는 시도만으로 박수를 받을 만하다.

 

다만 감정노동에 관한 문제 제기는 극중에서 다루는 자살 등 사회문제로 불거지자 각종 매체에서 이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다룬 바 있다. 감정노동자와 연극배우의 만남은 희곡으로 극의 중요 구조이고, 연출이 잘 아는 분야의 접목이라는 점에서 영리한 선택이다. 극중 감정노동자 수진이 연극배우에게 ‘연기’를 배우면서까지 내면과 외면을 부러 분리하려는 아이러니한 시도를 할 수밖에 없는 외연으로 외주 계약, 구조조정 문제를 사회적 배경으로 다룬 점도 고민의 흔적이다.



 

그래서 단역으로 잠깐 등장하는 회사 입구에서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1인 시위자가 투산 자살한 지은을 처음 발견하는 대목은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둘 다 회사로 상징할 수 있는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지은을 비롯한 비정규직들은 그들의 애초 지위가 불안하므로, 정규직의 구조조정 반대 시위에 관심이 없으나, 사적 영역이라 치부해 개인이 감당하는 게 당연하게 여겼던 인식과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이고 근본적 차원이라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 여겼던 비정규직 문제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닌 한 자리에서 비극으로 만난다는 점에서 뛰어난 연출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볼 때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바꾸자는 시도는 공연예술을 떠나 문화계 전반을 비롯해 주요 사회개혁 과제로 다루고 있는 문제이다. 하여 같은 주제를 다룰 때 연극은 좀 더 세밀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접근을 했을 때 미디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인, 대체로 적극적인 지지자지만, 꽤 까다로운 취향의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의 난점은 연극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선악구도를 단순하게 나눴다는 데에 있다. 극중 회사 정규직인 본부장만 회화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은 아쉽다. 극중 상담원을 괴물로 몰아가는 언어폭력은 ‘범죄’이다. 눈치를 봐서 그렇지 공론화한다면 형사 처벌이 가능한 해외 사례를 정책 도입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까. 아쉬운 대로 소비자가 폭언을 할 경우 사전 단선 허용 및 모니터링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회사에서 얼마나 잘 지키는지 모르겠다. 하여 이 작품은 특히 감정노동자를 고용하는 회사 임직원이 꼭 봐야 한다.

 

하지만 다수의 관객은 감정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고 ‘정보’를 주고받는 입장에서 적정선의 예의를 지키는 이들일 것이다. 또 기사를 보면 단순 상담보다 고객 대상 과한 텔레마케팅 독촉이 갈등을 빚는 원인이고, 상담원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이라고 하니 이 역시 회사에서 조심할 일이다. 그렇다면 비극으로 갈무리하는 이 작품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자리의 반 이상이 감정노동(통계청 자료)인 2016년, 보호대책이 미흡한 사회 현실을 직시했으나, 그 시도는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드물거나 늦었다고 보지만, 전형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극중 호프집 장면에서 주문을 깜빡한 아르바이트생에게 훈계하는 수진과 이런 수진이 갑질이라고 나무라는 민규 사이 오가는 대화는 의도가 직접 드러나는 바 계몽적이라 아쉽다. 이연주 연출의 두 작품만 보고 속단하기 어렵지만, ‘혼술’, ‘혼밥’이 키워드가 된 현실 그러하듯이 개인과 개인 사이 ‘거리’를 극 전개를 위해 쉬이 좁히지 않는 방식이-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영화감독 홍상수 작품처럼-이연주 연출의 장점이라고 봤다. 이 둘 사이도 그렇고, 고시원을 벗어나기가 요원한 두 청춘이, 낭만 따위 찾아볼 수 없는 그들 사이는 누군가 이사를 나가는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테다. 하지만 호프집에서는 둘 모두 쉽게 속을 드러내고 만다.



이연주 연출, 왼쪽에서 두 번째


미시적 관점에서 사회 전반의 문제이기도 감정노동자를 중심에 두었지만, 그들이 ‘대화’가 가능한 상대가 아님에도 ‘익명’의 누군가라도 찾아 대화를 시도하다가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유령 아닌 유령들이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현실이 동전의 양면처럼 눈에 들어온다. 지은이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갑작스레 자살을 택하는 장면 역시, 작위적이라고 보지만, 동료, 가족과 속내를 공유하지 못하고 단절한 채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연주 작가 혹은 연출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만, 좀 더 연극적으로 고민할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의 경험이 녹아들은 터라 거리두기가 쉽지 않을 테지만, 대다수의 ‘소비자’, 반쯤 유령이 된 그들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 - 서울연극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