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피카소 훔치기] 저급한 예술가들은 베낀다. 그러나 훌륭한 예술가들은 훔친다

구보씨 2016. 11. 5. 13:00

제목 : 피카소 훔치기

일시 : 2016/11/05 ~ 2016/11/13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극작 : 윌리엄 미조리 다운스

연출 : 박혜선

배우 : 홍원기, 정재은, 김수현, 김주완, 이봉련

제작 : 극단 사개탐사


 

가수이자 화가(몇몇은 인정하지 않지만) 조영남의 화투[花鬪] 시리즈. 아이러니하게 조영남은 그림 대작 논란으로 인해 현재 화투'畵鬪'. 그림 싸움으로 소송에 휘말려 있다. 천경자, 이우환, 조영남까지 요 사이 미술계는 위작, 대작 논란으로 시끄럽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원인은 호가, 돈이다. 진중권을 비롯해 많은 비평가들이 돌아가면서 얘기했지만 대중이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비평가나 감정인의 판단에 휘둘릴 수밖에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요사이 휴대전화의 놀라운 카메라 기술 발달이 인스타그램이라는 새로운 대중 미술시장(?)을 개척했지만, 방학시즌이면 이른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전시마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막상 가보면 유명 화가의 작품은 광고 포스터 한두 점에 그치긴 하지만 말이다.

 



연극 <피카소 훔치기>는 '상업주의에 훼손되어 경제적으로 환산되기 급급한 예술적 가치를 통렬하게 비판'한 작품이라고 한다. 미술시장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문화예술가로 성공하기란 요사이 모든 국민에게 회자되는 최순실 혹은 차은택 라인이라도 잡고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하다. 연극은 미술만 다루지만 공연예술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원은커녕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차별하니 예술인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예술계의 비(非)다양성과 그로 인해 폄하될 수밖에 없는 소신 있는 예술가들의 실존의식을 담고' 있는 연극은 어렵다고 하면 한없이 어렵고 난해하고 현학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대미술의 핵심 문제를 쉽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공공예술을 대안으로 삼는 주제답게 유쾌한 희극으로 풀어냈다. 앞서 말했지만 배경인 미국과 다른 의미로 참 척박한 한국의 상황에서 미국의 미술 시장 얘기를 쉽게 풀어 덧대는 작업이 한편으로 세심함을 요구하지만 세심한 연출에 능한 박혜선 연출은 극단 대표로서도 연출가 혹은 각색자로도 어울리는 선택을 했다.



 

대통령 문제로 골치를 썩기는 그리 다르지 않은 미국의 45대 경선과 대선 결과(11.8일 투표)를 보면 허경영 미국 버전으로만 봤던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이라는 이변을 낳았다. 이를 분석한 방송을 보니 이른바 러스트벨트[rust belt]의 반란을 꼽았는데, 이곳은 연극의 배경이기도 한 디트로이트를 포함해 과거 제조업의 호황을 구가했던 중심지였으나 사양화 등으로 불황을 맞은 지역을 의미한다.

 

주인공 가족이 사는 동네는 빈민가에 빈 집이 수두룩하고, 개 짓는 소리만 요란한 슬럼가이다. ‘미국 디트로이트 인근의 낡고 오래된 예술가의 집. 주변은 마치 무당집처럼 시의어가 써진 설치미술로 가득한 무대’라는 설정이다. 극중 대사를 보면 현찰을 들고 다녔다가는 당장에라도 강도를 당하는 게 당연해, 호신용으로 권총 한 자루씩 챙겨 다닌다. 그럼에도 2억 달러짜리 피카소 그림을 비롯해 이른바 명작이라 꼽는 값비싼 미술품들로 가득한 박물관이 도시 한가운데 있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동네이기도 하다. 작가는 실제 디트로이트에서 이런 부조화를 이룬 현실을 보면서 글을 구상하고 썼다고 밝혔다.



 

과거 자동차 산업의 대표주자였던 전성기 시절의 찬란한 흔적이나 감상과 공감이라는 예술적 가치 따위 읽은지 오래, 작품을 도난당할까 전전긍긍하는 자본주의의 치부만 남긴 도시의 민낯이다. 소극장 작품답게 5명만 등장하지만 자본주의 상징처럼 등장하지만 그리 밉지 않은 미술관장 오토부터 가출해 3년 만에 변호사가 되어 갑자기 찾아온 아들 조니, 그의 쌍둥이 누이이자 거리예술가인 캐시, 30년째 각광을 못 받고 있는 화가 아버지 오토, 신경쇠약으로 위태로워 보이지만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엄마 벨까지 제각각 사회적 배경과 개인 가치가 다른 인물로 뚜렷한 구분을 보여 작품이 빈곳이 없고 알차다. 배역에 맞게 배우들 역시 누구 한 명 빼놓을 수 없이 내공 있는, 미술 작품으로 치면 꽤 잘 그린 '명품'다운 배우들만 나오니 그들 사이 조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관객에 대한 배려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남녀노소 누가 봐도 재밌는 작품이지만 다루는 파격적인 화두에 비해 다소 밋밋한 감이 없지 않다. 3년 만에 재회한 가족 사이 화합이라는 결말에 맥이 살짝 풀리기도 하지만 연말에 보기 좋은 작품이다. 추천작이다*




사진출처 - 극단 사개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