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외

[한국마임2015_어루만지는 몸] 몸에 대한 정직

구보씨 2015. 10. 6. 13:16

제목 : 2015 한국마임_어루만지는 몸

일시 : 2015/10/06 ~ 2015/10/18 (10/13화)

장소 : 동양예술극장 2관 (구.아트센터K 세모극장)

연출/출연 : 유진규

주최/주관 : 한국마임협회



52년생. 환갑을 훌쩍 넘긴 유진규는 머리를 박박 밀었다. 마임을 하려면 나이를 지워야 한다. 짧은 머리는 나이를 감춘다. 헐렁한 검은 양복은 몸을 크게 부풀린다. 40년 마임을 한 그는 아직 청춘이다. 그의 몸은 마임을 하기 좋게 나이가 배어들었다. 유진규의 ‘어루만지는 몸’은 한국마임협회가 ‘2015 한국마임_에볼루션’행사 가운데 가장 관심을 받은 공연이다.

 

마임하면 찰리채플린 흉내를 내거나 가상의 문, 가방, 유리창, 바늘 연기 등 팬터마임만 떠오른다. 하지만 배우들이 연기 기초로 배운 정도가 마임의 전부일리 없다. 마음은 한편으로 무용과 연기 사이 어디쯤 스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제약을 만들어 언제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장르이다. 심지어 나이나 국적이 달라도 상관없는 장르이다.

 

그러나 마임이 연극이나 무용을 비롯한 공연 예술 가운데 인지도가 높은지 모르겠다. 유진규의 이름 앞에도 ‘척박한 마임계 40년’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붙는다. mimeist는 마임 아티스트를 불리는 호칭도 마임이스트라 발음하고 적지만 마이미스트이라고 적기도 한다. 규정이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일까. 내 스스로도 나름 공연예술을 보러 다니는 편이라고 생각하나 정식 마임 공연을 보러 간 기억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유진규, 마임이스트로 유일하다시피하게 알려진 아티스트의 이름이 붙은 공연이지만 소극장은 다 차지 않는다. 춘천마임축제는 성공한 행사로 25년을 이어오고 있지만 대학로에서도 마임이 환영받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 와중에 관객 중에 행사를 주관한 협회 회원들이 어느 정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기회가 많겠으나 어쩌면 이번이 유진규를 무대와 객석을 마주하고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길하다면 불길하고, 여전히 마임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 그다지 공연을 대하는 태도로 치면 불성실한 채로 극장을 찾았다. 갑작스럽다 싶게 날씨가 쌀쌀했다. 공연을 보기 전부터 공연 후에 마실 소주 한 잔 생각이 났다. 70분 짧은 러닝타임이 아니라면 같이 온 지인 역시 선뜻 시간을 내지 않았다고 했다.

 

무대 위에는 무엇도 없고 유진규만 객석 뒤에서 나와 무대에 섰다. 그는 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관객이 극장에 올 때 다 놓고 올 수 있어도 놓고 올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몸이라고 했다. 내가 곧 몸인가 싶지만 몸은 자체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엇이고 변화라고 했다. 눈을 감고 손으로 눈을 쓰다듬고, 몸을 어루만지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따라하지만 쌀쌀한 날씨 탓인지 공기가 달아오르지 않는다.

 

세월호의 안타까움, 아직 배 안에 갇힌 아홉 명의 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차근차근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몸으로 익힌 40년 경지를 느끼러 왔다고 마음먹었던 바, 이야기가 좀 싱겁게 느껴진다. 무대 위에 참 오래 많이도 섰을 텐데 왠지 친구 결혼식 사회를 보는 청년처럼 왠지 어색하다.



 

작품에 앞서 풀어내는 이야기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 텅 빈 공연장은 을씨년스럽다. 그가 서 있던 작은 공간 탑 조명이 꺼지고 켜지면 옷을 벗은 그가 등장한다. 환갑을 넘긴 배우의 몸은 나이에 비해 잘 단련되어 있지만 자연스럽고 정직해 보인다. 몸에 애정을 갖는다는 건 살을 빼고 근육을 부풀리는 건 만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조명과 손전등과 성냥을 활용한 빛의 차단 혹은 구분은 손짓 하나하나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몸에 비해 큰 얼굴은 마임을 하기에 적합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얼굴은 중요하지 않다. 매체를 통해 얼굴 근육 유방 아니면 성기 부근을 도드라지게 연출한 컷에 익숙한 요즘 주목하지 않았을 팔, 손, 어깨, 발, 발목이 어둠에서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엮어나갔을 작품은 단순에 산만한 극장 분위기를 한껏 몰입시킨다. 몇 편의 작품 중에 한지의 반투과성과 극장 뒷벽에 비친 그림자를 활용한 ‘한지’는 단연 압권이다. 마임 역시 경계를 한계 지을 필요가 없는 바, 이 작품은 그간 봐왔던 몇 편의 무용과 음악과 영상이 결합한 미디어 복합장르와도 통하고 원시적 제의(祭儀)가 가진 무의식의 깊은 이면과도 상통한다.

 

정작 공연은 길지 않으나 그 안에 하이쿠를 짓는 일본의 고승이 엿보이고,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충격적인 짓이긴 신체가 드러나기도 한다. 몸이 자체로 중국의 변검처럼 변화하는가 하면 악동처럼 뛰어놀기도 한다. 순수함 못지않게 희로애락과 각종 욕정이 서로 어울리는 모습은 결국 기괴하다고, 밖에 얘기를 하지 못하겠다. 그러고선 홀연히 무대 뒤로 사라진다.

 

예술가의 덕목이라는 건 이렇게 다 까발려도 감출 게 없어야 한다는 정직해야 한다, 는 일침일까. 아무려나 ‘이것이 마임이다’라고 개념을 새롭게 세우는 시간이었다.* 


사진출처 - 한국마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