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외

[연극연출가 심재찬 강연회] 서라벌예대가 낳은 마지막 한량

구보씨 2014. 7. 25. 15:11

 


그의 얘기를 듣는 내내 심심했다. 70년대 초반, 중앙대학교로 편입되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지금의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버금가는 예술전문학교인 서라벌예대 연극학과를 전공할 당시 일화를 푸는 자리였다. 서라벌예대 출신들은 연극, 문학, 미술 등 예술 각 분야에 걸쳐 큰 획을 그었던 한국 예술계의 큰 자산을 낳은 곳이다. 그중 선남선녀들이 모인다는 연극학과이니 범상치 않은 일화가 우르르 쏟아져 나올 줄 알았던 게다. 개인 체험보다 사건을 나열하는 식이 무던하게 들리다 말았다.

 

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지도 않다. 합격했으나 집안 반대로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 입학금을 내지 않아 가짜 학생 신분으로 학교를 다녔다는 일화부터가 심상치 않은 일이다. 내가 들은 강좌가 ‘서라벌예대 출신 원로 문화예술인에 대한 구술채록’이니, 가짜 학생이 천연덕스럽게 학교 얘기를 늘어놓은 셈이다.

 

당시 교수, 선후배, 동기도 다 아는 처지였고, 그러려니 했다고 하는데, 요즘이라면 당장 끌려 나가 사기죄로 잡혀갈 일이다. 군사독재시절, 시절이 주먹구구가 통하고 널널하여 그랬을까. 이유가 그 정도였다면 요즘도 먹고살기 고달픈 연극학도 생활을 4년 내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재찬은 적을 두고 안두고 숨길 일도 아니라는 투다. 당시 고등학교 졸업선물로 받은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이천 원으로 학교 길 건너편 미아리 술집촌의, 그의 표현을 빌자면 ‘대문의 대문의 대문을 지나’ 가장 구석진 쪽방을 한 달간 얻어 살았다는 얘기도 생각하면 보통 일이 아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녀석이 술집 여급들과 밥상을 두고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화 역시도 떠올려보면 참 연극 같은 일이다. 심재찬은 연출가의 자질로 첫 손에 꼽기를 배우들 사이 갈등 해결이라고 했다. 학생도 아닌 것이 학생인 척 학교를 다니고, 손님도 아닌 것이 손님인 양 술집을 드나들고, 닳고 닳은 건달은커녕 순둥이 같은 어린놈이 아무렇지 않게 술집 누님들과 어울려 밥을 얻어먹었다는 스무 살 심재찬은 연출가 싹수가 파릇했던 셈이다. 2014년 대학 풍토는 어떤가. 같은 학교 같은 학과를 다니면서도 정시, 수시, 재수, 특별전형, 편입 등 입시결과에 따라 골품제에 빗대 구분을 하고 차별을 한다니, 요즘 학생들이 심재찬 연출 얘기를 들었다면 기가 차 할 것이다.

 

아무려나 학교 밖 사회는 학교와 달라서 냉정했을 것이다.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연극을 한다? 남들이 볼 때 혀를 끌끌 찰 일이다. 선배들이 알코올중독에 빠지거나, 술병으로 요절을 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는 걸 보면 연극인으로 시대와 불화, 괴리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본다.

 


 

포털 사이트에 실린 프로필을 보면 학력 정보가 아예 없다. 심재찬은 졸업 아닌 졸업을 하고 아무려나 고졸로 교수를 따라 극단에 들어간 뒤로 30년 넘게 연출가로 견디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이상 학벌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도 했을 것이다. 오십 즈음부터 조금씩 풀렸다고 하는데, 뚝심이 아니라면 견디어 냈을까 싶다.

 

30여 년 전, 서라벌예대 동문으로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함께 일하던 두 명의 견습생은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그 ‘먼 훗날’이 도대체 언제가 될 지는 기약이 없었다. 한 사람은 얼마 안 가 연극 연출을 그만두고 전문예술경영인이 됐고, 다른 한 사람은 고단한 연극판에서 고집스럽게 입지를 넓혀 나갔다. 조석준 고양문화재단대표와 연극연출가 심재찬의 이야기다. 



“30년 전 연극 약속 오셀로로 결실” 헤럴드경제 2009-04-30

 

5년 전 기사를 두고 어림잡아 짐작해보면 두 동문 아닌 동문 사이 갈림길이 단지 의지 여부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아무려나 둘은 해후를 했다는 게 기사 요지인데, 관객 입장에서 보면 심재찬은 들어봤어도, 그 동기는 누군지 모르고, 관심도 없다. 육십을 넘겼으나 현역 연출가인 심재찬은 연극을 좋아하는 이들의 관심 범위 안에 있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건 연극무대는 새로운 관객을 만나고, 연출은 그들과 조율을 잘 해야 한다.

 

그는 또래 동문들이 서류철을 끼적일 때나 유유자적 낚싯대를 드리울 때, 여전히 극장 연습실에서 손자뻘인 배우들의 손짓 발짓을 유심히 바라볼 것이다. 올해 6월 산울림소극장(100석)에서 연극 <챙>을 임영웅 대표와 공동연출로 올리더니, 8월이면 대전 예술의전당 앙상블홀( 700석)에서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을 만들러 내려간단다.

 

한국에서 예술만 그런 건 아니나 지원이나 정책이 서울로 몰리는 현실에서 대학로를 떠나 어디든 작품을 만들러 다니는 그를 보면, 한편으로 졸업장이 없는 편이 학벌주의에 빠진 속물들 달리 그를 자유롭게 풀어준 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609353.html 

 

오랫동안 현장에서 고달팠던 경험이 현재진행형인 현실을 보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세우는데 일조를 하고 초대 상임이사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재찬은 예술계의 가장 큰 숙원인 복지재단 설립 1년을 채 채우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깊은 속사정은 모르나 당시 문체부가 갑질과 횡포를 부렸다는 정황이 여기저기 들린다. 그래도 그럭저럭 참고 있었다면 그냥저냥 자리보전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려나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렇다고 요즘 방에 콕 박힌 찌질한 백수는 아니고, 사방팔방 휘이 다니는 한량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