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외

[몸으로 거론한다는 것_두산아트랩 2016] 그래도 당신은 협업을 해야 해야 한다

구보씨 2016. 3. 17. 11:48

제목 : 두산아트랩_몸으로 거론한다는 것

일시 : 2016.03.17 ~ 2016.03.19

장소 : Space111

연출/무용 : 장현준

드라마터그 : 최은진

음악 : 이강일, 김지연

영상 : 정다울

제작 : 두산아트센터


연출이자 출연자인 장현준이 말하길, 전작 <구경꾼 : 처럼, 곁에 했다>(이하 구경꾼)에 대한 반성, 복기, 공유 및 이후 발전을 위한 과정으로 공연이라고 했다. 영상으로 잠시 소개한 자료만으로는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없다. 그의 얘기로 짐작만 가능하다.... 


난 리뷰를 쓰기에 앞서 정보를 찾아봐야 하는가, 잠시 고민한다. 공연과 홍보물 사이 간극이 얼마나 큰 지 안다. 더욱이 ‘몸으로 거론하기’라는 식의 관념이 감상이 아닌 정보로 다가오는 순간 만족보다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패를 했을 때 보이는 반응은 포기하고 다른 작품을 만들거나 어떻게든 완성도를 올리는 식이다. 장현준은 관객과 함께 복기를 통해 판단을 내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정보가 없는 관객과 함께라니, 결국 변명과 풀이의 시간이다.

 

올해 상반기 다섯 편의 작품은 두산아트랩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혹은 만나지 않았을 예술가들의 것이다. 두산아트랩의 장점은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을 무료 공연이니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무료라 한들 완성작이 아닌 이상, 기획자들 안목에 만족을 신뢰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현준 작품 관람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색다른 경험인데, 앞서 네 편과 달리 성격이 다르다. 


기존 작품들이 장르와 상관없이 시도 혹은 재시작의 의미가 강하다면 <몸으로 거론한다는 것>은 과거 작품 <구경꾼>이 모티브로 일종의 후일담이다.



 

<구경꾼>은 무용, 영상,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함께 만드는 멀티미디어 라이브 공연으로 연출가인 장현준을 비롯해서 안무가, 무용수, 뮤지션, 영화감독, 디자이너, 프로듀서 등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함께 모여 만든 작품입니다.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잊혀져가는 현실과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끔찍한 사건 앞에서 무기력한 구경꾼이 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2015년 마지막 성찰과 위로’ 라는 공연 주제로, ‘몸’ 자체가 관점이 되어 재난 앞의 구경꾼이 되는 모습을 음악과 영상 그리고 몸짓으로 느낄 수 있는 공연입니다.  -[구경꾼] 설명 중에서

 

여기서 말하는 재난은 ‘세월호 침몰사고’를 말한다. 그의 말처럼 세월호 침몰사고를 두고 구경꾼으로 전락한 우리들 역시 불쌍하고 비참하다. 구경꾼은 엉뚱하게 진보와 보수, 종북과 극우 틀에 허우적거리다 피로감에 잊으려고 하는 와중이라는 게 배경이다. 작가는 구경꾼이 아닌 재난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인식을 하자 느꼈던 공포의 감각을 예술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예술가로 꼭 필요한 질문이었고, 관객 입장에서 기다렸던 기획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 문장과 무대 사이 거리를 극복했는지 공연을 보지 못했으니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의 고민이 새로운 건 아니다. 지원의 조련성이 몸에 익은 공연계가 자체 거세로 쫄보가 된 게 사실이지만, 장현준이 <구경꾼>으로 지원을 받은 서울문화재단을 통해 세월호 1주기 특별 기획 <물의 기억>이 있었고, 지원을 택하지 않고 자유를 택한 혜화동1번지 동인 연극제나 변방연극제 등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기도 했다.

 

세월호 침몰 이후 2년, 상황이 당시와 달라진 게 없으니 <몸으로 거론한다는 것>이 복기한다는 자체가 의미 없지는 않다. 허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세월호라는 이슈의 연장선이 아니라 작품을 올리면서 본인이 겪은 당혹 혹은 실망에 대한 되물음이 대부분이다. 세월호는 이제 그의 관심사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 있고, 그 스스로 말하길 계몽이나 선동의 의도가 아니므로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왜 형식이 있고 지원 목적이 분명한 아트랩에서 그 얘기를 하는가? <구경꾼> 당시 그가 한 실망은 유료 관객수가 적었다거나, 관람평이 혹독했다거나 하는 외부로부터 기인한 건 아닌 듯하다. 예술가들과 협업을 통해 시도했던 몇 가지 시도들-공동창작 체제 구축, 순수예술성을 잃지 않고 흥행성, 상업성을 바탕으로 관람료로 제작비를 회수하는 자본구조 실험 등-이 좌절되면서 입은 내상 극복이 우선처럼 보인다. (예술가의 내상 극복 과정으로의 참여, 는 나름 실험이라는 아트랩 의도와 묘하게 부합된다.)




하지만 본인의 작품을 본인이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작업은, ‘즉흥’이라는 의도와 맞지 않고 어떻게 바뀔지 모를 ‘과정’이라고 하니 역시 맞지 않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가지를 치고 바뀌고 발전할지, 혹은 그만해도 그만인 기획이라 관객이 짐작하기 어렵다. 문제는 관객 입장에서 장현준이 누군지 모르고 관심사가 아닌데도 작품과 동떨어진 채로 그가 한 말을 가지고 지금까지 쓴 리뷰처럼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작품은 완성도랄 게 없으니 장현준이 어떤 얘기를 하는가, 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허나 작품과 작가나 연출가가 분리되지 않은 작품은 결국 연출가는 방어적이게 되고, 앞으로 나온 연출가를 보면서 관객은 동정심을 품게 된다. 아무려나 완성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시도와 과정만 얘기하는 건 비겁하다. 장소와 상관없이 그러한데, 더욱이 거리 공연과 달리 객석은 일종의 자발적 억압 공간이다. 보고 듣고 싶지 않아도 앉아 있어야 한다. 이 공연을 앞두고 스스로 할 수 있는 포지션이 즉흥 무용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본인이 겪은 무용 교육, 이해, 형식 등 무용을 둘러싼 현실을 두고 비판을 하기 전에, 현대무용수들 정도의 숙련도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 무용수로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이상 무용수를 고용해 이야기를 풀어냈어야 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지원처를 찾아 지원서를 내밀면서 기획서와 다른 프로토타입에 두고 한 지원처의 지적이나 지원 탈락-검열이라기보다 룰이라고 보는데-을 외부 탓으로 돌리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식의 발언도 의도와 다르게, 치기 어리게 들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지원 자격이나 룰에 얽매이는 대신, 지원과 상관없이 후원이든 펀딩이든 공연을 올릴 실력을 키워라.

 

그가 말하는 창작과 준비 과정 동안 겪은 고통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 아닌 작품에서 확인하고 싶다. 냉혹하게 말하자면 이날 아트랩은 과거 모았던 폴더에서 캡처 사진, 작품 영상물 일부를 보여주고 이를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 정도가 아닌가. 공연 시간 전에 ‘몸’으로 보여준 퍼포먼스가 있었는데, 그 중에 이전 공연에 썼던 방식 외에 새로운 시도가 있었는지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몸을 쓰는 예술가로 연출이 아닌 무대에 서고 싶다면 마임을 배우길 권한다. 예순을 넘긴 유진규는 마임이나 무용, 몸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몸으로 거론한다는 것’이라는 제목에 부합하는 작품을 올리고 관객은 몸으로 느낀다. 객석에서 짜릿하게 느낀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는 경험이 있다. 말로 길게 풀어내지 않아도 되는 경지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