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극 <품바>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2011년 올해 탄생 30주년을 맞아 1인극 원작에서 5인극으로 재구성했고, 고 김시라 연출의 아내 공연제작자(상상아트홀 대표) 박정재 씨와 딸 가수 겸 연극배우 김추리 씨가 각각 연출과 주연을 맡아서 더욱 새록새록하지요. 서울 부자들이 득시글한 강남(상상아트홀)에서 막을 올린 뒤 2개월째 순항중입니다. 의도했던 부분인지 모르겠지만 강남에서 펼치는 거지들 이야기라, 왠지 적진에 뛰어든 특공대 같기도 하고,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속내야 오픈런 공연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지요. 다시 탄생한 <품바>의 인기는 계속 되길 희망합니다. 저도 한 번 찾아갈 계획이구요. <품바> 재공연 소식을 듣고 보니, 2008년 여름, 소극장 축제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소회를 적어뒀던 게 생각이 나서 옮겨봤습니다. 벌써 3년 전이네요.
<품바>는 1981년 초연된 이후 지금껏 4000회가 넘어서 한국기네스북에 기재가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작품이지요. 저는 중학생 때 누나가 데이트를 하고 돌아와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연극표를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보자보자 했는데, 드디어 보는구나! 싶은 생각에 평일 낮 공연임에도 부랴부랴 땡땡이(?)를 치고서 달라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평일 낮 공연을 하는 경우가 드문데요. 그만큼 공연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관객 입장에서는 선택의 기회가 넓어지는 만큼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목요일 오후 4시 공연이라, 자리가 넉넉하려니 생각하고 갔는데,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더라고요. 대부분 할머니들이셨습니다. 알고 보니 관악주민자치연대에서 인근의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주민 50여 분을 모시고 온 자리였습니다. 덩달아 같이 서 있다가 휠체어에 의지해서 온 분을 도와 들고 끌고 극장에 내려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지요. 그렇게 작은 소극장 축제의 객석은 꽉 찼습니다. 제법 ‘흥이 나겠구나’ 싶었습니다. 안 그래도 마당극인 품바가 각설이와 객석과의 호흡이 정말 중요하잖아요. 품바 공연 2000회 이상 참여한 고수 김승덕 씨가 나와서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적을 때에는 관객 10명을 놓고도 한 적이 있다는 얘기와 함께 말이지요. 그렇게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부터 널리 알려진 내용이고 하니 각설이와 고수의 연기와 호흡을 보는 맛에 갔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16대 품바, 전수환 씨의 능청스런 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헌데, 할머니 한 분이 대뜸 “공기가 이리 안 좋을 줄 알았으면 안 왔다”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십니다. 지하 소극장이고 사람들이 많으니 이해가 됩니다. 오랜 만에 공연 나들이이실텐데, 이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정신지체이지 싶은 청년은 공연 내내 그 내용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복기합니다. 독특하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공연 감상기이긴 하지만 좀 조마조마합니다. 공연 내내 할머니들은 화장실을 들락날락 정신이 없습니다. 역시 익숙하지 못한 경험이고, 또 소극장이다보니 자리도 좀 불편해서 그러시나 봅니다. 할머니들이 컴컴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아슬아슬해서 정신이 없습니다. 따라온 자원봉사자들도 정신이 없긴 매한가지입니다. (맨 뒤에 앉은 덕분에 두루두루 잘 볼 수 있었지요.)
그런데, 기분이 상하기보다는 실제 장날 시장인 듯 어수수한 분위기가 얼추 공연 내용과 어울립니다. 배우도 연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잘 이해하고 공연을 진행합니다. 관객들과의 호흡도 얼추 맞았고요. 멜라닌, 경찰청장, 국회의원 등등 현실을 빗대어 꼬집는 말도 종종 꺼내듭니다. 객석의 반응도 제법 좋았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과 할머니들의 단체 사진까지, 이럭저럭 무난한 공연이었습니다. 헌데 막상 공연장을 나오고 보니 왠지 모르게 뒷맛이 씁쓸합니다. 큰 기대를 했던 탓도 있겠지만 뭔가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마당극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풍자’입니다. 그런데 품바가 보여주는 풍자가 좀 미적지근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시대에 바로바로 조응하여서 재기발랄하고, 순발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과연 ‘거지의 일대기’를 보러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티비만 틀어도 구구절절 가슴 아픈 얘기가 차고 넘치는 세상입니다. 각설이, 요즘말로 하자면 노숙자 정도가 되겠지요. 가장 밑바닥 인생인 각설이는 세상 환경에 누구보다도 가장 민감한 계층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각설이 다시 말해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승급(upgrade)하지 않는 풍자라면 정말 각설이일까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멜라닌, 경찰청장 문제 등 살짝살짝 건드리는 정도여서 신문 만평 수준이었습니다. 각설(却說)이가 고수의 말대로 깨달을 각을 쓰는 각설(覺說)이가 되려면 관객들의 기존의 잣대를 넘지 못하는 머릿속을 한 방에 말끔하게 깨부수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현실의식이 치열해야 하겠죠. 각설이의 신화는 80년대 암울했던 시대에서 반짝 빛나는 풍자에 있었음을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각설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각설이의 진화를 기대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과 호흡하는 대목에서 관객에게 직접 객석을 돌며 구걸을 시키는 대목이 좀 걸렸습니다. 관객에게 깡통을 들고 나서게 하는 것까지야 재미있게 봤습니다만, 관객들이 적선한 돈에서 바로 3000원씩 일당이라며 꺼내주고는 날름 챙기는 장면은 뭔가 앵벌이를 시키는 듯해 보이기도 하고, 삥 뜯는 것처럼 보였단 말이죠. 돈 대신 작은 기념품을 준비해서 주는 게 좋다고 봅니다. 게다가 객석에서 자발적으로 낸 돈이 작은 금액이라 해도 관람료를 내고 온 관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이 보였습니다. (하필 가난한 할머니들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날 공연에 영구임대아파트 할머니들이 많이 오셨다고 했는데요. 그분들이 돈 대신 간식으로 싸온 고구마며 간식을 깡통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각설이가 고구마는 뒷전이라, 구걸을 시킨 관객에게 주고는 돈에만 관심을 갖는 모습이 좀 아쉬웠습니다. 아무리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거지라면 돈도 돈이지만 먹거리에 우선 눈이 가지 않겠습니까? 구걸을 돌게 할라치면 리얼해야 되는데요. 그것도 아니고요. 연극 도중에 목이 메는 고구마를 먹기도 쉽지 않았겠습니다만은 짐짓 욕심을 내어 먼저 챙기는 척을 했더라면 고구마를 낸 할머니 자신이 무안해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진출처 - 뉴스컬쳐, 극단 가가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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