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들 : 더 코러스 - 오이디푸스, 디 오써
소포클레스 원작, 서재형 연출의 <더 코러스 - 오이디푸스The Chorus;OEdipous>(2011/04/26~05/01, LG아트센터)는 배우와 관객 사이 교감을 일정하게 유지하게 위해 1000석 객석을 포기하고 무대 안에 300석을 마련했고, 팀 크라우치 작, 김동현 연출 <디 오써The Author>(2011/04/26~05/28 두산아트센터 Space111)는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려는 의도로 무대와 객석 경계를 지웠다고 한다. 요 사이 무대 안으로 객석을 들이거나 객석과 구분 없이 사용하는 해체와 재결합 형식으로 눈에 띄는 두 작품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지우는 방식은 공연예술 장르 사이 융합을 시도하는 공연에서 익숙한 방식이라 형식으로 의미가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더 코러스>가 LG아트센터가 자체 제작한 공연이고, <디 오써> 역시 참신한 기획으로 호평을 받는 두산아트센터 기획이라, 연출 의도와 더불어 제작 방식 변화를 눈여겨 볼만하다. Space11이 소극장이니 LG아트센터와 입장이 다르긴 하지만, 민간 극장의 이런 변화는 5년 전부터 공공극장 중심으로 중극장 개관이 늘자 대관 위주에서 극장 자체 제작/기획 공연이 줄을 잇는 추세와 같은 선상에서 눈길을 끈다.
더 코러스 - 오이디푸스The Chorus;OEdipous
공공 극장은 기획/제작 공연 편수는 많지만 지원 액수, 제작 환경이 문제로 꼽히고, 수익을 내야 하는 민간 극장은 앞으로 행보를 담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응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그리고 중견 연출가들의 중극장 공연 제작 참여가 늘면서 극단 해체 논란 등 내외로 진통이 있어 공연 관계자마다 신중한 입장이다. 같은 맥락에서 올 5월부터 8월까지 총 네 편을 올리는 극단 작은 신화 25주년 기획전을 두고 마냥 축하만 할 수 없는 분위기다. 한쪽으로 종속되는 제작 방식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은 공연 예술이 할 수 있는 특권이자, 스크린에 종속된 영화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다.
내 스스로 공연 정책 전반의 흐름을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런 얘기를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취향의 문제일 뿐 영화와 연극의 관계를 고민할 이유도 없다. 다만 내가 받은 ‘무대와 객석의 전복이 가져오는 감흥이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보기 드문 일회성 경험으로 그칠까 하는 노파심이 든 탓이다. 그리고 그 감흥은 단순히 실험이 아니라 가장 연극다운 연극을 봤을 때 두근거림이다.
디 오써The Author
서푼짜리 오페라
<디 오써> 김동현 연출은 <더 코러스> 무대 형식을 작년 6월에 교수로 재직 중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레퍼토리 공연에서 음악극 <서푼짜리 오페라>를 526석 중극장에서 올린 적이 있다. 학교 연극이라고 하나 “20세기 예술의 가장 위대한 창조적 협력관계 중 하나”로 꼽히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와 크르트 바일(Kurt Weill, 1900~50)이 함께한 음악극에 올해 뮤지컬어워즈 신인상 수상으로 영역을 계속 넓히는 중인 국악인 이자람이 음악 감독으로 참여한 작품이라 기대가 높았다.
무대와 객석 구성을 보면, 무대 안쪽에서 객석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간이 객석을 채우고 그 앞에 높지 않은 허름한 간이 세트를 세워서 간이 객석과 빈 객석 사이에 무대가 선 구조다. 간이 객석에서 앉으면 세트 뒤로 객석이 그대로 보이면서, 관객 스스로가 무대 안쪽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방식은 18세기 영국의 정치 사회 부패를 꼬집은 원작 의도를 21세기 한국 무대로 오면서 풍자 대상을 몇몇 정치지도자들이 아닌, 사회 전체에게 되물으려는 시도다. 작품을 보면서 웃을수록 관객 스스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는 넓게는 촛불집회로 마찰을 빚은 정권을 두고 스스로 뽑았다는 자괴감과 실망이 녹아 있다고 봤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 객석을 벗어나 극장을 나서다가 뒤돌아보면 판자를 덧대 짜서 세운 세트 뒷면의 앙상함과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고 남은 어수선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서푼짜리 오페라>의 원본인 존 게이(John Gay, 1685~1732)의 <거지 오페라>가 당시 정형화된 호화로운 오페라를 비꼰 방식을 구현한 셈이다. 앞서 관객 스스로 풍자의 대상으로 배치한 무대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을 연극을 만든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우리도 다를 바 없다는 고백처럼 보인다. 공교롭게도 <서푼짜리 오페라>는 총장 사퇴, 1인 시위 등 한예종이 문화체육관광부와 마찰을 빚은 지 1년, 앙금이 남은 상황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으로 이름을 올린 '예술학교 아트 프로그램 페스티벌 CUBE'전 <6원 6색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브레히트와 문광부를 조합한 한예종 공연이라, 당시 기분은 좀 묘했다.
2010년식 연출
이런 자의적 판단은 김동현 연출의 의도가-아니어도 상관없지만-아니거나 혹은 한쪽 부분만 과장된 해석일 수 있다. 그가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수상 등 좋은 연출가임에는 분명하지만 사회비판을 직설로 풀어내는 작가는 아니다. <서푼짜리 오페라>가 상업성을 갖춘 작품이 아닌 바에야 제작 규모로 보아 기성 극단에서 제대로 올리기 힘든 작품이라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무대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 목적과, 결과론이지만 <디 오써>와 같은 시도를 염두에 둔 연출의 소박한 소산일 수 있다. 의도가 무엇이건 객석 규모를 1/3쯤 줄이더라도 무대가 객석을 끌어 앉는 방식은 무대와 객석을 구분한 작품이 줄 수 없는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이 작품이 작품과 연관성을 맺지 못한 채로 단순한 실험 수준에 그쳤다면 되레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고, 솔직히 학교 발표작이라 그 정도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희곡 창작 연출 외에도 시, 라디오, 방송, 대담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사회 부조리와 대립각을 세운 브레히트 작품을 이 시대에 올린다면 이런 무대 연출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서푼짜리 오페라>가 당시 연극과 오페라 형식에 대항한 실험적 반기였고, 제목부터 부르주와 문화에 반기를 든 작품이라 선언했다면 말이다. 브레히트 작품의 열린 구조는 늘 작품의 일정 지분 이상을 관객의 몫으로 분명히 해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관습을 탈피한 연출 방식은 무척 효과적이다.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촘촘히 붙인 접이식 의자에 2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 게 쉽지만은 않다. 옆자리 할머니 둘은 공연 시작하자마자 곧 딱딱한 의자를 불평하더니 한 시간쯤 지났을까, 화장실을 가야겠다면서 짜증을 냈다. 연기하는 학생 친척으로 오셨나 싶은데,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노래나 춤이 단 시일에 실력을 끌어올리기 힘들고, 게다가 3일 4번 공연을 두 팀이 번갈아 하니 기성 무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높지 않았다. 요실금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언제라도 자리를 비켜드릴 용의를 가지고 작품을 봤는데, 내가 일어서면 앞뒤좌우로 우르르 동시에 일어서야 할 판이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심지어 이런 우연한 돌발 상황도 제작 여건 상 제약이 아니라 발을 들여놓으면 옴짝달싹 못하는 시대 상황을 빗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무대 안으로 객석을 끌어들인 작품이 없지 않으나 그 의도가 제대로 드러난 작품은 손에 꼽을 만하다는 점에서 우연치 않은 기회에 본 <서푼짜리 오페라>는 연극을 보는 시선을 넓혀준 작품이다.*
오픈리뷰 2011년 7월 칼럼 - http://www.openrevie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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