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존 레논을 위하여] 함부르크의 어느 바에서 그들처럼

구보씨 2011. 7. 14. 12:18

제목 : 존 레논을 위하여

일시 : 2011.07.14 ~ 2011.07.31

장소 : 대학로 게릴라극장

출연 : 최윤희, 신현규, 최영무

작/연출 : 김세환

제작 : 드라마팩토리


 

존 레논(John Lennon, 1940010.09~1980.12.08)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비틀즈The Beatles 리더 이미지는 그가 솔로로 독립한 이후에도 여전히 등가로 읽히곤 한다. 비틀즈 해체 이후 폴 매카트니의 행보나 노래가 같은 선상에서 주욱 이어져 왔다면 비틀즈를 벗어난 존 레논은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데미안을 만난 뒤 각성하고 껍질을 깨고 나온 뒤의 싱클레어처럼 전혀 달랐다. 영국 최고의 부호에 오른 폴과 광인의 총에 저격당한 존이 하나로 뭉친 비틀즈가 그래서 대단한 조합인지도 모르겠다. 


존 레논의 두 번째 아내 오노 요코(존은 오노의 세 번째 남편)를 소설처럼 적확한 멘토라고 단정내릴 수는 없으나, 이후 그의 행보에서 예술가였던 그녀가 동인이 된 부분이 있음은 분명하다. 비틀즈 해체 이후 결성한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를 보면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라는 존재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의 연주 영상을 보면 오노는 박자도 잘 맞추지 못하는 손북을 들고 존 레논 옆에 서 있다. 그녀의 역할은 보다 상징적이다.)



 

임예진, 명곡 ‘이매진imagine’(75)은 동시대 청춘 하이틴 스타 이름을 붙일 만큼 우리에게 무쟈게 익숙한  서정적이고도 평화로운 곡으로 알려졌지만, 노랫말을 보면 ‘천국이 없다고, 국가가 없다고 사유재산이 없다고 상상해보라’고 읊조린다. 종교, 국가, 자본주의, 가장 강력한 3대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있다. 뭔 뜻인지도 모르고 흥얼거리다가 존 레논의 급진적 성향을 알게 된 계기는 임예진이 아니라 ‘여자는 세상의 검둥이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72)다. 1972년 6월 과격한 메시지를 담은 2장짜리 음반 <뉴욕에서의 한때Sometime in New York>에 실린 명곡이다. 여성 해방을 직설로 풀어놓고 목이 메도록 외쳐대는-노래는 아무래도 폴이 좀 더 낫다는 생각이- 곡은 가수 외에 철학자, 사회운동가로 존 레논의 의지를 잘 드러내는 곡이다. 

 

극단 드라마팩토리가 만든 연극 <존 레논을 위하여>는 선동가로 내가 알고 있는 존 레논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일정 부분 예상했지만 존 레논 사후 30주기를 애도하며 만들었다는 전제가 붙는 만큼 왠지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보라(최윤희 역)가 부르는 노래는 라이브 카페라는 배경과 잘 어울리면서 위로 받고 싶은 손님들을 위로하는 힘이 있는 우수를 담은 목소리가 매력 있지만 존 레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존 레논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나 할가, 여느 사랑 노래를 듣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뭐, 당연하기도 하고 괜찮기도 하다. 누구나 다들 그렇게 부르고 들으면서 위안을 받는다. 그게 존 레논의 힘이다.

 

머리 말고 마음으로 들으니 약간 엘러지하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노래가 나름 나쁘지 않다. 극에서 존 레논에 천착하는 인물은 그녀가 아니기도 하다. (공연이 끝나고 신청곡을 부를 기회가 된다면 ‘안개꽃’을 한 번 듣고 싶었다.) 존 레논을 내내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은 그를 소재 삼아 소설을 쓰고 있는 소설가지망생 영수(신현균 역)면 족하다. 배우 3명이어도 모자람없는 게릴라 극장 작은 무대는 딱 한적한 카페와 싱크로율 100%다. 작년 10월부터 부산에서 장기 공연을 끝내고 온 작품답게 배우들 사이 호흡이 참 좋다. 신현균 배우의 손목에 때 꼬질한 깁스가 보이는데, 극 설정은 아니었다. 계절이 여름에서 겨울로 변하는 가운데, 깁스를 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대체할 배우가 없을 수도 있지만 호흡이 좋다보니 큰 사건 없이 조근조근 이어지는 감정선이 잘 산다. 극에서 카페라는 공간이라, 1년 정도 시간을 두고 오래 묵어 미운정 고운정이 쌓인 관계라는 설정은 실제로 연극을 하면서 연습실과 공연장을 오가면서 카페와 다르지 않은 아늑한 극장에서 함께 한 배우들 사이에서 자연스럽다. 억지스럽지 않게 그들 사이 관계가 아주 편안하게 관객에게 다가온다. 

 

극중극으로 영수의 소설에 등장하는 노숙자 아저씨(카페 사장과 1인2역)는 꼭 한 번 만나 술 한 잔 같이 기울이고 싶은 인물이다. 실제로 거리에서 떠도는 아이들의 눈에 흑심을 품은 어른들이 아닌 애정을 담은 진심어린 충고를 하는 이런 어른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존 레논 팬을 넘어서, 빠를 넘어서 약간 정신착란의 증세를 보이나 싶은 그 역할은 어찌 보면 상투적이거나 비현실적으로 보이기 쉬운데 역시 오랜 호흡의 힘인 듯 여고생과 주고받는 연기가 참 보기 좋아 극에 잘 녹아든다. 아울러 지루할 수 있는, 감상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감성음악극’에 계속 긴장을 불어넣는다.

 

앞서 얘기한대로 이 작품이 존 레논을, 적어도 내가 아는 혹은 내가 기억하는 단면으로 존 레논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랜 노력과 고생 끝에 작가로 이제 막 데뷔를 한 영수에게 더불어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그 길이 어찌 보면 기성제도로 들어가는 길이라 작품 전체의 의도와 약간 맞지 않아 보이고, 노숙자 아저씨의 얘기는 구구절절 정말 좋지만 어쩔 수 없이 설명을 위한 역할이라는 한계가 있다.

 



존 레논의 노래는 지하철 시디100곡에서 더 친숙하게 듣는 바라 어찌 보면 너무 유명해서 무대로 옮긴다 한들 그 한계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맘마미야> 정도 외에 주크박스 뮤지컬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원곡이 주는 아우라를 넘지 못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극단 드라마팩토리는 작은 이야기를 크게 늘리지 않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딱 잡아 균형을 잡은 미덕이 있다. 서울에서도 극단을 운영한다는 게 힘든데 부산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지방 극단 사정이라고 그리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함부르크 시절이 지금 우리를 만들었다'는 비틀즈가 전한 회고는 극단이 스스로에게 늘 다짐하는 얘기일 게다. 부산 사투리도 참 좋고, 살짝 사투리가 섞인 노래도 좋다. 뽕짝을 섞은 듯 노숙자 아저씨의 기타 연주나 그 솔직한 발음으로 부르는 노래도 가슴에 착 감긴다. 라이브이긴 연극이나 노래나 마찬가지, 드라마팩토리만이 할 수 있는 작품이 있을 것이다. 좋은 작품으로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사진출처 - 팝부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