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벚꽃동산]은 남산길 위에도 있었네

구보씨 2008. 9. 18. 15:09

저한테는 특별한 작품입니다. 이제는 극장에 혼자 다니는 게 솔직히 편합니다. 일행이 있으면 있는대로 즐겁지만 혼자 돌아오는 길에 곰곰히 생각해볼 때 좀 더 많은 깨달음을 얻지요. 가벼운 연극이라면 덜하지만 생각할 여지가 많은 작품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이 그렇겠네요. 2008년... 지금 작품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스라하게 단편적인 조각만 남았지요. 이 작품을 같이 본 친구는 저에게는 참 각별합니다.  다시 볼 수 없지만 그가 지금 어디에 있든, 언제고 다시 만나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친구와 연극을 보고 청량리 로터리 골뱅이집에서 마셨던 소주가 기억납니다. 친구가 여자 후배를 불러서 같이 마셨요. 그녀는 유치원 교사였나 싶고 목이 쉬고 괄괄한 친구였나 싶지만 참 여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찌된 사연인지 모르지만 그 쉰 목이 참 안쓰러워, 새벽 1시 즈음까지 그 목소리를 듣다가-그녀가 한 얘기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집까지 바래다줬던 기억이 납니다. 단 한 번의 만남이 오래 기억에 남는 건... 그 자리에 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흠흠... <벚꽃동산>의 스산함을 4년 지난 늦가을에 이리 뼈저리게 느낄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흠... 아래 올라온 평들을 보니 좋은 자리에서 보셨군요. 저희는 맨 뒷자리였습니다. 극장이 또 제법 커서 말이죠. 연극이 한 눈에 다 들어오던 걸요? 흐흠... ^^;  하필! <벚꽃동산>을 같이 보러간 친구가 그간 사업을 접고 연락이 안 되었던 터라... 실로 오랜만에 연락이 되어서 집 밖으로 끌어낼 생각으로 꼬셔서 같이 갔는데요. “데니 안 나온대.” “누군데?” 뭐... 이런 분위기였지만 친구도 몇 년 만의 연극 공연이 아주 싫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다만 <벚꽃동산>이 2시간 30분짜리 정극이었을 줄이야!

 

안 그래도 우울함에 휩싸여 있는 녀석에게 ‘가볍게 기분 전환하자’고 끌고 간 상환인데 말이죠. 총 4막 중에 2막이 끝나고 인터미션 때, 친구는 드라마센터 계단에서 “명동 주변에 내가 아는 술집 맛있는 데를 아는데... 좀 일찍 닫긴 해.” 라고 중얼대며 담배를 뻐금뻐금 피워대더란 말이죠. 사실 살짝 졸 뻔했던 나도 거의 친구의 말에 넘어갈 뻔 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회란 말입니까? 더욱이 2008서울국제공연예술제 작품으로 기획되지 않았다면 이 정도 규모로 정성을 들여서 만들지도 못했을 거구요. 우리 옆자리에 있던 아주머니 두 분은 결국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는 체념했는지 어쨌는지 연극에 집중을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연극이 끝나고, 우리는 제일 먼저 밖으로 나와(지루했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맨 뒷자리다 보니) 남산길을 타박타박 내려왔습니다. 오랜 만에 와본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20년 가까이 친구로 지냈는데, 둘이 연극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또, 생각해보니 남자끼리 연극을 본다는 게... 뭐... 쉬운 일만은 아니군요.) 서울 한복판이었음에도 남산이 있어서인가, 공기가 제법 상쾌했습니다. 몇 계단을 내려가면 곧 바로 차로 꽉 막인 도로였지만. 새삼스레 친구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살짝 돌아서 갈 줄 알면서도 같이 가는 것. 지금 답답한 일로 머리가 복잡한 이 친구에게 <벚꽃동산>이 많이 지루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법 진지하게 연극 평을 늘어놓는(물론 얼토당토않게) 폼이, 되레 제가 위안을 받는 자리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오랜만에 선술집에서 통골뱅이와 홍합을 놓고 소주잔을 오랫동안 기울였는데, 참 좋았습니다. 앞으로 처한 상황이 아무리 지랄 같아도 전화는 꼭 받자고 ‘서로’ 다짐을 했습니다. 아마도 사색의향기에서 마련해준 기회가 아니었다면, 또 <벚꽃동산>이 정통극이 아닌 가벼운 코미디극이었다면, 스리슬쩍 시답지 않은 얘기만 하다가 헤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벚꽃동산>, 작품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원체 러시아 제정말기의 세대 교체를 다룬 이 작품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평이 다양하게 올라와 있는데요. 저는 우선 비슷한 시기의 한국의 격동기를 다룬 <토지>가 생각났습니다. 벚꽃동산이 장막극이라지만 대하역사소설하고 같이 놓고 비교하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요. 몰락한 최참판 댁의 윤씨 부인, 서희, 길상 등이 양반, 지주, 노비, 실향, 일제 강점기 등등 시대적 파랑에 휩싸이다보니 서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한편, 벚꽃동산의 상황은 뭐랄까요. 그와 반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에 빗대어 역사를 말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원작을 여태(!) 안 읽어봐서 뭐라 말하기가 그렇습니다만, 극에서는 개인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도 개개인을 갈등 상황에 놓지 않고 있더란 말이죠.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나올까,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동시대의 어느 나라보다도 시대적 산통이 격심했던 우리와의 어쩔 수 없는 관점차이일까...  

 

구세대 귀족을 대변하는 라네프스까야(아휴... 인물들이 죄다 까야, 까야, 꺄악~ 소리지를 만한 이름들이라 이걸 어떻게 발음할까 궁금했답니다. 더듬을까봐 조마조마하기도...)와 농노의 아들이었으나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로빠힌 사이의 갈등이 결국 ‘벚꽃동산을 베어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잡고 있음에도 둘 사이의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라네프스까야 집안의 자본주의에 완벽하게 적응한 신흥갑부 로빠힌은 돈밖에 모르는 인물에다 보복심까지 더해져서 라네프스까야 집안을 빼앗을 야심을 세우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벚꽃동산>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라네프스까야 집안이 망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애정을 담아서 몇 번이고 제안합니다. 또 그녀의 큰딸과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이기도 하지요. 만약 라네프스까야 부인이 로빠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연극은 그럭저럭 무난한 해피엔딩이었을 겁니다. 헌데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라네프스까야는 로빠힌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임대업을 하게 되면 대대로 내려온 추억의 벚꽃동산을 베어버려야 한다는 이유에서지요. 하지만 파리로 애인을 만들어서 놀러다는 걸 보면 그녀나 그녀의 오빠나 그녀의 딸들이나 그다지 추억이나 전통에 연연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벚꽃동산은 대체 뭘까요?


오빠의 “저 책장은 100년이 넘었지”라며 자랑하는 대사로 미뤄보건대, 그들은 허울에 빠져 정작 중요한 게 뭔지 모르는 바보들입니다. 정작 책은 몇 권 꽂혀 있지 않은 책장을 자랑하는 게 바보가 아니고 뭐겠어요? (이게... 그러니까... 연출이나 원작의 의도라기보다는 책장을 다 채우는 게... 아무래도 만만치 않고, 게다가 매 막마다 옮기려면... 소품상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보건 아닙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같이 레밍 같습니다. 일상에 치여 찡찡댈지언정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는 모르는. 



아무래도 교체되는 시대의 흐름에서 인간이라 한낱 부질없는 존재임을 보여주겠다는 심산인 것 같습니다. 매년 벚꽃과 버찌열매를 맺으면서 제 할 바를 한다고는 하지만 곧 베어지고 말 벚꽃동산의 운명처럼 말이지요. 흔히 한번에 지고 마는 벚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랄까요. 연극에 등장하는 이들은 취업, 사랑, 신사상, 신문명 등 각자 새롭게 바뀌는 시대와의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낭만, 파티 등등 구세대의 마지막 문화이자 보루였던 벚꽃동산집을 떠나면서 각자 뿔뿔이 선택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사사로운 다툼이 좀 있을뿐,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이렇다 할 갈등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신처럼 극장 위(?)에서 이들의 하는 꼴이 한눈에 다 보이니 그들의 삶이라는 게, 한치 앞도 못보는 것이 참 바보 같고 우습게만 느껴집니다.



 

아마도 이 작품이 지루하게 느껴졌다면 2시간 30분이라는 긴 공연시간 말고도, 이 작품의 갈등이 극장 안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극장 밖에 있는 상황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연극을 보면서 ‘잠시 내 처지를 잊고픈’ 관객들에게 몰입을 방해하고 되레 ‘네 인생 역시 마찬가지 아니냐?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면서 자잘한 것에나 신경을 쓰고  삶을 소비하는 불쌍한 놈’라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지요. 나만 그렇게 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가도 연출도 현실도피를 방해하는 '소격효과'를 노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후대도 아닌 당대에, 지주, 자본가, 지식인, 연애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모든 인물을 한데 모아서 “그래봐야 시대의 꼭두각시”일 뿐인 상황극을 썼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벚꽃동산’이란 무엇일까요? 라네프스까야 집안의 일방적 선택으로 벚꽃동산이 되기 전에는 공터였거나 뭔가 다른 무엇인가가 번성했던 것처럼, 앞 세대의 또 누군가에 의해, 아마도 로빠힌의 말대로 별장촌이 세워지겠지만, 새롭게 바뀔 때까지 그저 묵묵히 있는 벚꽃동산일 뿐입니다.*



 사진출처 -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http://www.daarts.or.kr/, 플레이디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