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데 밀가루가 아닐 수도?
90년대에 걸쳐 작가 장정일의 소설 네 편이 영화화 되었다. 각각 영화에 대한 흥행 성적과 비평이 제각각이었는데, 이를 두고 장정일은 ’좋은 밀가루’론을 얘기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좋은 밀가루를 팔려고 노력할 뿐이다. 밀가루로 빵을 만들건, 수제비를 만들건 그건 그들의 몫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다시 말해 제목만 같을 뿐 자신이 쓴 소설과 영화 사이의 간격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장정일이 독자나 관객에게 요구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만화가 강풀은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 될 때마다 적극 지원을 한다. 그들의 태도가 옳은가, 그른가 혹은 무책임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부질없는 논의를 하자는 건 아니다. 만화는 소설과 다르게 영화화했을 때는 소설보다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으니 작가로서 당연한 반응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흥행 성적이 저조한 “강풀 영화의 최대 안티는 강풀의 만화다” 라는 말이 돌 정도로 끊임없이 비교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강풀의 만화는 좋은 밀가루가 아니거나, 혹은 좋지만 밀가루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연극으로 옮겨간 만화들이 나름 앙코르 공연을 이어갈 정도이니 ‘좋으나 밀가루가 아닌’ 쪽이 아닐까 추측을 해볼 뿐이다. (앞으로 나올 드라마(타이밍)나 영화(26년 후)가 제작 중인만큼 결론을 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화려하면 안 어울린다"
같은 내용의 영화, 연극이 있는데 강풀 만화의 팬들에게 영화만 외면을 당하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무료(웹툰)로 익히 아는 얘기를 8,000원(영화)도 아닌 30,000원(연극)이나 내고 되새김질을 하는 이유가 뭘까. 강풀의 만화는 탄탄한 짜임새에 비해 그림이 허술한 편이다. 그림에 자신 없다보니 작가의 말처럼 주인공이 옷을 전혀 갈아입지 않거나 배경을 최소화 하는 식이다. 미스테리, 역사, 순정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지만 그의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보통 아파트(순정만화, 아파트), 풍납토성(바보), 연립(이웃남자) 산동네(그대를 사랑합니다) 등 주로 고정된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대신 치밀한 미장센(공간 연출)으로 보충을 한다.
이는 그가 신문 만평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데에서도 기인하는데, 클릭! 이라는 짧은 순간의 의성어로 대표되는 인터넷 웹툰에서는 화려하고 복잡한 망가나 마블식의 만화보다는 생략 혹은 단순화되어도 핵심을 짚는 만평화된 능력이 확실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화려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는 그의 만화에 심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지여 역으로 “강풀 스토리에 그림이 화려하면 안 어울린다(<빨간 자전거> 김동화 작가)”는 평가까지 나온다. 화려하고 복잡한 그림은 오히려 그의 만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영화 VS 연극
단순도식화의 우려가 있지만 영화와 연극의 반응이 엇갈리는 지점이다. 연극 <강풀의 바보>는 적어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둔 작품이다. 사실 소극장 공연인 이상 제약이 되는 좁은 무대와 단순화된 배경, 소품은 오히려 캐릭터에 집중하는 강풀의 작품에 적격이 된다.
커다란 잎사귀처럼 생긴 나무, 비스듬히 서 있는 건물 등 몇 가지 특징을 살린 각이 지지 않은 둥글둥글한 배경은 아동극에 어울릴 만하다. 원작보다 더욱 단순화시킨 배경은 실제 배우들의 연기로 인해 멀어지기 쉬운 독자이자 관객의 ‘심리적 원근감’을 최대한 당긴다. 원근감 조절에 실패하는 순간, <바보>는 휴먼다큐 신파극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제목에서부터 강풀을 앞세우는 만큼 타겟층을 명확히 한만큼 연극은 만화의 따뜻한 전개에 충실하다.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초반 벅차 보이는 빠른 몽타주 전개도 2시간의 공연 시간 내에 만화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된다. 흠으로 지적될만한 부분이지만 강풀 페인들을 위해 어쩔 수없는 선택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연극이 그런 선택을 내린 이상 관객 역시 연극 완성도를 연극 외적인 만화와 비교해서 평가하게 된다.
만화의 사각틀을 뚫어라!
“강풀은 작은 사건 하나가 모든 스토리에서 중요한 연관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이야기가 풀려 나가면서 절로 감탄하게 된다. 사실 원작을 보는듯한 느낌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결론적으로는 그를 만났다. 다시 한 번 그 감동을 느끼면서 얼마나 소름 끼치던지…(중략)… 사실 원작을 너무 감명 깊게 접했던 터라, 부분 아쉬운 점도 있었다. 지호의 느낌이 너무 살지 않았다.
실패하고 돌아온, 그렇지만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대한 세심한 감정표현에 약간 아쉬움을 느낀다. 그저 한국에 놀러 온 게 아닌 지호는 모습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 그리고 극에 재미를 더하기 위한 1인 다역 배우가 나왔는데, 사실 재미를 주긴 했지만 지호 아빠는 의사로 승룡이에게 꽤나 중요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은 데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원작에 대한 감흥이 떨어질까 봐’ 혹평인 영화는 아예 보지 않았다는 강풀 페인이 본 연극 평이다. 같은 일행이었던 그녀는 연극 중반부부터 끝까지 울음을 훌쩍였는데, 그때 그녀가 느낀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감동도 연극 자체라기보다는 만화의 재현이라고 못 박고 있다.
지호에 대한 설명 부족과 1인 다역 출연도 만화를 연극으로 옮기는 과정의 생략이나 또 다른 재미라고 납득하기보다는 흠으로 지적한다. (주요 인물들을 더블 캐스팅할 정도면 한 작품 속에서 둘씩이나 1인 다역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두 명의 배우가 제일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만화를 닮아갈수록
그녀의 지적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했다. 캐릭터의 힘이 강풀만화의 최대 장정인 만큼 그 지점에서 어긋나는 부분이 거슬리는 게 당연하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순정만화>를 보면 캐스팅이 얼마나 만화 캐릭터와 비슷한가를 내세운다. 한계를 명확히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2차원의 만화 지면에서 3차원의 연극 무대로 튀어 나온 인물들이 이상하게 모니터에서만큼 힘을 쓰지 못한다. 피아노에 회의를 느끼는 지우, 돈 때문에 술집에 가게 된 희연, 희연을 사랑하는 사장, 무뚝뚝하지만 속은 착한 상수, 오빠가 창피한 승룡이 동생 지호 등 어느 정도 고형화된 캐릭터인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가, 연극에서는 이들을 얽는 끈이 느슨해질 때마다 전체가 상투적인 전개로 전략할 위험이 아슬아슬하다. 그 질긴 끈이 단순 감동 코드만이 아닌 건 확실하다. 나름 무대 위에서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과 연출의 힘으로 감내하고 있지만 강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다고 한다면 계속 고민해야할 지점이다.*
사진출처 - 대학로열린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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