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매리지 블루] 거세된 여성들의 서글픈 이야기

구보씨 2008. 9. 3. 10:59


n각을 꿈꾸었으나

“직장이냐? 결혼이냐?, 성공이냐? 사랑이냐?, 홀로서기냐? 어우르기냐?, 모험이냐? 안정이냐?” 딱 20년 전, 20대 후반의 여성들을 겨냥한 상투적인 처세술도서 띠지 문구처럼 들리는 도식적인 이분법에서, 연극은 시작된다. 허나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냉정하게 결혼이든, 직장이든 ‘조건’이 받쳐주기만 하면 둘 다 거머쥘 수 있다는 인식이 가득 찬 ‘2008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말이다(2008년을 새삼 강조한 이유는 ‘국제중학교 설립’ 발표가 나온 해이기 때문인데, 이제 인생의 갈림길이 그 인식수준만큼이나 대폭 하향 평준화된 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매리지 블루>는 결혼과 직장의 선택을 기반으로 하되 이후 다층의 구조로 켜켜이 쌓이고 쌓여 다층의 구조를 이룬 두 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한다. 허나 연극에서 20대부터 60대까지 보여주는 두 여자의 삶이 대비되는 이유는 결국 결혼 유무이다.

 

회사 건물 옥상. 지영(김석 분)은 유성에게 회사 선배 현우(최원석 분)와의 깜짝 결혼 발표를 한다. 지영의 회사 동기이자 친구인 유성(이주영 분)도 현우를 좋아하지만 직장에서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터라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후 이들의 삼각 구도는 소소한 갈등으로 끊임없이 유발하며 연극 마지막까지 깨지지 않고 이어진다. 

 

원작 소설이 있고, 현우가 지영과 유성의 연결끈 역할 정도에 머물며,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위한 설정을 위한 장치로 보이지만 n각으로 확장하지 못하는 삼각 구도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다양한 고민과 여자로서 가지는 공감대”를 풀어보겠다는 의도를 섣부르게 정형화한 듯이 보인다. 대놓고 말하자면 연극 내내 유성이 결혼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운듯 ‘쿨’한 척 하지만 현우에게 관심 혹은 집착하는 그 태도 때문에 연극이 자꾸만 신파로 빠지는 것이다. 

성공을 쟁취하는 두 가지 방법

대기업에 다니는 20대 후반의 나름 알파걸들인 지영(김석 분)과 유성(이주영 분), 선택의 갈림길이 있다. 허나 지영이 결혼을 선택한 게 사랑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지영이 나름대로 친구인 주영을 견제하면서 현우로 대표되는 사회적 성공, 경제적 안정을 선택한 영악한 발상임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기에는 지영과 유성이 결혼과 일로 갈림길로 보이지만 그 속내는 서로 다를 바가 없으니, 적어도 연극 내에서는 무의미한 구분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지영 앞에는 한국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정주부로 겪는 자기정체성 해체, 고루한 시댁과의 갈등, 남편의 바람이라는 3대 결혼 풀옵션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유성도 마찬가지여서,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우며 원형탈모가 생기도록 일을 하지만 ‘내’ 설 자리가 없는 ‘남(男)들’만의 경쟁체제는 ‘여성 최초의 주임 승격’을 이룬 그녀에게 지독하게도 배타적이다. 시어머니와 갈등, 지방 지사 소장과의 갈등 에피소드를 통해 <매리지 블루>가 여성 대척점에 세운 남성, 즉 가부장적인 체제에 대한 강한 부정을 엿보인다.

 

허나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감칠맛 나는 대사와 깔끔한 연출이 돋보인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배우의 독백이 아닌 밖으로 드러난 본격적인 갈등이 희화적으로 그려지는 바람에 묵직한 문제 제기 자체가 흐릿하게 흩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이 연극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갈등을 희화적으로 풀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거세된 여성들

내가 볼 때 이 연극의 가장 큰 약점이고, 성패가 갈리는 지점인데, 능력 위주의 무한경쟁에 대한 비판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히들게 하는 것들, ‘시어머니는 왜 아들에게 얽매일 수밖에 없는가?’ ‘지방 지사 소장은 왜 그녀를 경계하는가?’ 이런 굳을 대로 굳은 정체성의 이면에는 경쟁체제에 대한 복종 혹은 두려움에서 기반한 것인데, 연극 설정부터 그녀들은 연극 내내 똑똑하고 능력있고 예쁘기까지 하고 시작부터 ‘대기업 사원’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이 연극은 경쟁체계 자체에 대한 비판하는 게 경쟁체계가 적용하는 불공정함에 대한 지적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60대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자아를 찾는다는 명분하에 도시락 가게를 하는 운영하는 지영은 집에서 곁방늙은이가 된 현우가 리모컨을 끼고 죽는 줄도 모를 정도로 가정에 무심하거나, 1년의 1/3을 외국에서 인생을 즐기는 여행사 사장이면서도 매일 2~3시간 밖에 못자면서 홀로 쓸쓸하게 늙고 있는 유성의 삶을 당연하다는 듯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경쟁이야말로 남근이 대를 물린 남성화된 폭력 사회가 낳은 종손이자, 적자라는 거야 이미 뻔한 얘기이지 않은가!! 이처럼 ‘젠더’는 남성인 채 ‘섹스’만 여성인 불분명한 정체성을 내세워 그녀들의 인생이 버거운 이유를 남성에서 찾으려니 해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현우의 바람기에 맞바람으로 맞선 지영과 지영에게 헤어지지 말자고 울고 매달리는 내연남의 관계는 평소 성역할이 반대인 상황이 익숙한 터에 복수극처럼 보이지만, 이런 식은 통쾌하다기보다는 진부한 방식의 답습은 상투적으로 보일 뿐이다. 더군다나 “내가 바람을 피워보니 남편이 이해가 되더라”며 가정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스스럼없이 내뱉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

 

이건 말 그대로 연극이 경멸해 마지않듯이 보이는 남근사회에 대한 오마주가 아닌가! 니체의 여성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남성처럼 되는 것이야말로 독립된 ‘여성성’을 부인하는 일, 즉 ‘거세된 여성’이 되는 길”이라는 대목은 새겨들을 만하다.


60 나이에 거대한 발기를 꿈꾸다

그렇다면 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유성의 인생을 답습하듯이 보이는 지영과 현우의 딸(이미형 분)에게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해 이래도 저래도 후회라고 할 참인가? 딸의  말처럼 “해보지도 않고 후회는 않겠어요”라는 하나마나한 격언 비스무리한 인생(물대포로 냉수마찰을 하며 뼈저리게 느꼈듯 세상은 제발 하지 말았으면 하는 걸 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이기도 하다)을 살라고 하고픈가? “내 회사를 갖고 싶어요.”라는 딸의 당찬 대답도 나름 알찬 꿈이지만 ‘당당한 미래의 여성CEO’의 성공스토리가 이 연극의 목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경쟁 체제를 남성의 역사(history)로 볼 것인가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전히 그녀들의 삶(herstory)에 대한 고민이나 배려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남근사회에서 남자를 이기는 법이 철저히 가짜 남근을 다는 것이라면 이는 정말 서글픈 일이다. 비정규직이 근로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일류대를 나온 자녀, 성공한 CEO, 대기업 이사의 부인 등 신기루처럼 보이는 그 자리 역시 행복하지 않다는 걸, 30년 전 낡은 회사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그때는 이 건물이 제일 높았는데…”라며 여전히 60이 되도록 거대한 발기를 꿈꾸는 노인들이 빌딩숲을 배경으로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사진을 찍는 아이러니의 극치(?)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극복 노력이 있지 않은 이상, 여자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여전히 던지기가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