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희비극을 떠나 연극으로 처음 본 셰익스피어 작품이 2008년 극단 후암의 <오셀로>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다소 실망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형식미에 치중했다고 할까요.
정통 비극을 표방했지만 스타시티 3관 소극장 무대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당시 받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잘 맞지 않았다는 인상이었는데요. 올해 창단 10주년 기념으로 오케스트라와 함께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공연했다고 하는군요. 분명 스케일도 그렇거니와 두루 많은 발전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보진 못햇지만요.)
2008년 당시 멤버들이 모두 바뀌었는데요. 올해, 오셀로 장군 역 최지웅 씨가 특별출연을 했다고 하는군요. 제 당시 감상이야 어쨌건 두루 반갑습니다.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그렇지만, 오셀로 역시 연극으로만 보기보다는 책으로도 꼭 한 번 읽어봐야하는 작품입니다. 전 펭귄클래식시리즈로 읽었는데요. 정통의 펭권문고와 이 작품이 왠지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이순재 배우를 좋아하는 어머니때문에 본 연극 <라이프 인 씨어터>에서 이순재 씨(늙은 연극배우 역)씨는 말한다. “나는 늘 햄릿을 해보고 싶었어. 대사도 다 외우고 있지. 이렇게 늙고 말았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단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그것도 비극을 연극으로 올린다는 건, 연출, 대본, 배우, 조명, 무대, 누구라도 이래저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래서 또 연극인들에게는 로망일 것이다. (배우에게 햄릿 왕자 역을 맡는 거란 예를 들면 나에게는 왕王자 복근 같은 거랄까?)
그러나 세상에는 초콜릿 복근보다 내 배처럼 생긴 츄파춥스 복근이 더 많듯,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선뜻 올리기를 주저하게 되는 것 같다. 실험정신 운운하면서 재해석과 변용을 하거나 주제를 따온 작품을 본 기억은 있으나, 우직하게 해석하고 도전을 한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극단 후암의 <오셀로>는 뭐랄까 젊은 연출다운 도전이 가미되기는 했으나, 그보다는 정통 레시피에 충실하려고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통 레시피란, 레시피가 완성될 당시 흔했거나, 혹은 싱싱했거나, 혹은 쓸 만했을 재료를 써야 제 맛이 나는 법이다.
기본적으로 대작일 수밖에 없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아우라를 소극장에 담는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말이다. 그레이쉬아노, 데스데모나 등 이름만 해도 혀가 꼬일만한데, 문어체에 근엄하고 진지하게 연극을 인원, 무대, 의상 등등의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만한 공연을 하려니 이건 배우의 연기가 받쳐주지 않으면 코미디가 될 만한 상황이다. 앵콜 공연이었고, 연출의 글에서 “유독 애착을 가지고 계속 공연하는 작품”이라는 말을 할 만큼 나름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연극무대 위에서 주로 절망보다는 아직 꿈이 가득한 젊고 앳된 배우나 연극에 대한 회고의 정서로 돌아온 이순재 씨 같은 원로 배우들만 보다가 오셀로 역의 최지웅 씨나 이야고 역의 박진하 씨 같은 중견 배우들의 노련하면서도 정력이 넘치는 연기를 직접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주인공들을 비롯해 배우 대부분이 역할의 정형성을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든 반면에, 데스데모나 역의 이정현 씨는 독특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2011년 극단 후암 10주년 기념 앵콜 공연 <오셀로>
분초를 다투는 세상에 휘둘린 탓이랄까, 관객들은 좀처럼 진지하고 느린 전개에 참지 못했고 극에 몰입하지 못했다. 진지하고 심각한 장면에서도 배우의 작은 실수에 객석에서는 툭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출이 의도한 웃음과 그렇지 않은 웃음이 혼재되어 나오다보니 결국 연극은 좀 느긋한 분위기가 되었는데, 몰입하기도 그렇고, 좀 어중간했지만 셰익스피어 연극이라고 주눅들 이유는 없을 법해서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연극이 전반적으로 희비극을 떠나 눌린 느낌이 들더라는 것, 초연이 아님에도 극중 배우들에게서 개별적인 연기력을 제외하고는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는 것, 최지웅 씨, 박진하 씨의 연기에도 매너리즘이랄까, 어느 정도 머릿속으로 짐작했던 오셀로와 이야고 정도만 보였다는 것, 결과적으로 들인 정성이 보이지 않았다.
전부터 해왔던 앵콜 공연이라고는 하지만, 이 시점에 이전 공연 형식을 그대로 따와서 올리는 게 과연 나은 것인가를 좀 더 고려했으면 한다. 이런 얘기 역시, 셰익스피어를 염두에 둔, 지극히 상투적인 발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연극 한 편 보는 데 뭘 의미와 시대를 따져야 할까. 오셀로 내용 자체도 그렇고, 두루두루 연극에 적응을 하지 못한 나와는 달리 아침드라마 같은 실제 사각 불륜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놨던 친구는, <오셀로>의 질투가 낳은 비극을 보며 재미를 비롯해 많은 걸 느꼈다고 해서 속으로 흠칫했다. 이런 게 연극의 힘인가 싶기도 하고 그랬다. 뭐, 적어도 확률적으로 1/2은 만족을 한 셈이다.(흑과 백, 두가지 색의 말로 하는 오셀로 게임이 떠오르기도...)
이번 연극의 풀 네임은 ‘대학로 스타시티 3관 개관 기념 극단 후암 앵콜 공연 오셀로’인데, 지하의 컴컴한 무대가 아닌 7층의 잘 갖춘 시설(연극공연장의 전통(?)이랄까, 의자가 작고 딱딱하긴 했지만)의 공연장 개관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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