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이디푸스 - 국립극단 창단기념공연
기간 : 2011년 1월 20일 ~ 2월 13일
장소 : 명동예술극장
원작 : 소포클레스
연출 : 한태숙 / 오브제 연출 : 이영란
각색 : 김민정 / 번역, 드라마트루기 : 강태경
예술감독 : 손진책
출연 : 이상직, 정동환, 박정자, 서이숙, 김종구, 박상종, 박윤희, 최원석, 김은석, 서경화, 김은주, 황성대, 이기돈, 이영란, 원일, 이경은, 박세영
음악 : 원일 / 안무 : 이경은
주최 주관 : (재)국립극단
소문
대한민국 2011년, 1월 추위가 혹독하다. '내 속에 응어리진 추위가 더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정말 춥다. 지하철에서는 노숙자가 동상 걸린 발을 주무르다가 얼어죽지만, 칼바람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들에게는 보도블록과 그 위에 있는 그들이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구제역 파동으로 생매장을 당한 가축들의 피눈물은 땅속에서 시퍼런 원한으로 시뻘건 얼음으로 굳어버렸다. 이대로 봄이 온들 죽은 것들을 치우고 묻은 자리 위에 알록달록한 반창고를 붙이듯 피어난 꽃을 보며 생명을 얘기할 수 있을까? 아마 서울역 노숙자가 죽어나간 그 근처 대형쇼핑몰은 봄맞이 대형 세일 광고판을 내걸면 그저 봄이려니 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진 근저에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 연극이 과연 이런 세상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극장으로 찾아드는 꼴이 현실을 외면하는 꼴이다. 하지만 누군가 예사롭지 않은 증상을 보이는 세상을 깊숙한 근저부터 파고들어 진단하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역병이 도는 테베시민들의 입소문을 듣듯 연극 <오이디푸스> 소문을 들었다.
명동 혹은
강한 마취제에 취한 양, <오이디푸스>를 보고 난뒤 홀린 기분을 이대로 죽 가져가고 싶지만 명동예술극장의 거대한 유리문을 밀고 나서자 지끈지끈 통증이 다시 일어선다. 극장 앞에 예수천당, 불신지옥 현수막이 버티고 섰고, 그 옆으로 한때의 관광객들이 몰려 사진을 찍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 달뜬 거리에서 인파에 밀려 길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가는 사이, 내 앞에는 화장품 가게 조명 아래 외국어로 호객 행위를 하는 앳된 처녀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특유의 고음에 입가는 웃고 있지만 손발이 얼었고 눈자위가 거뭇거뭇하다.
그녀들은 방금 번에 본 연극에서 본 코러스 중 젊은 아가씨를 떠올리게 한다. 맞은편으로는 설탕을 녹여 뿌연 명동 하늘에서 보기 힘든 별을 낙인처럼 찍어내는 뽑기 노점상 아줌마가 모자를 눌러 푹 눌러 쓰고 앉았다. 처녀들이 들고 있는 화장품 샘플은 누런 얼굴을 한 노점상에게 가장 유용할 테지만 서로 절대 마주 보지 않는다. 처녀들은 간식을 사먹을 여유가 없고, 아줌마는 화사한 조명을 켠 화장품 간판이 낯설다.
오이디푸스 공연 붉은 깃발이 여기저기 달린 이곳을 한가로이 걷는 나는, 이들이 보기에 여유 만만한 오이디푸스인가. 천만에, 나는 절벽에 매달려, 그것도 무서워서 높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매달린 채로 불평이나 늙어놓고 어깃장이나 놓는 간교한 노인이다. 남들이 하는 소리에나 뒤따라 목소리를 보탤 뿐, 내 목소리를 결코 먼저 내는 법이 없다. 운 좋게 나불대는 말본새에 어수룩한 어린 창녀나 꽤낼 궁리를 하는 그이가 곧 나다.
먼지 쌓인 책들이 수북한 작은 내 방은 오래 불을 피우지 않아 이른 저녁부터 한기가 차지하고 앉았다. 파고드는 한기는 덜하지만 여전히 예언자 테레시아스가 데리고 다니는 새의 날카로운 울음처럼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정신을 번쩍 깨운다. 아슬아슬하게 쌓인 책이 넘어지면서 푸드덕 날개 치는 소리가 난다. 가슬가슬한 책의 행간을 따라가면 말도 안 되는 듯 들리는 예언인양 나와 한참 동떨어진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늘어놓는 잡설만 잔뜩 실린 책은 이제 그만, 휙 던져버리고는 개지 않고 나간 이불 속으로 더듬더듬 지팡이를 짚은 오이디푸스처럼 기어들어간다. 연극은 그저 연극일 뿐이다.
분필
눈앞에 뒹구는 잔, 바닥에 말라붙은 커피 찌꺼기에서 올라온 냄새가 강하게 코를 찌른다. 무대미술가 이영란이 절벽에 그려 넣은 혹은 철봉으로 박제를 한 사람들의 들리지 않는 비명이 이렇지 않을까. 팝아트 화가 키스 해링이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와 공동 작업한 ‘종말’ 연작의 일부를 닮은 벽화는 석회가루로 형태만 얼추 드러내 손으로 스윽 흩으면 지워지지만 그들이 소리 없이 털어놓는 이야기는 극장을 떠돌면서 배우와 관객의 코와 입으로 들어가 그 안에 웅크리고 도사린다. 이 연극이 오이디푸스를 좌절에 좌절로 호응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탈바꿈했다는 의도를 그대로 적용하면 부리는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 사이의 관계, 권력의 상층부와 하층부가 따로 떨어지지 않고 밀폐된 한 공간에서 뒤엉키며 그 안에 도사리는 민중들의 열광 혹은 저주에 따른 것이리라 보인다.
지워졌다가도 매번 공연을 올릴 때마다 이영란의 손에 의해 새롭게 되살아나는 그들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공연이 시작된 뒤에도 꾸물꾸물 지독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그들은 사회를 지배하는 주체가 정말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연극 <오이디푸스>를 보고 한 참 뒤, 말라붙어 부스러진 것들을 모은 글이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오이디푸스가 아닌 말라붙어 절벽에 매달린 채로, 죽어서도 눕지 못하고 희망과 좌절의 조울증에 걸려 미쳐가는 이들을, 곧 나와 다르지 않은 이들을 위로하는 연극 <오이디푸스> 진단이다.
오감도
극장 이층 상단 객석에서 보면 연극이 끝날 때쯤 10×8m 대형 수직 절벽 높은 곳에 앉은 새는 발목 밖에 보이지 앉는다. 몸을 옆으로 숙이고 고개를 꺾어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새를 본다. 새도 나처럼 고개를 옆으로 꺾고 있다. 11도 각도로 올라간 무대 바닥, 70도 쯤 수직 벽은 정방형의 올곧은 세상이란 그저 이상향일 뿐이라는 비유로 보인다. 바닥이 열리고 절벽을 갈라지는 무대 장치는 지진이 일어나고 절벽이 쪼개진 뒤의 폐허를 떠올린다.
비뚤어지고 어긋한 세상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새처럼 나도 목을 최대한 비틀어서 보아야 한다. 의도적 기형 혹은 비틂의 형태인데, 어차피 정방형 기준은 내 기준이 아니다. 연출의 의도에 따르면 “생태계 오염으로 인한 기형아나 동식물, 유전자 조작 등 신의 저주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 휩쓸고 간 테베를 제대로 진단하기 위한 장치이다.
극에서 오이디푸스를 둘러싼 군상의 모든 운명을 이루어지는 과정을 세상을 조망하는 예언의 새는 연극 끝나고 커튼콜이 끝날 때까지 내려오지 않는다. “반인반조로, 기형인물이자 괴물”이라 부르는 한태숙 연출의 시선이자 관객으로 앉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서 객석을 연극판으로 보고 바라보는 시선이다.
한태숙은 새를 ‘환경오염이나 신의 영역을 넘본 현대인의 오만이 만들어낸 기형인물이자 경고’라고 부르지만, 일신교에 자리를 내준 이후 건물 바깥에서 망을 보는 파수꾼으로 전락한 가고일처럼 새가 경고의 목소리가 되긴 힘들어 보인다. 다만 관찰자로 새는 이상의 시 <오감도> 시제 1호가 그렇듯이 세상은 높은 곳에서 보면 절절한 비극은 한낱 13인의 아해들이 서로 무섭다면서 도로를 질주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소문
◆ 5명의 남학생과 성관계 여교사, 결국… ◆ 짐승보다 못한 삼촌, 어린 조카 수년간 성폭행 ◆ 리지 “남자 뒤통수 쳐서 죄송“ 사과문 ◆ “내 딸 좀 임신시켜 줘“…딸 강간 사주한 엄마 ◆ 만삭 의사부인 자택서 숨진 채 발견… 진실은? ◆ 부녀자 옷 벗기고 폭행 후 성폭행 하려한 40대 ◆ 말썽꾼 10대아들 훈계하려다 살인미수범 된 父.
인터넷으로 검색한 오이디푸스 관련 기사 밑에 달린 [인기뉴스] 헤드라인을 긁어붙혔고, 수정이나 편집을 하지 않았다. 오이디푸스에서 다룬 신의 저주는 이 시대에 시간 단위로 올라온다. 저주라고 불렀던 것들을 지금은 인기기사라고 부른다.
‘(…)너무나 많은 살인/너무나 많은 학생 폭력/너무나 많은 돈/너무나 많은 가난/너무나 많은 헛소리/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침묵’. 알렌 긴스버그의 시 <너무나 많은 것들>은 해묵은 70년대 비트세대가 아니어도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 너무나 많은 진단, 너무나 많은 해결책이랍시고 달리는 기사보다는 차라리 가르르, 알아듣지 못하는 새의 낮은 목울림이 미덕이 되는 시대이다. 어느 순간부터 ‘남학생, 여교사, 어린 조카, 부녀자, 10대’라는 단어들이 오염된 기의를 품고 발기한 채로 네트워크를 떠도는 세상이고 보면 말이다.
테베에서 오이디푸스란 이름이 그랬을 것이다. ‘운명을 개척하고 신으로 거듭난 왕’에서 ‘아침에는 아비를 먹고, 점심에는 어미를 먹고, 저녁에는 제 두 눈을 파먹고 헤매는 짐승’으로 전락한다. 말라붙어 화석이 된 67명의 시민들을 대변하는 양 5명의 코러스는 오이디푸스의 비밀이 드러나자마자 돌변하여 새로운 왕, 크레온을 목청 높여 찬양한다.
크레온이 왕을 선포하는 곳은 절벽 위쪽 코러스를 밟고 선 자리이다. 오이디푸스가 떨어지고 크레온이 선 그 사이 공간, 아직 피가 돌고 팔 다리에 힘이 남은 민중들은 위를 쳐다보면서 간교를 떨지만, 날개가 돋지 않는 이상 위태롭게 추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수와 십자가에 나란히 매달린 채로 “신이면서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 자”라고 조롱하는 강도 제스따스, 구원을 걷어차서 아둔함의 표상이 된 그이처럼 더불어 죽어가는 운명이면서도 오이디푸스를 조롱하는 꼴이다.
2011년, <오이디푸스>에서 비극이 빛을 발하는 대목은 익히 초연 이후 2500년 동안 수도 없이 답습하는 오이디푸스 좌절이 아니라, 운명이 드러난 뒤 무용수 이경은이 절벽에서 철봉마다 덜거덕 걸리면서 떨어지는 대목이다. 등으로 절벽을 문대면서 추락하는 사이, 그녀의 뒤에는 분필 가루로 뭉개진 시민들이 굵은 눈물로 드러난다. 이는 곧 새로운 왕이 역시 이전과 다르지 않은 저주받은 왕이 드러났을 때 민중들이 지르는 비명이자 탄식이다.
오이디푸스의 투신이 현대정치사와 겹친다는 연극평론가 김성희의 지적은 도드라진 결말 외에, 연극에서 정치가로 오이디푸스의 삶이 드러나지 않는 바,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지만 왕을 내치고 다시 들이는 과정에서 쉽게 환호를 올렸다가 곧 바로 저주를 퍼붓는 형국은 겹친다.
인人
절벽에서 무대 바닥 깊은 곳으로 떨어진 이경은은 시들은 꽃잎인가, 아니면 새로운 씨앗인가, 연극을 만든 의도와 상관없이 피해의식으로 가득한 시선이 새롭게 바라보는 선택지가 생긴다. 현미경을 들이대면 오이디푸스마저 그렇듯 인간으로 사는 순간마다 비극이고 비극을 [인기기사] 삼아 자위를 하는 저주의 운명이다. 허나 위로 날아올라 내려다보면 13인의 아해가 중구난방 뛰어다니는 형태가 잡히지 않는 형상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무대 바닥 한 가운데 이영란이 그리는 거대한 사람 인(人)자는 테베와 델포이와 다울리아가 갈리는 세 갈래 길은 신탁이 시작되는 비극의 현장이자, 사람을 뜻하는 문자 중에 두 발로 선 인간을 가장 간결하고 알기 쉽게 표현한 상형문자와 맞물리면서 뜻밖의 연극 미학으로 방점을 찍는다. 오이디푸스보다 더 지독한 저주의 도구가 된 요카스타가 글자 위에서 지우고 뒹굴면서 몸부림치는 연기는 어머니이자 아내라는 이율배반을 드러내는 데에 전혀 손색이 없다.
허나 정신을 추스르고 인(人)을 추락한 이경은의 시점에서 보면 절벽을 타고 아래로 하염없이 흐르는 절망으리 눈물을 가로로 쪼개 새로운 물고를 트는 희망[ㅏ]의 움틈이다. 왕가 친족 사이 벌어지는 비극, 권력 이양은 테베 민중에게 고통의 동어반복이다. 한태숙의 오이디푸스는 자살로 비극을 끝내지만,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보면 크레온 섭정에서도 저주 받은 집안 사이 끝없는 전쟁과 비극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왕권 교체라는 동어반복이야말로 민중을 영원히 옭아맨 신의 저주이다.
공교롭게도 공연이 한창인 2월 11일, 30년 동안 이집트를 집권한 독재자 무바라크가 물러났다. 민주주의 승리라고 축하하는 한편, 최종권력자를 다시 뽑는 정치 환원주의에 환멸을 드러내고 아예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개개인의 주체성의 회복을 넘어서 세계 정치 판도를 바뀌는 주체로 이집트가 나서주길 바라는 것이다. 발설을 해보면 닫힌 반복['이' l]의 오류를 벗어나 새로운 방향성으로 열린 ['아~~'ㅏ]을 제시하는 방식이 실제로 시도되는 시점이다.
권력의 외갈래길, 무한 세습은 자로 잰 일직선으로 깔끔하게 난 길을 보여주지만, 북한을 보듯 결과는 현실에서 지옥도를 그대로 그려낸다. 현실과 호응하는 작품으로 직선이 아닌 운명의 세 갈래 길은 체제의 한 인간의 저주 받은 운명인 동시에 불안 요소를 품은 체제의 틈이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어머니를 취하기 이전에 왕으로 정권의 한축인 늙은 왕비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때 벌어진 것이다.
다시 오감도
“당신의 적은 바로 당신이오.” 라이오스왕을 죽인 살인자를 찾는 오이디푸스를 향해 예언자가 내뱉은 말은 신탁의 비극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외부에서 난입해 타락한 권력을 부수는 속성을 가진 이방인 역할을 의미한다. 테베 왕가의 모든 비극은 라이오스왕이 미소년 크리소포스를 유괴하고 강간한 죄에서 기인한다. 분노한 크리소포스의 아버지가 품은 원한이 신에게 가닿아 신탁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라이오스 왕이 벌인 악행은 신탁의 비유를 통해 새로운 이방인으로 되돌아온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지독한 저주는 인과응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인과응보는 찾을 수 없다. 그저 결과론에 근거한 허구의 재구성이다. 민중의 시각에서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 이방인 오이디푸스의 눈에 라이오스왕은 죽여도 상관없는 건방진 노인일 뿐이다. 벌어진 사실에 저주를 더하면 이방인을 왕의 자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왕이라고 한들 도를 넘어서는 순간, 그 어떤 식으로든 저항이 따른다는 경고이다.
이방인으로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왕 치하 테베에 물음을 던지는 자이다. 테베인들이 풀지 못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듯이 한계를 두지 않고 묻는 자만이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때 전복의 주체가 ‘이방인’이라는 점은 사조, 정치, 종교 등 질문과 해답에 열린 태도를 취해야만 가능하다. 외부로부터 해법을 찾는 방식은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원작에 따른 오이디푸스의 비극, 즉 두 눈을 잃고 장님으로 떠도는 이방인으로 다시 내쫓길 수 있다는 결말은 이방인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전제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극장 절벽으로 되돌아와 새의 시선으로 오감도로 국립극단 <오이디푸스>를 읽으면 원작과 다른 오이디푸스의 투신은 소포클레스의 낡은 희곡을 마치 성서인양 되새김질하는 권력 지배층의 암투라는 질긴 반복을 아예 끊어버리는 셈이다. 추락은 추락이 아니고 신탁이라는 비유에 따라 비극마저도 자신들의 틀 안에서 가둔 지배층의 욕망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칼날이다.
공간
새롭게 재단법인으로 출범하는 국립극단의 역사에 남을 첫 작품으로 오이디푸스라, 수많은 무대와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에서 변용되어 익숙한 오이디푸스라 무난한 선택처럼 여겨졌지만 어떻게 팀을 꾸리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연극의 원형을 짚어본다는 의미에서도 그렇고, 동시대 트라우마를 트라우마인지도 모르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우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혹시나 싶어 오후 5시 공연 취소 마감 때에 맞춰 다시 극장에 전화를 걸어 표를 문의하지만 헛일이다. 내가 알아본 바로, 마지막 공연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558석 전석이 연일 매진이었다. 한 번 보고 나면 조바심이 나서 다시 봐야한다는 강박을 주는 작품이라는 걸 인정하고 만다. 이 작품이 하고자 하는 얘기들이 과연 새로운가, 잠시 생각하다가 ‘너무나 많은 철학/너무나 많은 주장/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공간’이라는 알렌 긴스버그의 시가 떠오른다. 철학과 주장이 난무하는 시대에 부족한 공간, 갈급한 공간을 제공하는 건 연극 특유의 방식이다.
2009년 외국에서 돌아온 한태숙이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3층 구조와 객석 통로를 모조리 무대로 확장하는 <도살장의 시간>이 좋았다. 대학로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레이디 맥베스>를 볼 때도, 그때만큼 이 작은 극장에 의자를 빙 둘러 놓고 많은 관객이 들어찬 때를 알지 못한다. ‘ㄷ’자로 관객이 무대를 둘러쌓고 동선이 바닥에 앉은 관객으로 방해를 받았지만 예상했다는 듯 춤과 오브제와 연주는 한계가 없었다. 한태숙과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들인양 움직이는 원일의 홀리는 구음, 이영란의 과감한 오브제는 그때 봐온 터이다.
내가 본 바로 한태숙은 무대를 그냥 두는 연출가가 아니기도 했지만 명동예술극장에서 본 <오이디푸스>는 두 번의 인상 깊은 요소가 어우러진 데다, 조명이 기가 막히다. 절벽을 옆에서 조명으로 비추어 뒷벽에 드러나는 그림자는 그 장면 그대로 수많은 이야기를 한다. 성벽에 창이 박힌 듯 매달린 배우들은 해가 어스름이 지는 저녁 치열한 공성전에서 수습하지 못한 시체더미들처럼 보였다. 욕망이 주렁주렁 매달린 벽이자 통곡의 벽이다. 무대와 조명, 공연예술이줄 수 있는 감흥이 한데 모였다.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박정자, 정동환을 비롯한 연기자들 역시 덧붙일 부분이 없는 명배우들이다. 시대의 비극을 보면서 즐거워한다는 건 아이러니이나 어쩔 수 없다.*
사진출처 - 국립극단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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