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혈맥(inn+dividual)
기간 : 2011. 1. 4 ~ 31
장소 :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원작 : 김영수
출연 : 김미옥, 최수빈, 이선행, 박성헌, 현진호, 김정우, 연해성, 박하영
재구성, 연출, 무대미술, 조명디자인, 의상, 음악 : 김현탁
무대감독 : 성석주 / 분장 : 정지호 / 사진 : 최지욱 / 동영상 : 이창환
기획 : 이선행, 이진성
주관 : 극단 성북동비둘기(02-766-1774)
입소문
대중문화는 섹스와 폭력, 시장에서 팔리는 두 가지가 핵심이다. 살찔 염려도 없고 굽기만 하면 되는 비닐 랩으로 포장한 닭가슴 살처럼 번거로운 과정 없이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데다 무한 반복에도 질리지 않으니 꽤 만족도가 높다. 드라마 대본이 그렇듯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으로 눈높이를 낮춘 대중문화를 흐르는 물처럼 즐기는 입장에서 보면 거칠게 요약해서 ‘실험’이 모토인 극단 성북동비둘기 연극은 불친절하다. 연극판으로 한정해도 대학로 130여 개 극장에서 현란한 볼거리에 충실한 선택이 얼마든지 가능하니, 성북동비둘기의 작품은 그들이 터를 잡은 연극실험실 일상지하가 대학로에서 동떨어진 곳에 있듯 관객의 시야가 잘 가 닿지 않는다.
“실험성과 상상력의 극대화로 텍스트의 해석보다 작품의 새로운 연극적 가능성의 새로운 확장을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취지처럼 순도 싸움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태도가 호흡, 호응, 대화보다는 저항, 주장에 더 가깝게 보이니, 시대의 불안과 상관없이 나만의 평화를누리려는 대중들 영 불편하다. 하지만 둔감해진 뇌를 흔들어 깨우려는 의도적 장치일 뿐, 취지는 당연히 관객과의 소통이다. 아니면 굳이, 관객과 호흡을 하는 연극일 필요가 없다. 더욱이 <혈맥>은 객석이 무대 안으로 들어간 형식이다. 관객이 없으면 빈 객석에서 연기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자극에 환호하는 지극히 대중 취향인 내가 끌릴 정도라면 객석이 반 넘게 차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이들이 죄다 환호성을 밖으로 터트리지 못하고 안에서 응축되고 폭발하다가 그치는 오타쿠 성향이라 그런가, 객석은 한산한 편이다.
자가발전하는 소규모 제작 여건이라 다른 매체나 혹은 다른 공연에서 봐온 세련된 이미지와 거리가 멀지만 압구정 성형외과 L모 원장의 취향이 시대를 지배하는 대중문화에서 말하는 '핫'한 이미지란 게 참 물리기도 하고 진부하지 않은가 말이다. 조루증이 미덕인 양 순간 즐기고 넘어가는 하이라이트 영상에 익숙해진 이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내기에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내가 처음에 그렇게 포섭 당했듯이 원칠이 뿌리는 불온 유인물처럼 입소문이 거리를 떠돌아 다녀야 한다.
시대유감
호객행위라도 좋겠는데, 다시 말하지만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작품을 읽으면 충분히 폭력적이다. (사회정치학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폭력과 섹스에서 자유로운 생명이란 게 가능하기나 한가.) 대신 섹스와 폭력을 그대로 드러내는 진부하거나 흔한 방식을 쓰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념화의 오류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저 속성 위에 사회가 덧씌운 당의정, 왜곡을 겨냥해 해머를 내리쳐서 잘게 부수고는 바스라진 흔적으로 색다른 화학 반응을 이끌어낸다.
비유하자면 대형마트 진열대 포장육이 닭, 소, 돼지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인데, 여기까지는 쉽게 누구나 쉽게 동의를 한다. 그런데 생매장 사태를 보고서 20억 육류 수출을 위해 2000억 손실도 입었다는 환원가치에 빗댄 비판도 본질이 아니라는 식이다. 날이 풀리자 매몰지에서 얼었던 핏물을 소스처럼 두르고 돼지 사체가 튀어나온다. 급하게 묻은 탓이지만 부패하면서 부풀은 배에서 뿜어 나오는 가스 때문이다. 생명이었으니 당연한 솟구침이자 생명이었던 시절의 저항이다. 익숙한 포장육에서 느끼지 못한 나와의 동질성을 쥐에 파 먹힌 채로 흙더미에서 뒹구는 돼지 귀, 다리에서 본다. 인류 잔혹사에서 본 장면이 아닌가. 동질성을 사회 구조 안으로 끌고 오면 소모품으로 가치가 없을 경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추방하는 방식이 인간의 시야각을 벗어난 지하셋방 혹은 옥탑방으로 내몰린 이들의 상황으로 번진다.
골목 곳곳마다 고기를 포크로 찍고는 입맛을 다시는 닭/돼지/소가 웃고 있는 음식점 프랜차이즈 간판이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만화 캔디처럼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돼지가 찡끗 웃으며 엄지손가락(발톱)을 치켜세우는 카니발리즘은 미적 기준이 다른 돼지에게는 눈곱만큼도 상관없는 일이다. 돼지처럼 취급당하는 사회 최하층에게만 몸서리처질 뿐이고, 더럽고 좁은 사육장, 인간이 먹다 버린 꿀꿀이죽, 본래 생보다 짧은 삶은 지하 셋방, 정크푸드, 자살로 치환되는 현실 인식.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작품들은 막 썰어내 피가 뚝뚝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뻘건 생고기를 내 접시 위에 던져놨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비슷한 감흥이다.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면 극단 성북동 비둘기의 작품을 보고나온 뒤 바라보는 세상이 그렇다는 의미이지, 그들의 작품이 언캐니Uncanny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육회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먹나 싶은 순간, 고기 한덩이에 태어난 순간부터 싸우고 흘레붙고 새끼 낳고 접시 위에 올라올 때까지 전 과정이 차르륵 머릿속을 지나간다. 그러나 의지와 다르게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는 순간,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기 싫다가 아니라 될 수 없다, 라는 본질 확증에서 다시 새로운 반전이 시작된다. 일상으로 옮기면 마트에서 막 사들고 나온 라면 한 봉지에서 문득 내가 서 있는 좌표와 근간을 이루는 사회 전반에 대한 비평적 사고 확장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런 불싸지름이 일어나려면 담배꽁초를 우연찮게 내던지든 뭐든 작은 불똥이 필요하고, 기분좋은 중독을 일으키는 대중문화에 반해 수많은 훈련과 강도높은 자극이 필요한데, 사설이 지독하게 길었다, 극단 성북동비둘기 연극은 내가 아끼는 성냥갑 같은 소장품이다.
일상지하
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낼 수 있는 이유는 앞서 말한 상품으로 연극(포장육)을 포기하고 시대 본질(매몰지 돼지 사체)에 천착하는 연극을 올릴 만한 여건을 스스로 조성한 까닭이다. 작년 9월 <춘향>부터 올해 8월 <헤다 가블러>까지 1년 동안 간섭과 한계를 둔 정부 관련 연극 제작 지원이나 극단 몇몇이 모여 만든 자구책인 페스티벌 형태도 아닌 연습실이자 공연장 ‘연극실험실 일상지하’에서 달린다. 그래서 거리낌 없는 치열한 작품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는 한편, 부동산 전세 대란 기사를 볼 때마다 ‘일상지하’마저 해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떠안는다. 얼마 간 데코레이션을 포기하는 상황이 상상할 수 있다. 연극 <혈맥>의 배경인 해방 직후 성북동 방공호가 인생의 마지막 대피처인 주인공들처럼 배수진을 친 게 아닌가 싶은 우려가 들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극단 성북동비둘기가 올리는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조급증을 부른다. 인터파크 등 예매 사이트에서 검색이 안 되니 직접 그들과 소통을 해야 한다.
연극 <혈맥>의 시대 배경인 1947년도 아니고 1960년대, 북한한테도 밀렸던 경제후진국도 아닌 세계 10대 경제대국 한국에서, 땅 위로 솟은 짐승 시체는 100g당 얼마, 한 평당 얼마로 익숙한 환원가치이자 가축과 부동산이란 상식 개념을 죄 흔든다. 시체가 땅을 뚫고 나오는 순간, 구제역 사태는 보상금으로, 매몰지는 덮으면 그만인 상황이 아닌 당연한 현상인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낡은 3층 건물 지하 극장 ‘일상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포크레인 삽날자국이 막 찍힌 매몰지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매몰지의 어둠에서 생매장 당한 뒤에 벌어지는 죽은 몸들의 몸부림이라, 아무래도 어긋난 비유 혹은 자의식 과잉이라 생각하지만 <혈맥>이 그랬다.
지랄 맞게 추운 1월, 영하 15도까지 떨어진 이날 얼음장 같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박성헌, 현진호 배우가 몸싸움을 벌이면서 나뒹군다. 한창 혼란기 현실 인식과 이상이 다른 원찰, 원칠 형제 연기를 하는 중이다. 다툼은 연기로되 그들의 등과 배를 파고드는 냉기는 악다구니를 물게 한다. 관객과의 거리는 1m 남짓, 속일 수도 없고, 속을 수도 없다. 보고 있으면 방공호 땅굴에서 벌어지는 지리멸렬한 삶이 처연하다 공감하기 전에 더불어 춥다. 그 입에서 나오는 신음이 맞고 때리는 연기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안다. 배우로 품은 이상과 배고픈 현실 사이 괴리가 그대로 연기가 된다. 연기가 삶이고 삶이 연기다.
인테리어를 걷어내고 콘크리트 벽을 고스란히 드러낸 일상지하는 관객에게 대학로 인근 겨우 구색을 맞춘 소극장과 아예 다른 낯선 공간이지만 배우들에게는 그들 일상이 늘 펼쳐지는 곳으로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연습실이자 생활공간이다. 즉 낯설기는 배우도 마찬가지인 대관 극장이 아닌 친숙한 일상이 벌어지는 ‘일상지하’로 과장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작품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렇다고 연극을 위한 공간이라고 딱히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많지 않은 기자재를 들어내면 카페든 창고든 개조가 가능한 가벼운 공간이다. 정주 개념이 아닌 늘 해체와 변화가 가능한 공간이다. (비둘기에게 날개가 있다는 건, 위로이자 비극이다.)
지하 공간 한 가운데를 시멘트벽이 아닌 비닐로 막아 극장과 대기실로 나누었는데, 형광등이 조명을 대신하는 공간을 둘러싸고 마주 보고 놓은 접이식 의자 40개 남짓이 객석이고 그 가운데와 빈틈이 무대이다. 작품에 따라 혹은 관객 호응에 따라 아예 무대 자체가 지하 공간을 전부를 차지하는 확장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접이 의자로 나뉜 객석과 무대 구분은 의자 사이사이 색이 다른 의자마다 배우들이 앉아서 연기를 하면서 그마저도 다시 해체된다.
혈맥
김영수의 1947년 희곡 <혈맥> 원작에 맞춘 이북 피난민의 대사나 당시 구어체를 그대로 살린 부분이 선뜻 듣기에 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촌스런 한복이나 당시 유니폼이 등장하는가 하면 여름옷과 겨울옷 구분이 없고, 요즘 운동복에 헤드폰을 끼고 등장하기도 한다. 당시 원작이 가진 시공간을 그대로 재현하지도, 그렇다고 현재에 완전히 대입하지도 않은 채 공간의 경계를 허물 듯 역시 원작이 주는 강박을 허문다. 사실주의 연극이니 언덕배기 방공굴을 무대를 꾸며야 한다거나 방공굴 주변 무대를 어떻게 표현하나 하는 고민도 간단히 버스로 대체한다. 해방 직후 시내버스가 드물기도 했지만 당시 버스 요금이 꽤 비쌌으니 빠에서 일하는 옥희나 타고 다녔을까, 등장인물들은 타고 다닐 형편이 아니다. 지금도 마을버스가 주로 다니는 성북동 언덕배기를 당시 버스가 다녔을 리도 없다.
하지만 원작과 상관없이 무대는 버스 안이다. 버스비 70원인 줄 아는 부자들-한때 구설수에 올랐던 그는 정치인이다. 그가 70원 버스비를 실천하기만 한다면 대선에 무소속으로 나와도 해볼 만하다-한테야 버스는 방공굴과 다를 바 없다. 지금이야 버스도 꽤 쾌적하지만, 종종 노숙자가 앉았는지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는 의자 밑에 토사물 흔적이 있고, 운세풀이 광고 위에 비뚤비뚤한 볼펜 글씨로 ‘영미야! 사랑해. 씨팔’을 난 영미를 모르는데도 그 애증 관계를 한참 생각해보다가 밖을 내다보면 뿌연 게 얼룩진 창문인지 황사 낀 거리인지, 그 둘 다인지 헛갈리는 상황을 마주한다. 원작에서도 권리금 삼천원이 없어서 방공굴에서 쫓겨날 판이지만, 연극으로 오면 원작을 압축해서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지만, 정주공간 마저 부정한다.
일상지하에서 받은 인상이 연극에 적용되는 형국이다. 내 옆 자리에 배우가 태연히 앉아 있으니 이제 나도 그들과 같은 노선을 따라 달려야 한다. 무대와 객석, 허구와 실재, 배우와 관객이 모호하다. 거북이는 관객과 나란히 앉아 책을 읽거나 졸다가 연극에 참여한다. 이날 배우가 관객보다 많았다가 도중에 배우들이 등퇴장하는 입구에서 ‘등장’한 관객으로 겨우 동수를 이르니 연기자와 관객의 경계도 흐릿하다. (대사 없이 앉은 그녀가 배우인지 관객인지 몰라 한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반팔을 입고 등장하는 배우 사이 겨울 코트에 토익책을 들고 이어폰을 낀 털보영감 아들 거북이는 반세기가 지나도 고단한 20대 상징이다. 거북이 손에 들린 토익 책은 바로 옆에 앉은 여대생의 두툼한 가방 안 소지품과 동격으로 작용한다. 그 장면만 들어내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빈자리가 많은 버스 막차에 나란히 앉은 젊은 연인처럼 보인다. 거북이, 젊은 연극배우 김정우의 고민과 취업을 앞둔(아마도) 그녀의 고민이 겹친다.
평소 버스를 타는 버릇대로 맨 뒷좌석 즈음에 앉은 나는 옆자리에 앉은 털보 영감을 버스나 지하철에서 그렇듯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옥희 역 연해성의 뒷통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배우 이선행이 귓가에서 내지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불편하다는 티도 내지 않고 묵묵히 듣고 있다. 그의 눈에는 지금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인 데도 말이다. “그 사람네들 먹구 내버리는 턱찌끼만 글어 뫄서 내 와두. 하루에 수천환” 벌이라 팔자를 고친다는 미군부대 취직을 외면하는 아들 거북이를 향해 냅다 지르는 소리가 지하실에 쟁쟁하게 울리고, 귀가 먹먹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돌발 상황처럼 불편하다.
원작의 기승전결을 따르긴 하지만 그 선이 뚜렷하지 않은 연극이 보여주는 파편화된 갈등 상황의 삽입과 교체는 평소 종종 봐왔던 익숙한 실재를 복기하도록 이끈다. 분명 1940년대 후반에 비하면 2011년은 구어체 대사와 외계어 속어 사이 간극처럼 까무러칠 지경으로 달라졌는데, 성북동비둘기가 원작에서 걸러내어 포착한 상황은 현실이 된다.
성북동비둘기
<혈맥>은 1964년 제3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영화로 알려졌으나 영화는 계몽성 오락영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김수용 감독 역량 문제 외에 군사정권 시절 당시 문화계 전반의 문제로 봐야 한다-원작이 담은 작가의 시대 의식도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앞서 말했듯 실험을 풀지 오마주나 답습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털보 영감이 새장가를 든 청진계집을 꼬질꼬질 때가 탄 강아지 인형으로 대체한 모습을 故 김영수 작가가 살아서 봤다면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석하면 해방통에 남편과 자식이 죽은 청진계집을 바라보는 털보 영감의 시각이 평등한 부부관계가 아닌 주인 없는 유기견을 주워 다가 애완견으로 키우려는 심사와 다르지 않고, 돈 많은 늙은이에게 붙었다가 돈만 빼먹고 도망치는 경우는 연극으로 보지 않아도 신문 가십란에서 흔히 다루니 간략하게 다루어도 이해가 되긴 한다.
원작이 공연장 입구에서 나눠준 팸플릿으로 40년대 말 성북동 인근 빈민가를 다룬 희곡이라는 걸 얼추 알 수 있지만 <햄릿>, <세일즈맨의 죽음> 등 이전 작업에 비해 생소한 편이다. 한국 근현대사 연극 재발견이라는 함의를 품고 있을까. <춘향>, <만선>을 레퍼토리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딱히 부수적인 의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혈맥>은 원작 해체 부담이 작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익히 거침없는 행보를 보면 그 역시도 들어맞는 이유는 아니다.
<혈맥>은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여느 작업처럼 걷어내고 남은 골격에 관객이 조합을 해서 살을 붙이길 요구한다. 하지만 인지도가 낮은 낯선 작품은 의욕보다는 외면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 작품은 이전 작품이나 앞으로 올릴 작품과 좀 다른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연극을 보는 내내 맴돈다. 원작에서 말하는 ‘그래도 희망을 품자’라는 결론은 용산 철거민 참사 등 지금 벌어지는 비슷한 사례 앞에서 힘을 잃는다. 연극 <혈맥>이 말하려는 의도도 물론 아니다. 의붓딸 복순을 술집에 보내려고 노래를 가르치는 옥메 역 김미옥이 펼치는 연기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가출한 복순을 찾으려는 의도를 떠나 절절하게 다가온다. 관객과 배우 사이 거리를 두지 않는 공간 활용이라야 가능하다. (김미옥도 바닥을 나뒹군다. 우비를 입고 있지만 뼈만 남은 손가락이 눈에 박힌다.)
성북동비둘기가 터를 잡은 성북동 100-1번지는 <혈맥>의 배경, ‘모퉁이에 전선주에는 [소변 엄금], [밑에 사람 사오]라고 서투르게 쓴 종이’가 붙어 있는 성북동 산비탈 뚫린 방공호와 맞닿아 있다. 유명한 <세일즈맨의 죽음>(11.14~12.12)과 <메디아 온 미디어 MEDIA on media>(02.24~04.10) 두 작품 사이 <혈맥>은 무대이되 연극이 끝나면 무대가 아니고, 객석이되 연극이 끝나면 객석이 아닌 지하실이자 제3의 장소이고 작품을 바꿀 때마다 새로운 ‘연극실험실’이고 또 ‘일상지하’인 공간에 애정을 좀 더 담은 연극이 아니었을까. 4월 10일까지 공연하는 <메디아 온 미디어 MEDIA on media>는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대표 레퍼토리로 전부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극단 성북동비둘기와 첫 만남으로 좋은 기회이다. (02-766-1774 club.cyworld.com/bee2gee)*
사진출처 - 극단 성북동비둘기, 블러거 desbons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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