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 자식 사랑했네]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구보씨 2010. 12. 3. 14:36

제목 : 그 자식 사랑했네

기간 : 2010년 12월 3일 ~ 2010년 12월 12일

장소 : 대학로 공간아울

등급 : 만 19세 이상

출연 : 미영 역_최보영, 정태 역_서홍석, 멀티맨_문민형, 연주_이선

창작/기획/주최/주관/제작/배급 : 명랑씨어터 수박

 


헤어지는 이유

“헤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을 잘 모르겠네요.” 헤어지고 나니 이유를 알겠더라는 말에 그녀가 소주를 들이키고는 말했다. 데면데면한 사이에 이런 얘기까지 할 건 아니었다. 그리고 공유해서 될 얘기도 아니었다. 결혼을 두고 불특정 대상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나온 자리였다. B와 헤어진 이후 죽 연애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를 하다가 나온 얘기다.

 

몇 안 되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가 만난 그녀들 취향은 B와 공통점이 많았다. 좋아하는 타입과는 또 달랐다고 해야 할까, 정작 사귀고 보면 B와 많이 닮았다. 어쩌면 전혀 달랐는데 재구성을 하는지도 모겠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래도 헤어지는데 이유가 있었던 건 B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헤어지는 이유가 나에게 있었다고 결론을 짓고, 그 이유를 극복하지 못한 데에 대한 자괴감으로 괴로워했던 건 말이다.

 

여자와 헤어질 때마다 깊이 사귄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조금이라도 괴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B와 만날 때만큼은 아니었다. 이유가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있다고 해도 그만, 남들처럼 그저 그런 이유들은 그리 오래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일이나 취미나 내 자신에게 좀 더 재미를 붙이고 몰두했다. 헤어지는 데 이유가 없었던 건 B만큼 사랑하지 않았다기보다 그만큼 열병을 앓기가 두렵기도 했고, 어느 정도 귀찮기도 한 게 솔직한 심정이다. 사랑마저도 열정이 없다면, 이미 늙은 노인이 되어버린 걸까. 더 이상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집착일 수도 있으니 퇴행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와 노인을 오가는 자신을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사랑했었거나 사랑하거나

“그 자식 얘기 그만해. 다른 사람 만나서 너도 잘 살아야지.” 여자 둘이 마주 앉은 테이블, 빈 소주병이 두서넛 있는 자리에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누군가의 올라간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들어봤을 이야기. 연극 <그 자식 사랑했네>의 스토리이다. 나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여자를 만나는 남자, 하지만 정작 자신이 남자를 빼앗은 꼴이 되고만, 마침내 다른 여자에게 돌아간 남자 이야기, 그 남자를 되새김질하는 여자. 자신이 아니면 고루하고 지루하고 진부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했네, 라는 고백이, 사랑했었다는 박제된 과거와 사랑한다는 진행형 사이 그 모호하고 흐릿한 경계에서 잊히지 않는 그(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내 경험이 투사되어버리면 잠시라도 먹먹해지는 부분이 있다. 이야기로는 공유할 수 없는 부분, 나를 만나기 위해 급하게 달려온 그녀를 자취방 퀴퀴한 이불 위에 눕히고 급하게 윗옷을 벗겼을 때 숨에 차서 오르내리는 가슴 사이 솟은 땀이 흐른 모양, 냄새, 맛처럼 나 홀로 술처럼 취할 수밖에 없고 알 수 없는 외로움 같은 것들이 떠오르면 말이다.

 

좋은 남자를 만나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못내 자기 맘 한구석에는 더 날카로운 조각으로 남은 반지 같은 사연을 가진 마주 않은 여자의 얼굴을 본다. 덩달아 멜랑콜리한 감정에 빠져서 자기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대신 얘기를 듣는 그녀, 그렇게 자기 얘기는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의 얘기가 더 궁금하고 끌린다. 비슷한 처지끼리 알고 마는 더러운 감정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바짝 붙은 테이블 사이 누군가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함부로 쏟아내듯 말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다. 적어도 취해서 띄엄띄엄 늘어놓는 얘기로는 짐작할 수 없는 얘기들. <그 자식 사랑했네>가 수많은 연애극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세밀함과 정교함이고, 그 배경으로 따뜻하게 세운 세계관이다. 그 자식이 정말 미운 짓을 했을지언정 그 시절은 참으로 소중했다는 이야기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방패막이라도 해도 말이다. 질척질척한 신파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몹쓸 과거로 치워두거나 술이 깨고 나면 부끄러움에 얼굴 빨개질 한 조각 미련들은 소소한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풀어내는 명랑씨어터 수박의 한땀 한땀 손길을 거쳐 조각보로 완성되어 나왔다.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도

2007 년 초연 이후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작품상, 젊은연출가상, 여자연기상 수상을 받은 작품은 여전히 나쁘지 않지만, 3년 사이 어느새 옛 남자를 추억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클래식한 사연이 되었다. 팍팍한 세상에서 술과 섹스의 무한반복에서 휘발성 위로를 얻는 늙어버린 20대 이야기로 올해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소설 <제리>의가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연극은 20대 후반,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부대끼는 시절 얘기를 다루고 있지만, 어린 시절, 누런 갱지로 싼 통닭을 기억하는 정태의 몇몇 에피소드들을 보면 회고담의 주인공은 지금쯤 30대 중후반일 것이다. 작품을 쓴 추민주 씨의 개인사이든 들은 이야기이든 그녀에게 짜릿하게 남은 추억 혹은 기억들이니 그럴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른 식으로 재구성했다가 성형중독으로 부작용을 겪는 국적불명의 괴상한 얼굴을 내놓는 성형외과의가 될 지도 모르니 옳은 선택이다.

 

그래서 작품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지루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19세 이상 관람가로 정한 이유가 귀여운 남녀 배우의 진한 애정 장면(화끈 달아오르기보다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때문은 아니다. ‘사랑,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설명이 잘 맞지만 이야기대신 아기자기한 구성과 연출만 두고도 보고 후회할 작품은 아니다. 그리고 삶이 닭가슴살처럼 퍽퍽하기로는 20대와 다르지 않은 30대라면 애를 잠시 맡겨두고라도 잠시 위안을 삼을 만한 작품이다.

   

지하 소극장으로 들어서면 흔히 보는 보습학원 광고가 보이고, 칠판에는 분필로 시간표가 적혀 있다. 그 앞으로 ㄷ자로 배열한 책상이 있고, 책상 뒤로 OHP가 놓여 있다. 배경은 서울 강북 변두리 작은 보습학원이다. 임용 고시에 두 차례 떨어진 초라한 경력의 영어 강사 정태나 엇비슷한 배경의 다른 선생들이나 외고, 자율고와는 거리를 먼 학생들이나 그저 하루 빨리 성공하고 합격해서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지만 희망이 가깝지만은 않다. 학원에 과외 경력뿐, 첫 직장으로 국어강사 미영이 찾아온다. 정태와 미영에게 이제 학원은 대학로 작은 커피숍 ‘혜화동 콩집’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바뀐다.

 

 

지루하지 않은 공간

무대 한쪽에서 기타도 치고 노래를 부르고 가끔 연기도 참여하는 가수 이선 양도, 어떤 작품이든 손쉬운 선택 같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지만 아기자기한 무대를 조율하는 숨은 주인공 멀티 역 문민형 군도 소꿉장난 같은 무대에 꼭 어울린다. 연극에 딱 맞다 싶을 정도로 작은 극장에 어울리게 몸집도 아담한 그 둘은 80분 내내 퇴장하는 법 없이 미영의 회고담을 돕는다. 약간 쑥스러운 듯한 기타 연주도 조용히 읊조리는 노래도 좋고 멀티맨이 연출하는 단순하고 유치하기도 하지만 사랑스러운 OHP 장면도 마음에 든다.

 

명랑씨어터 수박은 제 4회 뮤지컬어워즈 작품상 후보로 오를 만큼 잘 만든 소극장 뮤지컬 <빨래>에서 그랬듯이 만만치 않은 현실을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는 미덕을 안다. 둘 만의 농밀한 연애담이지만 좋은 성적을 얻고도 뒷돈을 건네지 않아 임용고시에 낙방한 정태와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남보다 나를 위해 더 많이 울어서‘ 시인이 되지 못 했다는 미영이의 불안한 홀로서기에도 그런 배경을 얼마쯤 남겨놓았다.

 

멀리 남해에 아픈 어머니를 두고 서울로 올라온 미영이는 <빨래>의 나영이를 많이 닮았다. 씩씩하지만 늘 속울음을 달고 살듯 싶은 그녀, 미영 역의 최보영은 얼마 전까지 <빨래>에서 주인공 나영이 역을 맡아 열심히 빨래를 했더랬다. 무엇으로든 위로를 받고 싶은 그때, 그와 그녀의 사랑이란 서로 한계를 뚜렷이 드러내고 만난 몸도 마음도 고단한 청춘의 사랑이 해피엔딩이 되기란, 쉽지 않다.

 

1000 회를 넘기고 새로운 배우들을 뽑고 세 번째 ‘나영이 데이’를 가진 <빨래>와 달리 <그자식 사랑했네>는 우선 딱 10일만 문을 연다. <빨래>처럼 행복한 결말을 갖지 않아서일까, 어쩌면 조용히 어쩌다 속삭이고 싶을 뿐 오래 떠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형님이 마련한 돈으로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학원을 떠난 정태는 지금쯤 여고생들에게 인기 많은 영어 선생이자, 3살 지능으로 돌아간 아버지처럼 고마운 큰 형을 뒷바라지 하는 착한 교회 후배를 부인으로 둔 화목한 가장일 것이다. 미영이 여전히 사랑하는 그는 이제 어느 정도 때도 묻었을 게다. 더 이상 시립대 개구멍을 들어가는 낭만 따위는 픽! 웃어넘길 그는 그렇게 가족을 위해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헤어지는 이유

미영이는 그렇게 이기적인 그를, 미안하다는 사과를 절대 하지 않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이기적인 이유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작품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백을 둔 지점에서 작품에서 보고 나와 내 식으로 이해를 하자면 미영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구구절절 사연도 많은 가족에게, 그리고 그들의 기대를 채우지 못했던 자신에게 미안한 감정을 견딜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정태가 기억하는 미영이와 사랑은 미영이 아는 사랑과 다를 것이다. 적어도 미안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 것이지만 미영을 떠올릴 때마다 늘 미안할 것이다. 미영은 그 시절이 진실한 사랑이었으니 미안할 이유가 없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내가 헤어지는 데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 딱 한 번의 이별 뒤에, 이유를 찾지 못했다면 나도 비겁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오줌을 싼 B의 속옷과 바지를 싸구려 여인숙 공용 세면대에서 빨아서 말려 입히고는 짐짓 모른 척 한 적이 있다. 대견스럽다는 의미는 아니다. 몇 잔 술에 혼절할 만큼 피곤하게 세상을 사는 그녀의 어깨 위에 얹어진 가장 역할을 떠맡은 집안과 그래서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일과 억척스럽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공부까지, 그 짐을 같이 지기가 두려웠다. 그때 내가B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 정도였다.

 

어쩌면 별 일 아닌 일로 벌컥 화를 내고 헤어지고 난 뒤 내내 미안해한 이유를 B는 모를 것이다. B는 가난한 대학생과 했던 후줄근했던 그 시절을 미영처럼 기억해줄까. 이래저래 연극 한 편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난다.*


사진출처 - 뉴스컬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