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아트ART_무대가 좋다] OB와 YB의 만남, 아트가 연극이라서 좋은 이유

구보씨 2010. 12. 23. 12:58

제목 : 연극 아트(ART) : 무대가 좋다 다섯 번째 이야기

기간 : 2010 12 23 ~ 2011 03 31

장소 : 대학로 예술마당 3

출연 : OB : 류태호, 이남희, 윤제문, 유연수 / YB : 정상훈, 김재범, 김대종

기획 제작 : ()악어컴퍼니, ㈜나무엑터스, CJ엔터테이먼트㈜

  


2009

미국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끓어오르는 온도는 사람마다 다르다”라고 했던가. 그런데 남들과 비교할 것도 없이 나이가 들수록 끓는점이 점점 낮아지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진공 상태에서 액체가 끓는점이 낮아진다고 하는데, 요즘 좀 멍한 게 진공상태가 맞다. 정말 별일도 아니었는데, 누군가 무심코 한 말에 살짝 난 마음의 작은 생채기가 불쑥 생각나는 빈도가 점점 느는 게 아닌가 싶단 말이다.

 

그럴 때마다 되새김질하는 자신이 좀스럽다는 자책을 해보지만, 괜히 덜 여문 딱지를 뗀 것 같아 슬슬 열이 받는다. 또 그러다가 당장 생채기를 낸 당사자에게 화가 슬슬 끌어 오른단 말이다. 가해자-이쯤이면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뀐다-가 고인이면 모를까, 얼굴을 마주하기라도 한다면 욕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문제는 대부분 소소한 생채기의 가해자는 대부분 오랜 시간을 마주대하는 가족이거나 애인이거나 친구라는 게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잡은 전날에 왜 하필 그때 일이 떠오르느냔 말이지. 그렇다고 티를 낼 수도 없고, 그까짓 거 해보지만 또 맘대로 되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갈등을 조장하는 건 사실 거대한 사회구조 문제보다는 요런 소소한 심리적인 문제이다. 20년 지기 40대 세 친구의 미묘한 갈등과 해소를 다룬 연극 <아트>는 개인이 일상에서 턱턱 치받치는 문제들을 세밀하게 펼친 연극이다.

 

<아트>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에서 공연 중이라니, 나만 그런 건 아니라고 다소 위안을 삼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명품 배우 이대현, 권해효, 조희봉의 호흡으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작가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의 보다 농익은 작품 <스페인 연극>이 작년에 이어 다시 선을 보였다. <아트>가 친구들 사이의 미묘한 지점에 주목을 했다면, <스페인 연극>은 가족 사이 갈등이 주를 이룬다.

 

경쟁주의 극을 달리는 한국 사회는 옆으로 나란히 선 친구 관계를 좀처럼 제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친구로 지내다가 <아트>의 기계과 교수 규태와 피부과 의사 수현처럼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다, 연극의 결말과 다르게 아예 원수로 돌아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바, 어쩌면 <아트>의 희망적인 해결은 더 이상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친구 사이에서도 열을 받다가 열처리를 과하게 한 쇠처럼 뚝뚝 끊어지는 단절이 이제 일상이다.

 

 

  

SNS

2009 11월에 본 <스페인 연극>의 리뷰 일부분이다. 친구에서 가족 관계로의 확장, <스페인 연극> <아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작품이라고 봤다. 2011 1월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아트>를 봤다. 그런데 보고 난 감상이 이전과 좀 다르다. 극중 나이보다 한결 젊은 탱탱한 YB팀 공연으로 본 탓일까. 앞서 극장 계단을 내려가는 관객이 빠르게 휴대폰 스크린을 두들긴다. 공연 소감을 트위터에 올리는 중이겠지. 그야말로 퀵 리뷰이다. 그새 세상이 바뀌었다.

 

페이스북의 설립자 벤 메즈리치 실화를 다룬 영화 <소셜네트워크 The Social Network, 2010>의 미국 극장 재개봉 뉴스에서 알 수 있듯, 2009년과 2010년 사이 가장 큰 변화는 새로운 SNS(Social Network Service)의 등장과 열광이었다. 2009년에도 싸이월드 등등 있었지만 트위터, 페이스북에 비하면 덩치가 크고 비대한 데다 개념도 좀 다르다. 길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은 휴대기기를 들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나 SNS에 접속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트>의 수현과 규태처럼 ‘예술’과 ‘판때기’ 논란을 직접 만나 얼굴을 붉히면서 싸우지 않는다. 간단하게 "앙트로와의 그림을 28천만 원에 샀습니다. 여러분은 비싸다고 생각하세요?" 라고 트위터에 올리고 기다리면 그만이다.

 

물론 그렇다고 갈등을 푸는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는다. 새 싸움만 벌어질 뿐이다. 수현이 맺은 관련 팔로어들은 당연히 “적정 가격이다” “당장 그 가격에 나한테 팔아라”라고들 할 테고, 규태의 팔로어들은 “미친 짓이다!” “우리 집에 그 그림 1000장 있다 백 원씩에 사가라”라고 야유를 보낼 것이다. 연극에서는 친구 세 명 사이 12, 21 혹은 111 경우의 수로 갈등 확산을 막고 한정 짓지만 트위터로 옮겨가면 정치, 사회, 예술의 견지에서 타당한 이유를 대는 수많은 의견을 등에 업고, 수현과 규태 사이 끝없는 소모전을 펼치게 될 것이다. 자칫 가십 뉴스로 소개되어 앙트로와 후손들까지 나서는 등 이야기는 무한대로 펼쳐지겠지만 친구 둘 사이 소통의 질을 전혀 담보하지는 못한다. ,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SNS 관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눈부신 발전이 범죄 검거율은 높여줄지 모르지만 범죄율은 낮출 수 없다는 말이다. 

  

‘You don't get to 500 million friends without making a few enemies(5억 명의 친구가 생긴 순간 진짜 친구들은 등을 돌렸다).‘ <소셜네트워크> 홍보 카피를 그대로 믿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내가 개인 소통창으로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남들의 말로는 이해하지 않으려는 혹은 못하는) 데에 좀 더 혐의를 둘 수도 있다. 그렇다고 SNS의 필요성이나 효용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

 

(이란) 정부가 트위터 접속 IP를 막아도 프록시라는 우회 IP를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차단을 피해나갔기 때문에, 정보를 통제하는 데에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의 트위터 사용자들은 이란 국민들이 트위터를 통한 항의 운동을 계속할 수 있게 자신의 서버를 프록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운동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두가 광장에 모이다, 348)

 

2009 6월 이란 부정 선거를 막은 예나, 지금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게 판명 낫지만 오바마가 매케인을 누르고 미대통령 당선이 된 데에는 오바마 팔로어 13만 명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례도 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촛불집회나 용산참사 때 웹캠과 노트북을 들고 생중계했던 시민기자들의 활약도 SNS 기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집단지성이 아닌 개인으로 돌아오면 그 현실은, 적어도 내가 아는 40대 트위터리안의 현실은 그저 그렇다. 직장 L선배는 트위터에서 2천 명이 넘는 인맥이 있지만 늘 외롭다. 한때 그는 내 대학 후배를 찾아내서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을 정도로 퉁퉁한 손가락으로 잘도 휴대폰 화면을 눌러댔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전처럼 환호하지 않는다. 정보 축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체온의 허기를 달래기란 영화에서 말하듯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달래는 법을 젊은 세대와 다르게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빠져도 2천 명이 재잘거리는 데에는 티도 나지 않는다. 2천이라는 숫자로만 남은 환영이지만 선배는 여전히 자신의 인맥이 두텁다고 생각한다.

 


  

YB

정상훈, 김재범, 김대종의 <아트>는 “보살펴야 친구지!”를 외치는 규태 역 정상훈의 대사처럼 치유 혹은 위안을 다루는 작품으로는 괜찮지만, 40대 중년의 현실을 미세하게 포착하는 수준에 다다르는 못했다. 20대처럼 보이는 30대 배우들이 40대로 보이지 않아서 일수도 있고, 뮤지컬 <스팸어랏> 1 2일에 끝내고 합류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아서 작품에 숙성이 덜 된 탓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이대현, 조희봉, 권해효의 연기력을 기대하기에도 좀 이르다.

 

YB팀은 <스팸어랏> 기사단으로 3개월이 넘도록 연습기간까지 따지면 6개월이 넘도록 한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다. 나도 연극 <아트> 자체보다는 <스팸어랏>의 알토란같은 배우들을 다시 만나려는 생각이 앞섰다. 좋은 호흡으로 충분히 웃기고 충분히 수긍 갈만하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작품 주인공들이 왜 40대여야 하는지가 좀 더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30대 청담동 피부과 의사도 있고, 30대 전문대 교수도 있으니 30대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다. 한국 사회에서 사오정 세대에 이어 삼팔선 세대라고 자조적으로 풍자하는 시대이니 말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별 볼일 없는 덕수의 경우 30대와 40대는 피부로 와 닿는 감상이 많이 다르다. 성공을 향해 직진을 한 친구들과 다르게 알코올 중독자였던 전력에 여전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가진 거라고 앙트로와 1/4가격인 전셋집이 전부인 덕수가 진작 결혼을 했다가 이혼한 수현도 있는 마당에 뒤늦게 결혼을 한다는 설정은, 레자가 원작을 쓸 당시 프랑스 결혼 문화가 어땠는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30대와 40대 상황이 전혀 다르다.

 


 

2004년 공연부터 <아트>에 참여한 OB팀 덕수 유연수는 1966년생, 40대 중반으로 극중 역할과 비슷한 지점에 와 있다. 머리가 살짝 벗겨지고 작은 키에 배도 좀 나온 그는 고군분투하는 대한민국 40대의 표상이다. YB팀 덕수 역 김대종은 팀에서 개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축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보아도 훈남이다. 40대에게는 의사든 교수든 문방구 주인이든 30대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찌든 내라고 해야 할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나이테 같은 냄새가 난다

 

배우를 연기한다는 것은 이상해요. 난 그 역할이 배우라는 것을 관객에게 드러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껴요. 연출은 당신 자신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요, 라고 말하죠. 그런데 나 자신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죠? 배우라는, 나 자신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죠? 그게 존재하기라도 하나요?”

 

연극이란 게, 단절을 이야기하려고 해도, 우선 관객과 소통을 해야 ‘단절’이 가능하다. 이 작품이 단절을 말하려는 게 아니기도 하거니와 관객이 부러 작품을 외면하려고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지 않는 이상, 얘기하려는 건 고통스런 과정의 공유를 통한 치유 혹은 위안이다, 라고 썼던 삼중 극중극 형식의 <스페인 연극> 리뷰에 비유하자면 YB팀의 초연이나 다름없는 이날 공연은 <스페인 연극> 배우의 고민을 담은 대사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Art

인생의 저녁은 그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다음 삼십 년은 그 주석이다. -쇼펜하우어과거 생채기 불쑥 찾아오듯이 우연히 본 블러그 격언 위젯 내용이다. 원작은 이 격언에 충실하다. 40대 이후 삶이란 살아온 인생에 달린 주석을 친구끼리 서로 공유하고 맞춰보는 과정이다. 그런데스마트폰 큰 장 "약정 해지자 1500만 명 잡아라"’(한국일보 경제 19 2011.01.14)라는 기사가 뜨고, 지인들에게 연락 좀 자주하고 살자고 하면 트위터를 보면 대충 뭐하고 사는지 아는데, 왜 넌 하지 않느냐고 타박을 한다. 올해 인구대비 스마트폰 보급률을 30%로 예정한다고 한다.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40대 선배들은 한숨을 쉰다. 그러니까 지금 현실은 40대 이후 주석을 달기에 너무 빠르다.

 

<아트>에서 보여주는 갈등 및 해소 과정은 딱 누구랄 것도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에게 해당하는 보편적인 상황에 대입이 가능하다. 사고방식이란 게 나이가 들수록 바뀌기 힘들다 보니 인생의 절반인 40대를 기준으로 갈수록 자기주장을 굽히기가 쉽지 않다. 다시 말해 40대가 남성들이 체면과 자존심을 굽히면서 울고 싸우고 속내를 털어놓는 마지막 마지노선이 아닐까 싶다.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28천만 원짜리 그림(2008년 연극 버전에 비해 그림 가격이 1억 올랐다.)에 낙서를 허용하고, 또 하는 상황이 꽤 극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코미디라서 허용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림에 스키를 타는 사람을 그리는 순간, 즉 흰 바탕에 흰줄을 그은 앙트로와의 작품이 ‘판때기’로 전략하는 순간이 이론과 비평에서만 허덕이는 현대미술의 허위 허식을 벗기는(적어도 야스미나 레자는 그렇게 보는 듯한) 통쾌한 전복으로 다가오는 대신 현실에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과장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래서 규태가 작품에 펜을 대는 순간에 객석에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오는 대신 피식 웃는 순간, 이 작품은 그냥 코미디 연극이 되기 쉽다. 알다시피 좋은 예술 작품이란 현실을 어떤 식으로든 가장 잘 해석하고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정의로 보면 현실과 괴리를 좁히는 작업이 곧 연극 <아트>가 주의해야 할 지점이다.



 

사실, 전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지금까지 있게 한 것,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결코 이성적인 게 아니라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덕수의 마지막 대사는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덕수가 30대라고 보면 난 전셋집을 가진 그가 부럽다. 그래서 그의 집에 걸린 싸구려 풍경화처럼 그의 말이 닿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각질이 발뒤꿈치만큼 쌓인 우리는 (대부분) 교수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지만 덕수 같은 친구가 꼭 필요하다. 날씨가 무지하게 춥다. 이런 세상에서는 끓는점보다는 어는점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화내고 화해하고 술 한 잔, 남녀노소(?)를 떠나 그래도 그렇게 사는 거다. 대구법을 꼭 따라야겠다는 의도는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고들 하는데, 구태의연한 구석이 있지만 랄프 왈도 에머슨 씨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다. 이 연극은 당장 화해하자는 얘기니까 말이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유익한 일들로 채워가라. 그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사진출처 - 오픈리뷰, 연극 아트 공식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