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New Wave 공연예술축제 Festival 場[장] : 죽음에 이르는 병 _ 사무소
일시 : 2010년 9월 11일 ~ 2010년 9월 12일
장르 : 문학+연극+설치미술
작․연출 : 양혜규
협력연출 : 이해제
음악 : 송병준
출연 : 유정아
원작 : La Maladie de la Mort by Marguerite Duras (한글 번역 : 정희경)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주최 : 서울문화재단
제작 : 남산예술센터, 원더스페이스
하이힐
모노드라마 <죽음에 이르는 병>이 시작되고 1시간 쯤, 배우 유정아가 잠시 퇴장하고 조명이 낮아지자 객석 중앙 앞열 어디쯤 앉았던 누군가가 일어섰다. 옆 자리 앉은 사람들을 헤치고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소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침묵에 가까운 공연, 하이힐을 신었는지, 또각또각 명쾌한 소리가 극장을 울린다. 액자형 무대와 돌출형 무대가 결합한 구조의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의 삼면에 앉은 관객들이 주목을 그녀를 한다. 난 정중앙 가장 윗열, 그러니까 통로에 바로 앞에 앉아 있었고, 그녀가 올라오는 모습을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인양 보고 있었다. 조명을 최소화한 공연, 내 뒤로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직원들의 플래시 불빛이 무대 불빛보다 더 화려하다.
용기 있는 하이힐 덕분에 긴장감이 깨졌는지, 여기저기 휴대폰 불빛이 반짝인다. 그녀처럼 ‘나’도 지루하다는 신호이다. 관객들의 이런 반응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몇 가지 혐의가 있다. 일요일 저녁이지만 평일처럼 늦은 8시 딱 한 번 공연. 하루치 해야할 분량을 정리하거나 포기할 때쯤 찾아오는 이 시간이 따로 휴일을 챙기지 않는 나에게는 딱 부담이 없는 편이지만, 당장 윌요일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마음이 바쁘다.
일요일 8시 공연이라, 연출가 양혜규는 천편일률적 공연 관습이 싫어서일 수도 있고,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유정아 스케줄이 안 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병>과 비슷한 일정으로 열리는 자신의 개인전 <셋을 위한 목소리 Haegue Yang : Voice Over Three>나 그녀가 참여한 <마르그리트 뒤라스 영화제 - 목소리 Voice>의 관객들의 동선을 고려한 시간대일 수도 있다. 아무려나 모노드라마라고는 하지만 무대 위 배우가 서 있는 1m 남짓 외에는 어둠이 깔린 공연, 정보를 최소 단위로 제한하는 공연에 다들 감각이 예민하다.
뒤라스를 읽는 법
아무려나 느리게 진행되는 공연, 관객의 퇴장에 정신이 맑아진다. 그런데 혹시 지금 퇴장이 의도한 퍼포먼스가 아닐까. 그녀는 극중 ‘당신’으로부터 떠나간 ‘그녀’가 아닐까. 연극을 시작할 때, 객석 등이 아주 오랫동안 아주 천천히 꺼졌다. 아주 조금씩 어두워지는 조명은 기존 연극의 다른 공간으로 빠른 전이가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낯설다. 조명이 낮아지는 동안 반원형 객석으로 마주 보는 낯선 누군가의 얼굴을 주목한다. 이제는 상투적이긴 하지만 혹시 배우가 객석에서부터 공연을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낯선 누군가의 얼굴에서도 나와 비슷한 표정의, 어리둥절한 얼굴이 보인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이렇게 서서히 침식해 들어온다는 듯, 그리고 당신도 그 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듯, 미세한 물결처럼 다가오는 뒤라스식 흐름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연극 <죽음에 이르는 병> 원작은 짧은 단편소설이다. 그런데 빠르게 읽지 말 것, 모노드라마는 뒤라스를 읽는 법을 알려주는 양혜규식 해설서이다. 같은 사랑을 두 번 다시 할 수 없듯이 다시 읽기보다 천천히 대화를 주고받듯이 읽을 것. 극 속으로 들어가면, ‘당신’이 ‘그녀’의 성기가 젖을 때까지 천천히 애무하듯이 읽을 것.
양혜규가 ‘목소리란 글이나 여타의 소통법과는 달리 화자와 청자 사이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면서도, 때론 서로 다른 해석을 낳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한 이유를 전통적 소설 기법에서 벗어난 누보로망 작가 뒤라스에게서 찾자면 사랑의 속성, 그중에 그 불가능한 완성에 대한 열망이다. 뒤라스가 텍스트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다 대중적인 매체인 영화를 통해, 그리고 연극으로 그 가능성을 남긴 이유 역시 뒤라스를 추앙한다는 ‘양혜규’ 렌즈로 보니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동시에 열리는 전시회, 영화제, 연극을 일관되게 묶는 기준이 목소리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낯선 상황
“제 작업이 ‘카테고리’로부터 참 자유롭죠. 대신 그것이 저를 약하게 하는 부분도 있어요. 제 작업이 어떤 경향이나 사조, 장르로 그룹핑되는 특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보통 하나의 주제로 작가들을 선정하는 기획전에 참여해 보면 그 주제를 소화하는 방식에 있어서 항상 주변적인 경향에 속해요.”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대표 작가 미술인 양혜규’(네이버 캐스트 한국인 시리즈 09.04.09) 중에서
하이힐이 무사히 나간 뒤, 양혜규가 장르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지만 설마, 미니멀한 무대, 장치, 배우를 동원해서 극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미학적으로 통제한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괜히 긴장한 게 스스로 우스워 실소가 터진다. 하이힐이 배우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사실, 지금도 미진하게 의심이 든다), 사이를 두고 암전이 될 때마다 소수지만 두어 사람씩 짝을 지어 객석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세계 100대 미디어 설치미술가’라 불리는 양혜규의 첫 연극이니 봐야 한다는 당위만으로는 뒤라스의 연극 지침에 충실한 공연은 충분히, 지루하다.
무례를 무릅쓰고 극장에서 나갈 때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인데, 나는 맨 뒷줄에 앉았다 해도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다. 대신 공연을 보면서 소심한 덕을 종종 보기도 하는데,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현대인들을 어떻게 진단하는지, 고민하기에 끈기가 필요했지만 충분히 즐기기도 했다. 귀, 쓰고도 달콤한 커피처럼 아나운서인 유정아의 저음은 듣기 좋았다. 1시간 30분가량 무대를 오가면서 ‘당신’과 ‘그녀’로 소설을 낭독하는 동안 오직 한 번 더듬었을 뿐이다. 아쉬움이 남는 사랑 얘기를 담은 목소리는 심장에서 스피커처럼 울리지만, 세상에는 목소리를 가장하는 사기꾼들이 많고 그들은 더듬지도 않는다. 귀는 그 정체를 가려낼 줄 모르고 마냥 헤벌쭉이고, 냉정한 머리만 신경 쓰느라 골치 아프다.
사물화
유정아는 가만히 서서 책을 읽다가 멈추고 무대를 비우거나 가끔 오간다. 연기라기보다는 퍼포먼스에 가깝고, 귀와 눈에 들어오는 감정선이 불일치한다. 테이프로 녹음한 신음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만 감정을 드러내면서 연기한다. 연극에 빗대자면 난 이미 죽음에 이른 듯 그들의 건조한 대화에 몰입이 잘 되지 않는다.
“이런 '사물에 대한 의인화'는 제 작업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브제 안에 설치된 전구는 전기라는 물질을 통해 전체의 공간이나 빌딩과 연결돼 있어요. 블라인드 색깔은 주관적입니다. 침실에 있던 라디에이터 형상에는 노란색을 썼죠. 광기를 나타내요. 쉬고, 자고, 먹는 휴식이 아니라 잠들지 못하는 광기 말이에요.”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대표 작가 미술인 양혜규’(네이버 캐스트 한국인 시리즈 09.04.09) 중에서
유정아의 행동과 감정선 절제는 의인화한 옷걸이, 선풍기, 조명, 대형 스크린와 같은 선상에서 긴장을 유지한다. 어둠 속에서 반경을 최대한 좁힌 조명은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선처럼 객석과 무대를 훑는다. 작품에서 모든 조명은 무대를 밝히는 단순한 빛보다는 ‘시선’으로 그 역할을 한다.
느릿한 시선처럼 무대 바닥에서 나오는 불빛은 객석과 극장 천장을 자유로이 돌면서 비춘다. 설치미술가의 안목답다고 할지, 드라마센터 천장의 드러난 철골 뼈대는 황량하고 메마른 ‘당신’의 내면을 보여주기에 알맞고, 일정 시간 객석 여기저기에 멈추는 눈빛 혹은 불빛은 찾는 그녀를 찾는 ‘당신’의 건조한 우울한 시선처럼 보인다. ‘당신’이 바라보는 그녀(관객)가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고 표정은 무표정하거나 굳었다.
의인화
양혜규가 자주 사용하는 사람 높이의 선풍기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가장 알기 쉽고 강렬한 오브제로 쓰인다. 고개를 꺽은 채 무대 중앙에 놓인 선풍기는 ‘그녀’가 떠난 뒤 절망에 빠진 ‘당신’이다. 뒤에서 세심하게 조작해 선풍기를 비추는 조명이 새기는 그림자는 절망에 빠진 몸이 비쩍 마른 남자이다. 조명이 숨었다가 다시 비추면 선풍기가 회전하면서 돌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그녀’를 찾는 ‘당신’의 몸짓처럼 보인다.
‘적외선 히터에서 나오는 빨간 조명과 뜨거운 열기, 에어컨이 일으키는 바람, 가습기가 주는 먹먹한 수증기, 자동 향분사기가 뿜어내는 인위적인 향 등은 블라인드로 구획된 투명한 공간에 자리한 관람객의 몸의 감각에 직접 와 닿는다. <사동 30번지>전과 마찬가지로, 무심히 배치된 듯한 설치 속에서 관람객들로 하여금 각자의 다양한 감각과 생각, 감정들을 체화시키고 느낄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양혜규의 작업이 지닌 중요한 힘이다.’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대표 작가 미술인 양혜규’(네이버 캐스트 한국인 시리즈 09.04.09) 중에서
분주하게 도는 ‘당신’ 앞에 ‘그녀’ 유정아가 관객을 뒤로 하고 당신과 마주보고 선다. 허나 ‘당신’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분주하게 두리번거리면서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찾는다. 바람이 바로 앞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지만 ‘당신’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무의미한 바람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당신’은 다시는 ‘그녀’와 만날 수가 없다. 낭독하는 유정아 외에 연기 혹은 오브제로 유정아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양혜규 / 2006
열린 구조
극이 끝나고 유정아가 뒤라스의 연극 지침을 읽기 전까지, 유정아의 목소리는 스피커로 들리는 목소리와, 그녀의 움직임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모습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유정아의 오브제화, 오브제의 의인화는 경계를 짐작할 수 없는 접점을 찾는 작업이 이 작품의 중요한 틀이다.
페스티벌 장 학술행사 <공연예술, 미디어를 만나다>에서 연출가 이경성은 포스트 드라마 형식의 추상적이고 건조한 ‘열린 구조’가 ‘없는 구조’로 뒤바뀌는 상황을 경계했다. 작가, 연출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면서 관객들에게 마치 구조가 없는 형태가 되는 무의미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이다. 그리고 개념 작업의 또 한 가지 난점으로 배우의 존재와 역할이 매우 소극적, 장치적, 소품적인 상황에 그칠 수 있는 상황을 지적했다.
뒤라스와 양혜규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이경성의 지적에서 자유로울까. 양혜규는 평이하나 난해한 소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기자에게 뒤라스가 한 반문으로 대신한다. ‘당신이 가족과 맺는 관계, 혹은 연인과 맺는 관계들이 과연 쉬운가, 어려운가?’ 엄연하고 기본적이라서 당연히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설명 대상조차 안 되는 그런 것들이 사실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라는 뒤라스/양혜규의 설명이다.
하지만 좀 부족하다. 실재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담은 틀인 소설/연극의 어려움과 동격일 수 있을까. 인간관계는 종종 비극적인 파탄으로 이어지기고 전쟁으로 번지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그 틀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뒤라스/양혜규의 작품이 오랜 습득과 타협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인간관계 어려움에 대한 관찰자로 그 자체를 답습한다면 ‘문제를 위한 문제’라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오브제들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간극의 미묘한 조율에 대한 부분에 대한 극복은 결국 관객으로부터의 반작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양혜규의 연극은 개념작업의 열린 구조를 담는 닫힌 공간으로 극장을 주목하면서 이경성의 두 번째 염려까지도 한꺼번에 극복하고 있다. 극장을 들어설 때 극장 직원이 “공연 시작하면 다시 나오실 수 없습니다”와 “지정석이니 자리를 옮길 수 없습니다”라는 당부에 관객들이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고 만다. 의미부여를 하자면 오브제가 될 준비를 충분히 시킨 셈이다.
극장 천장과 객석을 비추는 조명을 따라다니면서 관객은 곧 극장의 닫힌 구조를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되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대상으로 인식을 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조명을 ‘당신’의 시선으로 해석하면 유정아와 오브제의 경계는 무대 밖으로 넘치고 가만히 앉아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작 고개가 비트는 관객들도 오브제로 역할을 하게 되는 상황이다. 막연하게 짐작으로 관객의 동의를 구하는 수동적인 공연예술 방식에서 벗어나 기존 극 형식과는 다른 설치미술가다운 방식으로 관객을 극 안으로 적극적 개입을 시키면서 열린 구조 안에 ‘배치’를 시켜버린다.
연극이 끝나고, 유정아가 뒤라스의 연극 지침을 설명하는 이유는 배우이자 연출의 대리인으로, 관객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사항이고 그렇게 진행을 했으므로 공유를 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설명을 마친 뒤, 유정아는 의례 뒤따르기 마련인 커튼콜을 생략하고 그대로 퇴장한다. 역할을 분담한 이상 배우/소품/관객 구분이 없어졌다는 의미일까, 연극 시작과 다르게 객석등이 빠르게 들어오고 관객들이 당황하지 않는 이유도(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의미의 심도는 뒤로 하더라도 동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3인칭 ‘그녀’와 2인칭 ‘당신’의 사랑이야기, <죽음에 이르는 병>이 끝났다. 뒤라스의 말처럼 나는 너와 그녀/그를 이해하기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하고, 혹은 의심이 하거나 체념을 하는 데에 그치겠으나, 그렇게 무뎌지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겠으나, 실은 중증 진단을 받은 셈이지만 왠지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사진출처 - 페스티벌 장
New Wave 공연예술축제 Festival 場[장]
장소 |
작품명 |
일정 |
공연단체 |
장르 | |
남산 |
죽음에 이르는 병 |
9.11~12 8PM |
사무소 |
문학+연극+설치미술 | |
The Wall |
Remixed Conventions |
9.16~17 8PM |
Nebular Factory |
미디어+ | |
Blended Eyes 2 |
9.18 6PM | ||||
찰나가 부르는 시간 |
9.23~24 8PM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
설치미술+음악+미디어+무용 | ||
원더 |
원 <一, one> |
9.9~10 8PM |
블루엘리펀트 |
영상+무용+동해안별신굿 | |
LOVE ver.2010 |
9.17 8PM |
키라리☆후지미 극장& |
연극+사운드+영상 | ||
문래 |
Private Collection |
9.13~15 8PM |
최찬숙, 극단 몸꼴, 엘리어스 코헨 |
미디어+신체극+설치미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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