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외

[반호프Bahnhof] 연극의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차를 타러 대합실로

구보씨 2009. 10. 23. 15:39

'반호프'는 유쾌한 작품입니다~. 1년 뒤 2010년 두 번째 버전도 무척 재밌게 봤는데요. 소극장에서 까르르 터지던 관객들의 웃음이 떠오릅니다. 기분이 안 좋았던 아는 형님(?)과 남자 둘이 보러갔다가, 아주 기분좋게 나왔습니다. 배우들이 던진 사탕도 한 알 먹었던 기억도 새록새록 나네요. 대사도 없고, 얼굴도 볼 수 없으니 배우들 스스로 기분이 좋지만은 않지 않을까, 싶었는데요. 마지막 인사를 할 때 마스크를 벗으니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로 활짝 웃는 모습이 멋있게 보였습니다. 바로 앞에서 웃고 즐거워 하는 관객들들에게 보람을 느꼈겠지요. 이 작품으로 세계를 돌아도 좋겠다, 했는데요. 이후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2012.12.27]  

 

제목 : 반호프Bahnhof

기간 : 2009년 10월 23일 ~ 2009년 11월 15일

장소 : 대학로 씨어터 디아더

출연 : 최요한, 구기환, 한준호, 송영훈

작, 연출 : 백남영

마스크 제작 : 이수은

제작 : 창작집단 거기가면

 

 

넌버벌 마스크 연극 <반호프 Bahnhof>는 독일어로, 번역하면 기차역을 뜻한다. 그렇다고 원작이 독일은 아니다. 원작과 연출을 맡은 백남영과 그의 부인이며 마스크 제작자인 이수은이 10년 동안 신체극과 넌버벌 연극과 미술을 공부했던 곳이 독일이다. 젊은 동양인 부부의 눈에 생경했을 독일 기차역 풍경은 각인으로 남아 마스크 생김새나 기차역 전경에 더해 다양한 삽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굳이 독일을 떠올리지 않아도 기차역 구내나 아기자기한 일상은 아이서부터 어른까지 국적을 불문하고 다 같이 공감하기에 충분하다. 그만큼 고려 혹은 고심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연극에 대한 원초적 접근법”이라는 설명처럼 연극의 원형에 대한 탐구의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가 얼굴이 과장된 만화캐릭터에 쉽게 친근함을 느끼는 이유 역시 어느 정도는 기인할 것이다.

 

배우 4명이 무려 37명으로 확장하면서 극을 이끄는 <반호프>의 주인공이라면 역시 37개의 가면이다. 마스크 전문 제작자인 이수은의 손을 거친 각각의 얼굴은 코믹하게 과장되었으면서도(얼굴 윤곽이 뚜렷한 외국인이라는 설정이 밋밋한 동양인보다 표현이 쉬울 것이다), 연출 백남영의 “마스크가 표정이 하나인데도 때로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해서 관객들이 그 인물을 즐길 여유를 주는 것 같다”는 설명처럼 보는 각도나 조명의 시각이 아닌 마스크 안의 배우들의 의도와 관객의 몰입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재미를 준다.




어디를 가든 기차역은 늘 북적인다. 4명의 배우가 그 많은 역할을 다 소화하려니, 마스크와 의상을 갈아입으려면 능숙한 연기와 호흡이 척척 맞아 떨어져야한다. 4명의 남자배우들은 영화 <마스크>처럼 마스크를 쓰는 내내 그 역할에 쏙쏙 빠져들어 관객들을 복작복작한 기차역으로 인도한다. 극 중간에 네 명이 한 명씩 늘어나더니 어느새 똑같은 아랍인들로 등장하는 대목은 마스크 연극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재미이고, 눈만 뚫어놓아 음식을 먹지 못하고, 곤욕스러워 하는 대목과 역무원 아가씨가 등장해 살짝 반전을 보이는 대목도 <반호프>만의 소소한 재미다. 

 

배우를 더 늘리지 않은 이유는, 소극장 극 규모, 제작비 절감, 배우 수급 등의 이유를 들 수 있지만, 한 사람이 나서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된 모든 이야기의 시작, 최소한의 인원 등장을 통한 연극의 원형에 대한 탐구로도 볼 수 있다. 조폭, 승무원, 소매치기, 노인, 군인, 말괄량이 아가씨 등 37개의 마스크를 쓴 배우들이 1시간 30분간 소극장 무대와 객석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는 내내 마치 아이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들기도 했다. 극의 주축인 대합실 청소부 할머니 소라와 별로 하릴 없이 재미삼아 기차역을 찾는 할아버지 동수의 사랑 얘기는,세상의 관심에서 가장 먼 위치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 점 역시 <반호프>가 사랑받는 이유이다.*

 

사진출처 - 창작집단 거기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