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를 달래는 방식 혹은 위안
제목 : 허기진 휴식 - 극단 몸꼴
일시 : 2009년 10월 14일(화) 늦은 4시, 8시
장르 : 신체극
연출 : 윤종연
출연 : 최은아, 민기
뉴웨이브 공연예술축제 2009 페스티벌 장(場)’이 7일부터 16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열린다. ‘페스티벌 장’은 1997년 극단 사다리의 정현욱 대표가 중심이 돼서 마임이스트 유진규, 극단 여행자 대표 양정웅, 무용가 박호빈씨 등이 참가하는 실험축제로 2001년까지 계속됐다가 재정난 등으로 중단된 것을 이번에 서울문화재단(대표 안호상)과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회장 정현욱)가 부활시켰다. 이번 축제에는 4관객프로덕션, 김윤진댄스컴퍼니, 극단 몸꼴,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와 도쿄데스락 등 4개의 젊은 단체가 참가해 정형화된 문법을 탈피, 새로운 공연을 선보인다.
문화일보 09-10-07일자 '무대위 새로운 물결… 신선한 감동의 파도' 기사 발췌
지독하게 뜨거웠던 올 7월 말, 극단 몸꼴 2009 단막극장 프로젝트 <모으로부터 번지는 몸 꼴라쥬>를 기억한다. 당시 몸꼴 5편 중에도 <허기진 휴식>이 있었다. 당시에는 다지 기대를 했던 공연 프로그램이 아니어서 김정은 연출, 김정은, 위성희의 <새빨간 여행> 한 편만 봤다. “몸짓은 의사를 표현하는 모든 행위에 앞선다. 가다듬은 신체 언어로 번지는 무대만이 우리가 떠나보낸 다른 형식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 몸짓이 의사 표현의 행위에 앞선다는 전제는 당연하고, 이런 식의 소개는 신체극이라면 흔히 하는 말이다. 당시 이인극의 소품 공연쯤 여겼던 <새빨간 여행>은, 이인극의 소품 공연은 맞지만 ‘가다듬은 신체 언어’, ‘다른 형식을 불러 모으다’에서 확실히 도드라졌다.
페스티벌 場 팸플릿에서 극단 몸꼴 <허기진 휴식> 소개를 봤을 때, 몸도 작고 눈도 작은 배우 위성희가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터트리는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파블로프가 울리는 종소리에 개가 그랬듯이 입 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실제로 배가 고픈 게 아니었으니 <허기진 휴식>에 대한 반응이었다.
최은하, 민기 남녀 배우 둘이서 남산예술센터 중극장을 어떻게 채울까, 궁금하기도 기대하기도 했다. 전날, 페스티벌 場 두 번째 공연인 <다녀오세요, 구두가 말했습니다 Ⅱ>는 동선이 좁히고는 배우에게 점을 찍어 집중을 요구했다. <허기진 휴식> 공연은 몸짓의 잔상과 공명이 제대로 반영되기만 한다면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스레인지가 딸린 싱크대, 킹사이즈 침대가 바닥에, 침대 위에는 전등이, 무대 중앙에 긴 줄이 내걸렸다. 먹고 자는, 기본적인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이다. 빈공간이 많은 무대가 막막하게도 보이지만 남녀 애인 한 쌍의 등장은 무대를 따뜻하게 채울 수 있을 만한 조건이다. 그런데 무대 중앙 앞쪽으로 천장에서 내려온 줄에 걸린 고리가 눈에 거슬린다. 목을 매고 자살을 하기에 딱 좋다.
싱크대에 선 여자가 자살소동을 벌일 것이라고 예고처럼 적어나가면 벽이 아닌 바닥에 영상으로 투사된다. 마치 무대가 거대한 손바닥 안처럼 보이고, 그러자 미미월드 장난감 세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무 생각하지 마세요, 여자가 마지막 당부 글을 남기고 본격적으로 뛰어 다니기 시작한다. 그런데 미미와 켄의 소꿉장난이라기에는 살벌하다. 남자는 자살을 하기 위해 준비한 이런저런 도구를 꺼내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자살은 이들의 허기를 채울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쾌락은 죽음에 다다르는 미묘한 접점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속도계를 한계치로 끌어올렸을 때, 마약 그램수가 치사량에 근접했을 때 영혼의 무게를 느낀다. 그 정점은 죽음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찾는 건 쾌락인가? 침대 위에서의 퍼포먼스는 섹스를 연상케도 하지만, 그들의 몸짓이나 표정에서는 지독한 노동과 관계 회피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둘 사이에는 연인 사이라는 익숙한 관계망이 엿보이는데, 공을 주고 받듯 몸짓으로 보여주는 둘 사이의 어긋난 소구는 계속 불연속 접촉을 보여준다. 불연속 접촉은 모스 부호를 닮았다. 하지만 서로 엇갈리는 순간, 무의미한 소음처럼 관계가 변질된다. 극 초반 느긋한 재즈는 이제 판이 튀는 듯한 불안한 효과음의 반복으로 바뀌었다. 몸과 몸이 적극 부딪히면서 연인 사이 가장 높은 싱크로율을 보이기 마련인 침대는, 이제 도망가려야 도망가기도 힘든 가장 작은 링이다.
무엇이 문제람? 익숙한 관계, 서로 사랑하는 사이, 헤어질 마음은 없고 자살이라는 선택을 해서라도 서로 원하는 마음은 여전하다면. 과하게 해석하면 모든 관습과 안정이 주는 중독성에 대한 탈주일 수도 있겠는데, (이때 너무 생각하지 마세요, 라는 당부가 떠오르며) 어쨌거나 남녀 사이로 한정지으면 몇 가지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여자가 목에 줄을 걸고는 나머지 줄 한쪽을 잠자는 남자의 손목에 묶는다. 남자의 잠버릇에 따라 여자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긴다. 연인 사이 뒤에 숨은 벗어나고 싶은 속내이다. 알게모르게 무의식적 행동과 무심코 한 말이 주는 서로에게 주는 상처로 볼 수 있다.
싱크대에서 늘 자살 도구만 찾던 남자는 물이 끓는 냄비에 관심을 보인다. 라면을 넣기 전 팔팔 끓는 물은 아직은 자살(?) 혹은 자해가 가능하다. 무대 바닥에 다시 영상이 들어온다. 개수대에 물을 따르자 화면이 같이 끓는다. 필름(추억 혹은 기억)과 포크(어긋나는 현실)가 가라앉은 개수대가 하얗게 변하면서 무위로 돌아간다. 이윽고 남자는 얇은 이불로 침대 위에 경계지를 지으면서 여자를 침대 밖으로 몰아낸다.
하지만 남자는 곧 침대 가운데, 커다란 구멍 속으로 허우적거리며 빠져들더니 침대 밑으로 떨어진다. 남자를 구원하는 건 여자다. (현실에서도 비교적 그렇지만) 남자를 따라 기꺼이 구멍을 통해 침대 밑으로 따라 들어간 여자는 남자를 위로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끓는 물에 라면을 넣는다. (죽고자 하는 행위가 살려는 행위로 바뀌는 순간이다.) 남자가 여자가 끓이는 라면에 관심을 갖고 따라 나오고 조리에 참여한다. 갑자기 여자는 남자의 등에 매달린다. 다시 갈등의 재반복일까, 남자는 여자를 떨쳐버리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즐거운 유희로 바뀐다.
“나의 그늘이 외로움의 그늘을 만들고 외로움의 그늘이 너에게 그늘의 삶을 드리웠다. 너의 곁에 머무는 나는 너의 위태로움에 네 곁에서 지워지고 지워지는 나를 볼 수 없는 너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었다. 나는 내가 고프고 네가 고프다.” 공허하고 추상적인 이 말에 동의를 하더라도, 그 허기를 푸는 방식은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며 구체적이이지 않으면 소요이 없다. 그런데 정말 구체적이고 효과적이다! 먹는 행위 역시 쾌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죽음과는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곡예에 가까운 연기를 펼친 배우 둘이 라면 한 그릇을 사이좋게 맛있게 나눠먹는다. 후후 불면서 먹는 순간, 냄새가 효과음처럼 극장에 퍼진다. 극장에 들어오기 전에 막 식사를 하고 왔지만 또 허기가 올라온다. 지금 허기는 뭐람? 지금 느끼는 허기는 부러 떠올린다고 느낄 수 있는 허기가 아니겠지 싶다. 이 허기는 몰랐거나 무시한 “내가 고프고 네가 고픈 삶의 지랄 같은 먹먹”한 허기다.*
사진출처 - 페스티벌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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