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12언어 혹은 데스락 방식
제목 : 로미오와 줄리엣 - 제 12언어연극스튜디오 + 도쿄데스락
일시 : 2009년 10월 16(금) 늦은 4시, 8시
장르 : 신체극
구성 및 연출 : Tada Junnosuke
극단 :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 도쿄데스락(한일 합작)
출연 : 이구노, 이윤재, 권택기, 박경찬, 김송일, 오민정, 강정임, Sayama Izumi, 최소영, 김유리
뉴웨이브 공연예술축제 2009 페스티벌 장(場)’이 7일부터 16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열린다. ‘페스티벌 장’은 1997년 극단 사다리의 정현욱 대표가 중심이 돼서 마임이스트 유진규, 극단 여행자 대표 양정웅, 무용가 박호빈씨 등이 참가하는 실험축제로 2001년까지 계속됐다가 재정난 등으로 중단된 것을 이번에 서울문화재단(대표 안호상)과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회장 정현욱)가 부활시켰다. 이번 축제에는 4관객프로덕션, 김윤진댄스컴퍼니, 극단 몸꼴,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와 도쿄데스락 등 4개의 젊은 단체가 참가해 정형화된 문법을 탈피, 새로운 공연을 선보인다.
문화일보 09-10-07일자 '무대위 새로운 물결… 신선한 감동의 파도' 기사 발췌
한일 합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객석을 무대를 좁히고 그 옆에 끌어당겨서 바짝 붙여 놨다. 마당극이나 콘서트장에서 보는 아레나 식 무대이다. 페스티벌 場첫 번째 공연
관객과 배우의 거리가 접사처럼 바짝 당겨놓은 의도가 있을 것이다. 마당극으로 옮긴 로미오와 줄리엣? 분우기가 도통 거리가 멀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익숙한 얘기, 아는 얘기다. 클럽에 오는 이유도 뻔하다. 부킹, 급만남, 번팅, 충돌, 돌진, 사고, 뭐라고 부르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남자와 남자가 만나서 싸움을 한다.
배우가 한두 명 등장한다. 앉았다 일어서기, 단순한 동작을 반복한다. 그 사이 배우들이 몇 명 더 늘었다. 원을 그리고 앉아 서로 따라하다가 이윽고 경계를 하면서 서로의 동작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사 없이 서로 눈치를 보는 모습이 몬테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의 앙숙 관계라는 배경 설명일 수도 있다. 다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원작에서도 그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이탈리아 베로나 지역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두고 추측을 해볼 뿐이지만 무의미하다. 그 이유가 부질없다는 건, 셰익스피어 알고, 배우들도 알고 나도 안다. 배우들이 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하나둘씩 모여드는 배우, 5명의 남자와 5명의 여자다. (아무리 봐도 클럽이다.)
상갓집에 온듯 검은 정장으로 통일한 외모에서 역할을 찾기 힘들다. 나이 대, 분장, 복장 어디에도 배우의 개별성 외 익명성이다. 한데 어울려서 춤을 추는가 싶더니, 곧 누군가로부터 시작한 사소한 다툼이 소용돌이치듯 전체로 번진다. 누구라도 상관없이 뛰어다니면서 마구잡이로 손을 날린다. 이 정도까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뺨을 거세게 맞고 기절하듯 쓰러지기도 한다.
10m×10m 정도의 작은 매트리스 무대지만 열린 무대 구조상 배우들을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같은 눈높이로 내 앞에 선 배우는 다른 배우의 동선 체크를 방해한다. 근경과 원경, 앞모습과 옆모습과 뒷모습이 겹지만 특정 개인을 좇는 게 아니니 딱히 불편할 건 없다. 복제 마네킹이 가득한 창고쯤이다. 5대 5로 갈리고, 드디어 대사가 터져 나온다. 번갈아 책을 읽듯이 대사를 주고받는데, 고전적인 희곡 텍스트를 굵은 뼈대만 추려왔다. 여럿의 입에서 나오는 문어체 텍스트는 고도로 집중하지 않으면 그대로 흘러가 버린다.
애초 그들의 얘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건 무리이다. 아는 정보를 더듬어서 이어붙일 뿐이지만 한 명씩 돌아가면서 번갈아 치는 대사는 거대한 스피커에서 나와 극장을 타고 사방에서 울리는 신세대 댄스곡처럼 혼란스럽다. 상황 인식 종료, 어렸을 때, TV에서 본 영화에서 올리비아 핫세가 들어와 박힌 뒤, 드라마나 뮤지컬이나 연극에서 엇비슷하게 변주를 하면서도 문신처럼 새겨진 영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예쁘고 잘생긴 로미오와 줄리엣은, 지금 뛰어다니는 배우들의 발밑에 깔려서 형체도 없이 뭉개진다.
남자 배우들은 로미오고, 여자 배우들은 줄리엣이라는 정도만 확실하다. 물론 동시 수많은 배역들이기도 하다. 좀 전의 가문의 대립 구도도 의미가 없다. 다만 성별에 따른 배역 구분만 있는데, 이마저도 관객을 위한 배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몸에 충실하고 싶다는 의도로 보인다. 원작 파괴일까? 하지만 진행과 대사는 원전을 그대로 따른다. 마치 기존 방식으로 하려고만 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식이다.
배역 구분이 없고, 감정이입이 힘든 만큼 이질적인 진행에 배가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때때로 이들의 대사는 책을 읽듯, 억양을 묘하게 비틀고, 코미디처럼 한 호흡으로 긴 대사를 늘어놓는다. 배우들은 개연성 없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 굵은 땀방울 흘리고, 객석 옆에 웅크리고 앉은 디제이는 볼륨 레벨을 점점 높인다. 조명은 수시로 바뀌면서 흰 매트리스 무대를 빨갛게 파랗게 알록달록 물들인다.
이마저도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분석으로 따라가는 게 무의미하다고 마음을 고쳐먹자, 비로소! 로미오와 줄리엣이 보이기 시작한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이건 연극에 대한 해체, 몰입에 대한 전방위 방해 공작이다.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는데,그렇다면 왜? 이들이 해체하려고 드는 건 텍스트로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다. 착실히 텍스트 진행을 따라가는 자세는 꽤나 진지하다. 다만 텍스트 위에 덧칠을 해댔으나 영화, 드라마 등 수십만 번쯤 변용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하고 진부하게 반복되는 클리세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타깃으로 보인다.
이들이 상복을 입은 의도가 두 연인의 비극에 대한 최소한의 오마주 쯤으로 여겼으나 아니다. 이들이 죽이려고 드는 건 바로 이미지의 가면 뒤에 숨은 낡아 너덜너덜한 구태, 예를 들면 내 경우 올리비아 핫세가 지배(?)한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확장하자면 얌전히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려고 극장을 찾은 이들의 선입견이다. 이들이 펼치는 방식은 해석불능 코드다. 그러니 부순 뒤에 스스로 새로운 방식(에테르ether)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 익명성 뒤에 숨은 배우들은 개연성 없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 굵은 땀방울 흘리지만,한편으로 무의미해 보이는 몸짓은 유희의 완성이다. (나이트클럽이 그렇듯)
근조화인 국화꽃을 들고 나타난 배우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한다. 술래에게 걸리면 국화꽃을 던지면서 장렬하게 산화한다. 술래의 눈을 피하는 게 핵심인 이 놀이는 가문의 눈을 피해서 사랑을 찾는 두 연인의 사랑 얘기와 딱 들어맞는다. 와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최종 결정판이다. 텍스트가 마무리 될 무렵 배우들은 무대 밖 빈 객석으로 부챗살처럼 흩어졌다가 무대 위로 돌아오길 반복한다.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반복된다. ‘살아있는 배우의 신체를 통해 무대와 객석의 현재적인 소통과 즉각적인 교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와 박이가 아닌 간이 의자를 사용하는 남산예술센터 구조와 잘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다.
공연 초반, 관객 몇몇이 지루한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심지어 그 시끄러운 와중에 졸기도 했고, 유일한 일본 배우인 사루마 이즈미 양이 드문드문 한국어 대사를 살짝 어색한 발음으로 칠 때마다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와 일본 극단 도쿄데스락의 합작 프로젝트인 2008년 아시아연출가워크숍 한국 버전 업그레이드판 로미오와 줄리엣은 12언어 혹은 데스락(Death lock)처럼 굳을 대로 굳은 통념을 한 방에 날리는, 거침없는 공연이다.*
사진 출처 - 페스티벌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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