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외

[금형세트 프로그램] 자웅동체 선언이 유효한 이유

구보씨 2009. 1. 29. 12:12

[금형세트 프로그램]
2009년 1월 29일(목)~ 2월 1일(금)
금으로 만든 인형(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목금 60분 공연)
유압진동기(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 토일 60분 공연)
장대높이인형(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로비 / 10분 비디오 반복 상영)
원격조종인형(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 일 30분 공연)

 



보여주기와 끄집어내기

“연출가이면서 배우로 직접 무대에 서는 그녀의 작품은 먼저 무용인지, 연극인지, 퍼포먼스인지를 고심케 한다. 몸과 오브제에 관한 작품이 주된 테마인데, 무용을 전공한 그녀가 노련한 몸놀림으로 인형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기에 충분하다.” -금형세트 프로그램 공개 소개 중에서-




무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천, 진공청소기, 마네킹, 가면, 칫솔 등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이는 도구들은 단순히 보이기에 효과적인 도구들이 아니다. 정금형과 자웅동체 싱크로율이 가장 들어맞는 정교한 장치들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기에 충분”한 이유가 ‘보여주기’가 아닌 ‘끄집어내기’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같은 이유로 염려스러웠다. 정금형이 말하는 자웅동체가 관객과의 교집합 혹은 동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공연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다소 엉뚱하게 들리는 자웅동체 선언이, “이후 남성과의 섹스를 중단했다”는 개인적인 진정성이 나와 공유할 만하고 또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

 

정금형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화한 욕구인가 아닌가, 라는 가부 여부를 떠나서(난 그저 관객일 뿐이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는 그녀의 풀어놓은 오브제들이 그녀와 교합하면서 변이하는 과정을 거리를 두고 탐색하는 정도일 것이다.



난폭하면서도 평화로운

《금으로 만든 인형-오르가즘에 집착하는 6가지 방법》 중 <진공청소기>는 2007년 춘천마임축제 도깨비어워드상 수상작이기도 하거니와 가장 눈에 띄는 공연이다. 흡입구에 꼭두각시 머리를 단 진공청소기는 온 몸의 기능이 오직 오르가즘을 위해 빨기 위한 형태로 진화한 직설적 표현이다. 정금형이 오로지 왼손만으로 조작하는 꼭두각시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반라의 대상으로서의 정금형을 난폭하고 거침없이 다룬다. 모터의 데시벨 높은 신음과 정금형의 몸을 탐닉할 때마다 먹먹해지면서 발기하듯이 부풀어 오르는 파이프는 꾸미지 않아 텅 빈 폐허를 떠올리게 하는 건조한 무대를 오르가즘으로 가득 채운다.

 

그러나 <진공청소기>를 비롯해 정금형의 작업이 호평을 받은 이유가 오브제의 새로운 선택과 발견이라는 완성도 높은 ‘보여주기’에만 있는 건 아니다. 정금형이 공연에서 혹은 일상을 넘나들면서 성적 균형을 이루는 자웅동체 선언을 한 이상, 여성 역의 수동적 태도라는 자웅이체의 상대적 개념에 근거한 지적도 적절하지 않게 들린다.

 

굳이 지적을 하자면 과연 등가의 역할 분배로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방법은 없는가, 정도일 텐데 알다시피 오르가즘이란 사랑과 달라서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대결 구도가 성립되지도 않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합의라는 전제 하에 자웅동체의 성도착과 성적 쾌감을 얻기 위한 6가지 시도는 지극히 행복하고 또 평화로워 보인다. 단순한 대체물을 이용하는 자위행위로 얻는 오르가즘과 다른 지점이다. <진공청소기>는 이날 선보인 6편의 공연 중 가장 거칠고 선정적이지만 같은 이유로 가장 유토피아에 근접한 작품이다.


 


순환 구조를 가진 자웅동체

그렇다면 유토피아를 들먹일 정도로, 정금형이 보여주는 몸에 대한 탐구, 자웅동체라는 화두는 타당한가? <진공청소기>를 보면 주체가 된 꼭두각시가 욕망을 드러내는 동안, 10분 남짓한 공연 내내 정금형은 꼭두각시 역할에 철저하다. 흥분, 슬픔, 아픔, 모욕 등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뻣뻣한 구체관절인형처럼 움직인다. 붉은색 슬립과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속옷이 드러나지만 흥분이 일지 않는 이유 역시 인간이 아닌 섹스펫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꼭두각시와 정금형의 ‘나머지 몸’ 사이의 호환성이 놀랍다. 그리하여 꼭두각시에 몰두하는 진공청소기의 애증은 안쓰럽기만 하다.

 

정금형은 “관계의 수동적인 여성성”이라는 관객의 문제 제기에 충격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솔직히 다른 영역으로 봐야 하는 본능(id)을 두고 여성관이니, 남성관이니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더욱이 자웅동체인 적도 없고 상상도 해보지 못한 우리로서야, 새로운 인류종인 자웅동체를 두고 벌이는 성적 차별 운운은 난센스에 가깝다.

 

꼭두각시의 욕망은 곧 정금형의 욕망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이즘에 대한 정금형의 숨은 욕망으로도 해석되지만, 결국 자웅동체가 되려고 시도를 하나 자웅이체일 수밖에 없는 정금형의 주체는 접속한 진공청소기에 있지 않다. 진공청소기가 정금형을 대상으로 두고 빨아들여서 채운 욕망은 다시 정금형의 조율을 통해서 다시 되돌아간다. 이 같은 순환 구조는 일방적 배설인 자위행위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녀가 왜 원하는 자웅동체에 대한 실마리를 본 듯하다.*




사진출처 - 정금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