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세포 복제가 한창 논란이었을 즈음, 오싹했던 기억이 있다. 생명 경시, 앞뒤 없는 애국주의, 거기에 기댄 공명심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봤던 기사에는 복제 시대가 오면 더 이상 Y염색체가 필요 없다고 했다. 체세포 복제를 하면 더 이상 기존의 수정 방식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다시 말해 남성이 필요 없다는 기사였다.
자궁이 없는, 생명을 키울 수 없는 남성이라는 한계를 새삼스레 일깨우고 나자 왠지 속이 헛헛하고, 내 몸이 고작 영혼을 담는 물렁물렁한 가죽껍데기라는 생각을 하니 영 허전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인간과 비슷한 사회 구조를 가진 벌이나 개미를 봐도 그렇더란 말이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성의 역할이 과장되고, 여성에 대한 우위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유가 바로 이런 근본적인 남성이 가진 한계에서 온 두려움이 아닐까. 머리는 몰라도 몸이 아는, 무의식적인 발로에서 나온, 말 그대로 ‘몸’부림이 아닐까…. 보이스씨어터 몸MOM의 <꿈 70-18>과 <나의 배꼽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극장 무대를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했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몰라 다소 불안했다. 하지만 검은색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한편, 생명의 기억을 불러온다. 어두운 밤마다, 혹은 눈을 감고서 잠을 자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빨려 들어가지 않는가. 기억을 못할지언정 단편 단편으로 남은 꿈을 실마리로 두고서 말이다.
배우이자 연출이자 작가인 김진영 씨도 얘기했지만,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깊숙하면서 안전한 장소, 자궁 같기도 했다. 눈이 밝아지기 전의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어둡고 따뜻하면서도 죽음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는 공간. 어쩌면 흔하디흔한 곳, 부러 검은 치장을 하지 않아도 전등을 끄면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는 지하 공간은 가난했던 나에게는 익숙한 장소이다. 그런데 지긋지긋한 무채색의 지하 공간에서, 기억이 있을 리 없는 자궁을 먼저 떠올린 건, 익숙지 않은 탓일 수도 있지만 보이스 퍼포먼스라는 형식의 2인극 <나의 배꼽이야기> 때문이었다. 대사를 절제한 의성어(비명을 비롯해 동요 역시 입에서 의미 없이 흥얼거리는 듯이 나온다.)
소녀가 호랑이가 되어 금기를 넘지 못하게 하려는 어머니를 잡아먹는 과정과 성기로 변한 배꼽과 섹스를 통해 결합하는 과정에서 주연이자 연출이자 작가인 김진영은 한 판 제의를 벌인다. 그런데 내 눈에 참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자궁(무대) 안에서 금기를 깨려는 몸짓 성기화한 배꼽과의 섹스와 이후의 과정을 연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여성과 남성으로 갈리기 전의 혼재된 형태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얇은 옷 위로 드러난 풍만한 가슴, 굵은 허리, 두툼한 둔부에서는 생명력이 철철 끓어 넘친다. 섹스의 환희일 수도, 금기를 깬 고통일 수도, 생명의 완성일 수도 있는 장면, 옷을 두 팔로 잡아 늘려 얼굴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쓴 모습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다. 허나 당당하게 정면을 향해 섰을 때 버러진 어깨와 예쁜 듯 잘생긴 얼굴과 그 표정과 바닥을 단단히 딛고 선 털이 듬성듬성 난 단단한 다리는 남자의 것이다.
사방으로 치켜 올린 머리와 웃통을 벗고 통 넓은 황토색 치마를 입고 비너스 옆을 천천히 돌며 읊조리듯 길다란 원통형 악기 ‘디제리두’를 부는 이철성 씨는 심지어 종을 넘어서 아폴로 신과 음악으로 겨룬 반인반수 마르시아스(Marsyas)이다. 또 낮은 울림이 끊이지 않도록 쉼 없이 ‘디제리두’를 불었는데, 객석 가까이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은 모습을 옆에서 보면 복식호흡을 하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배가 아이가 낳기 직전인 듯, 혹은 뱃속에서 음과 양이 요동치는 듯이 보였다. 다시 말해, 제의를 옆에서 거들며 모닥불을 지피듯 고수 역할을 하는 그 역시도 원초적 기운이 뒤섞인 소용돌이 속, 한 자궁 속(한 무대 위)에 있는 것이다. 한두 가지 소품과 몇 쌍의 조명이 마주보며 세워져 있는 조명만으로 인간의 근원을 따져 묻는 판타지가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그런데, 엄마는 왜 소녀에게 배꼽을 만지지 못하게 했을까. 그리고 소녀는 상상에서나마 왜 엄마를 죽였을까. 도덕률이 적용되지 않는 무의식(id)의 영역에서 보면, 엄마는 아이를 낳는 순간 자신에게서 분리된, 그래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자신의 젊음(생명력)의 상징인 소녀를 분열 이전의 그 형태를 유지하려 든다. 그러나 엄마의 분신인 소녀는 엄마 걸었던 그 길을 점점 커지는 근원((libido)으로부터의(디제리두의) 소리를 따라 오래되고 쇠약한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다. 그리고 출산의 순간, 아이를 거느린 어미이자 완전태가 되면서 자신 어미를 대체(죽임)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끊임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낳았어도 분신이라고 하기에는 이것저것 잡스럽게 섞인(반인반수 마르시아스의 비유) 생명을 갖지 못하는 도구,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불완전체(이철성의 입에서 나오는 비명, 혹은 악기 소리는 언어 형태를 갖지 못한 불완전한 것이다)인 사내만 낳은 어미는 생명에의 집착을, 그 욕망을 어떻게 풀 수 있는가?
그 욕망을 보여주는 작품이 <꿈 70-18>이다. 폐경기를 맞은 이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이 된 노파는 목에 굵은 목걸이를 차고 빨간 옷을 입고는 여성성을 드러내려고 애쓰지만 부질없다. 마치 관 속인 듯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등장한 노파는 꿈에서 18살의 눈부시게 찬란하고 천진난만한 젊음(배꼽을 파기 전)을 가진 자신을 본다.
이때 연출을 보면 처음부터 노파의 뒤에서 그림자로 등장한 이철성이 껍데기를 벗어버리듯이 겉옷과 가면을 벗고 소녀가 된 김진영의 뒤에서 노파의 가면과 옷을 받아 들고 노파의 연기를 펼친다. 아무래도 입고 있던 옷을 들고 연기를 하니 부피감이 확 줄 수밖에 없는데, 젊음이 빠져나간 뒤의 노쇠함, 혹은 아이를 낳은 뒤 홀쭉해진 여성을 기발하게 표현했다. 이제 껍데기만 남아 쭈그러든 노파는 다시 그 젊음을 붙잡아서, <나의 배꼽 이야기>처럼 이제는 어미를 죽여서라도 욕망을 채우려고 들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현실에서 딸을 통해 욕망을 채우지 못하거나, 이제는 분신(딸)마저도 같이 늙어서 젊음의 상징은커녕 거울을 보는 꼴이 된 여성에게 남은 마지막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회귀를 통해 젊은 자신을 만나 그 생명력을 뺏으려는 욕망, 그 원초적인 욕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 이전에 여성을 그릇으로 삼은 생명 그 자체가 가진 욕망일 것이다. 때때로 실제보다 과장되게 알려진 작품들이 많아 실망스러운데, 이 두 작품은 알려진 명성이나 화려한 이력 이상의 것이 있었다. 김진영, 이철성 부부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극장(자궁)에서 좁은 계단(탯줄)을 통해 밖으로 나와서는 배꼽(입구) 근처에서 <꿈 70-18>에서 노인이 죽자, 드디어 잠에서 깬 나비가 잠시 어리둥절해 하듯이 잠시 서성댔다. 그리고 나비가 날아오르듯이 다들 부랴부랴 발길을 재촉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공연을 같이 본 친구는 “동물이란 유전자를 전달하는 도구라는 얘기”라고 맥 빠지고 딱딱하게 표현했는데, 이런 말은 썩 맘에 들지도 않고 신뢰도 하지 않는다. ‘이동 수단으로 인간을 택한 유전자’가 무성생식이나 환경에 따라 성 전환이 가능한 동물과 같이 빠르고 편리하고 합리적인 이동 수단을 택하지 않은 이유와 지구상에서 가장 고등한 생명체가 가장 느리고 불편한 이동수단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또 이는 생명의 원초적 신기(神氣)를 담을 수 있는 온전한 신기(神器)인 여성을 남성과 동일선상에 놓는, 인류 역사의 패착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 보이스씨어터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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