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을 본 지난 토요일은 분주했다. 여행을 간 부모님을 대신해 누나(1년에 한두 번쯤 얼굴을 보는, 가족)가 보낸 과일 상자를 받기 위해 택배기사를 기다렸다가, 겨우 면접 약속 시간을 맞춰서 평소 텍스트로만 주고받았던 반가운 분들(정작 얼굴은 처음 보는, 동호회)를 만났다. 그리고 10년 만에 다른 누군가를 통해 연락을 받은 교회 친구(솔직히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동기)의 어머님 장례식에 들렸다가, 연극(같은 목적을 가진, 관객)을 봤고, 연극이 끝나서는 밤새울 작정으로 느지막이 온다는 동창들(역시 10년 만에 만난, 친구)을 만나기 위해 다시 장례식장에 갔다.
이날 내가 한 짓 가운데 하지 않아도 될 짓이 있다면 뭘까.
장례식장에서 늦게 나온 데다 극장을 못 찾아 헤맸고, 통로까지 관객으로 가득 찼다. 양 옆으로 사람들과 붙어 앉았는데, 물론 좁고 더웠다. 난 혹시 두어 잔 받아 마신 술 냄새를 풍기지 않을까 공연 내내 쉬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을 마셔댔다. 다시 장례식장에 가야할 줄 알았다면 공연 전에 장례식장을 들리지 않았을 것이나, 공연을 같이 보기로 한 지인(결국 애가 아파 나오지 못한, 여자 선배)과 약속이 있었다.
지나고 보면 그럭저럭 하루를 보낸 셈이나 하루 동선에서 한 가지 경우의 수를 뺐다면 좀 더 수월한 하루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굳이 연극을 보러 갈 필요가 있었을까. 혼자서, 그리고 결과론이지만 ‘故 윤영선 추모 페스티벌’로 열린 공연 <임차인>은 솔직히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내가 자의로 선택한 유일한 일은 연극이었다. 물론 이 역시도 <사색의 향기>를 통해 약속을 한 일이기는 하나, 양해를 구하려면 못 구할 것도 없는 일이다. 나머지는 단단히 부탁을 받았거나 어기기가 힘들거나 애매한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 공연 말고는 난 하루 종일 뭔가를 빚진 계속 신경이 쓰이는, 주인집 눈치를 보는 ‘임차인’ 기분이었다. 그래서 반발심에 부득불 <임차인>을 보러 갔던 걸까. 그러나 정작 임차인(?)이 약속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 객석 상황 등등 ‘임대인’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건 이미 얘기한 바이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하루 일과와 얽힌 사람들 모두 임대, 임차의 관계가 불명확했다.
시간에 쫓겨 물건을 나르는 택배 기사, 친정에 변변히 도움을 못 주는 누나, 토요일에도 사무실에 나와서 기다리는 운영진, 빈소의 빈자리가 부담스러운 상주…. 4편의 단막극으로 구성된 <임차인>의 인물 구도가 그랬다. 각각 2명이 나와 임대, 임차 관계가 명확해 보이는 듯하지만 주로 기억과 추억을 매개로 한 이들 사이의 관계는 비등하거나 수시로 역전이 된다.
임대, 임차라는 관계는 법률상 명확하게 정해진 관계이다. 돈이 오고가면서 심심찮게 분란이 벌어지는 만큼 관계의 위아래, 맺음과 끝맺음이 냉정하고, 보통 2년 터울로 관계를 이어가지만 그 관계란 게 종종 치졸해지기 마련이다. (얼마 전, 친구네 이삿짐을 나르러 갔다가 주인집 아주머니가 농담인지 뭔지, 딱지를 붙여 내놓은 장롱을 보고 “차에 자리 남으면 그 동네에 가서 버리지”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관계에서 소통이 가능하다, 혹은 해야 한다고 말하는 작품이 <임차인>이다. 이 연극은, 그러니까 작년까지만 해도 관객들과 밀접하게 소통을 하고자 왕성하게 활동했던 故 윤영선은 현대인들의 관계가 점차 임대, 임차 관계로 바뀌는 소통 불능의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한쪽의 일방적인 관계조차도 아니면 아예 관계맺음 자체가 두려워하는 현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소통은 서로에 대해 짐작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어쨌거나 서로 부딪혀야 가능하다. 이 연극에서 임차인이라는 의미가 단순히 법률상의 의미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임대, 임차의 관계는 그 최소한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단초가 된다고 보고 있다.
집 주인 아주머니와 셋방 아가씨(이층집), 손님과 택시 기사(택시 안에서), 능력 있는 아내와 시인인 남편(바닷가에서), 떠났던 주인과 버려진 개(동행), 이들 네 쌍의 관계에서도 물질 가치로 환원되는, 혹은 환원되지 못하는 것들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를 전제로 출발하고 그게 갈등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차인은 물론이고 자신 만의 자리,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 임대인 역할들 역시 자기의 ‘공간’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
극 안에서 이런 혼란은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짐 상자’로 표현되는데, 이는 막 도착했으나 풀기 전 상황(셋방), 살지만 정리하지 않은 상황(바닷가 집), 아예 버려진 상황(수몰 지구)으로 그려진다. 무대를 산만하게 펼쳐진 이 상자들은 주로 배우들이 잠시 쉬기 위한 ‘임시 의자’의 대용으로 쓰이는데, 여기서 분명한 점은 '나'를 위해 마련된 공간을 상징하는 장치로써의 ‘의자’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점은 유일하게 상자가 모조리 치워진 무대 위에 ‘의자’ 2개가 등장하는 <택시 안에서> 상황이 잘 보여준다. 운전석과 뒷좌석인 의자들은 그 자체가 이동을 하기 위한 ‘상자’인 택시의 소품일뿐더러, 의자 방향은 중간중간 암전이 반복될 때마다 그 향하는 방향이 갈피를 못 잡고 쉬지 않고 바뀌고, 심지어 기사와 손님 사이의 앉은 거리가 멀찍이 벌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성공’의 아이콘임을 내세우는 아파트 광고와 다르게 ‘집’을 가졌다고 해서 안정과 평안이 보장되지 못하는 이상, 임대인과 임차인이라는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대인과 임차인의 일방적 흐름이 빚은(비극이든, 희극이든) 상황이 소통으로 이어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얘기이고, 설득력이 있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현실적인 의미에서 임대, 임차의 의미가 정해진 시기가 지나면 떠나기 마련이듯 극에서도 한쪽은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동행>에서 앞서 세 편과 이질적인 ‘인간 대 인간’이 아닌 ‘인간 대 개’의 관계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
<동행>은 개와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보다는 관계에서 진정한 ‘소통’을 이룬다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다른 작품들은 제목도 전제하듯 공간의 개념을 명확히 설정한 데 반해 <동행>의 주인공이 있는 자리는 불분명하다. 갑자기 이곳에 떨어진 듯 40대 여주인공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지 못한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일견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허름한 남자(알고 보면 키우던 개, 환희)를 만나는데, 그의 설명을 통해 어렸을 적 살았던 수몰 지구 인근임을 알게 된다. 수몰 지구라는 설정은 매우 중요한데, 이곳은 임대, 임차 관계 설정이 아예 불가능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댐 건설로 인한 ‘공간 해체’로 더 이상 주인이기를 포기한 주인과 주인을 기다리는 개와의 관계 회복은, 소유의 개념이 불분명했던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을 공유하면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 보다는 어느 한쪽이 공간을 소유하는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관계(어린이-개)'였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일임을 보여준다.
허나 ‘포기’가 아니라 ‘불가’한 관계가 과연 인간들 사이에 가능한 것일까. 그리하여 ‘꿈’에서 깨고 나면 한 평도 되지 않는 ‘상자’를 붙들고 자던 자신을 보게 되듯이 <동행>은 나머지 세 편과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소통은 꿈같은 얘기”라는 걸 하려는 듯이 보이지는 않는다. 손쉬운 결말을 내지 않는 대신, 소통을 위한 노력을 제시한다. 연극 내내 간간히 등장하는 대사인 누군지 불명확한 당사자를 가리키는 “걔(개, 게-바닷가에서, 등장)는 어디로 갔을까?” 라고 묻는 순간 3인칭(걔)이 2인칭(개, 게)이 되고 1인칭(환희)으로 바꿔가면서 소통의 통로를 찾으라고 말한다.
이날 난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서로 마주 볼 일이 없을 누군가를 기리는 자리(추모 공연과 장례식)에서, 그들을 떠올렸을 때, 그리고 그들을 위해 모인 사람들과 함께 낯설었거나 오래 묵어 헤진 인연을 다시 이을 수 있었고, 또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 셈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결코 임대인이 될 수 없으며, 언제나 임차인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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