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하지 않은 사람들의 <착한 사람, 조양규>
12년 전에, 임권택의 영화 <축제>를 보면서 장례식은 역시 부재하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아니구나 느꼈다. 스무 살 겨울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 노환으로 좀 고생하긴 하셨지만 다들 “호상”이라고들 했다. 버스기사이던 작은 아버지의 회사 사람들이 몰려왔다. 곧장 자리를 편 그들은 카드 판을 벌였는데, 오가는 돈이 어째 만만치 않다 싶더니만 좀 있으려니 그중 한 명과 작은 아버지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알고 보니 “돈을 잃었으니 상주가 돈을 대라”고 했단다. 나름 장례식이란 엄숙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가 그런 소리를 들으니 기가 차더란 말이다. “저런 상놈의 자식들을 그냥”라고 나는 속말로 했지만, 집안의 장손인 아버지는 겉말로 거침없이 했다.
난처해진 작은 아버지와 두어 마디 주고받다가 쭈뼛쭈뼛 돌아서는 그 양반들 얼굴과 관자놀이와 뒤통수를 180도 돌면서 노려봤는데, 지금 생각하면 괜히 그랬지 싶다. 일껏 남의 장례식까지 와서 노름을 벌이다가 털리고 욕먹는 꼬락서니라니. 더군다나 그 아저씨들은 그날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몰랐던 것이다. 누워계신 할머니가 누군지도 몰랐을 것인데 말이지.
실종된 사람, 조양규
독거노인 조양규는 수화기를 든 채 죽은 지 8개월 만에 동네 주민들에게 발견된다. 그가 남긴 자취는 “집을 불태우지 않는 이상 빠지지 않을” 썩은 냄새와 월남전 참전 용사라는 증명서가 전부다. 그의 죽음은 “집을 태울 수도 없고 해서 화가 난 집 주인” 말고는 아무하고도 연관이 없다. 그는 과연 누굴까, 단서는 40년 전에 월남에서 사망해서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다는 정보뿐이다. 슬슬 궁금해지는 조양규 할아버지의 삶의 이력을 7명의 배우들이 가상의 다큐멘터리 형식(Fake Documentation)을 통해 되짚는다.
‘조 일병, 조군, 조씨, 조형, 간나, 조 기사, 안개, 구름, 파치노 오빠’는 조양규가 68년 월남전에서 몰래 시체에 숨었다가 탈영을 하여 부산으로 돌아오는 화물선을 통해 밀항을 해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20세기 후반부를 살아온 삶의 일부분이다. 사망처리로 존재 증명이 불가능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발소 조수, 하역 조수, 운전수, 스파링 파트너 정도 밑바닥 인생이었다. 그 대신 그는 사회, 정치적인 격동기의 한국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얽매이는 게 없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떠났다는 진술을 한다.
이 지점에서 71년 창경원 40에서 홍학 한 마리를 홀연히 사라진 사건과 겹친다. 날지 못하도록 날갯죽지를 잘라낸 홍학 무리 중에서 한 마리가 솟구쳐 오른 것이다. ‘도주’ 혹은 ‘실종’ 처리된 홍학 한 마리는 더 이상 ‘A-40번’ 따위가 아니다. 조류학자들은 생태 환경이 다른 한국에서는 홍학이 야생으로 살 수 없다고 단정을 짓는다. 하지만 부산의 권투도장, 여수의 홍합공장, 한강 고수부지 공사장 등 드문드문 드러나는 실종자 조양규의 여정이 그렇듯이 그 홍학의 삶을 누가 알겠는가. 자유를 찾아 떠날 용기가 없는 자들의, 혹은 A 따위의 이름으로 남은 홍학들의 시샘 섞인 추측이다.

불행한 사람, 조양규
그렇다면 조양규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자유 = 행복은 과연 명제인가.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흘린 피와 땀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불러왔는가, 물으면 ‘삶이란 단순하지만은 않다’가 대답일 것이다. 허나 어떤 이유에서건, 적어도 조양규가 자유를 포기하고 탈영병 신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이 연극의 전제이다.
그의 말로를 생각하면 조양규 식의 자유가 선택하기 쉬운 결정은 아니다. 죽은 자를 두고 진실이 그의 인생에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짓은 장례식장에서 맏상제 눈치를 거슬려 쫓겨나는 바보짓이나 다름없다. 조양규의 왼손에 꽉 들고 있던 송수화기는 40년 동안 부재자로 살아온 그의 절절한 외로움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미끄러졌을 수도 있고, 장난 전화를 걸다가 제 흥에 겨워 혈압이 터졌을 수도 있고, 살려달라고 119에 전화를 거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행복한 말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허나 수십 년이 지나도록 공사장, 홍합공장, 고물상을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묶여 있는 사람들, 조양규를 기억하는 사람들, 요즘 말로 ‘비정규직’이나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대상자’인 그들의 말로가 조양규보다 나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사실,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조양규가 불쌍한 게 아니다. 코앞에서 배우들이 열심히 보여주는 수십의 인물들이야말로 연극이 보여주는 얘기이다. 조양규의 삶은 현실이 아닌 가짜(Fake)지만, 목격자들의 삶은 진짜(Documentation)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람, 조양규
조양규는 정말 착한 사람인가? 단절된 단편적인 일화만 가지고는 정의로운 구석은 있지만 착한 사람인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죽고 없는 사망자, 존재가 부재한 자, 가상으로 만든 인물을 두고 착하다고 부르건 나쁘다고 부르건 간에 중요하지 않다. 단지, 조양규를 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함께 지낸 자신도 착하다는, 적어도 착한 그와 어울릴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존재 증명을 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형용모순처럼 들리는 이 말은, 똑같이 날개를 잘랐지만 날아오른 A40처럼 날지 않은 홍학들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홍학은 못 나는 새가 아니다. ‘착한’ 대신에 ‘자유로운’을 꾸밈말로 넣으면 연극의 속살이 보인다. “왜 당신은 상상의 누군가를, 조양규를 꿈꾸기만 하지, 현실에서 자유롭게 살려고 하지는 않은가?”
연극 마지막, 그간 실제로 실종 처리된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들을 찾아서 가족의 품으로 보내자는 공익 광고가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자유로운 사람들, 조양규 식으로 말하면 ‘착한 사람들’이 의의로 주변에서 많이 살고 있으니 당신도 용기를 내라는 응원이다.*
사진출처 - 극단 코끼리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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