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외

[Hello! 마임콘서트] 한.일 집시들의 유쾌한 행진

구보씨 2008. 1. 22. 15:49

제가 막 공연을 보기 시작한 2008년 리뷰입니다. 지금도 주머니 사정이야 변한 게 없지만, 2008년에는 대학로를 간다는 게 아예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힘들게 작품을 만들고 무대에 서는 배우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연극 한 편이면 영화 두세 편을 더 본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지요. [헬로 마임콘서트]가 제가 공연을 보게된 가장 큰 계기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가뭄에 콩나듯이 봤던 연극에 비해 마임을 이 작품으로 처음 봤을 때 재미와 놀라움을 잊지 못하겠더란 말이죠. 고재경 씨는 알고 보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임연기자셨습니다. 배우 외에도 연출이나 마임 관련 안무에 늘 이 분 이름을 듣고 보게 되었지요. 그럴 때마다 반가웠던 이유가 바로 이 작품으로 맺은 첫 인연입니다. (당연히 절 모르시겠지만요.) 오래된 블러그에서 몇 편 발견했어요. (흠, 그 당시 리뷰는, 지금도 그리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참 소박(?)합니다.


 

- 갱 안으로 들어가다
지하 1층을 지나, 2층 소극장 안은 특별한 소품이 보이지 않는 
온통 검정색으로 도배된 빈 공간이다. 막 탄광에 들어온 듯 좀 막막한 기분이다.
앞뒤, 좌우 자리가 좁아서 앉자마자 무릎이 쑤신다는 S의 불평 때문에
최대한 자리를 양보한답시고 엉덩이를 하나만 걸치고 앉았다. 
조명이 꺼졌다가 다시 켜지자 한 남자가 앞에 서 있다.

- 갱 안에 갇히다 
고재경, 야마모토 코요 두 마임이스트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마임을 펼칠 때마다
비슷한 듯 색다른 재미가 느껴진다.
뭐랄까, 가난한 자취생이 짬자면을 처음 먹을 때의 만족이랄까? 
암튼 둘은 실제로 지하 갱도에서 일하는 양 땀을 뻘뻘 흘리면서 
원석 같은 재미를 캐내어 관객들에게 디밀었다.
그리고 관객들은 숙련된 광부가 캐낸 원석의 높은 순도에 배떼기 부른
사장처럼 만족하며 낄낄 웃어댔다. 

로베르토 베니니와 채플린을 반쯤 섞어놓은 듯한 일본인 
야마모토 코요는(그냥 야마모토 하면 왠지 개그에서 종종 등장하는 
창씨개명한 할아버지 이름이 떠오른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남녀노소 누구라도 
이해하기 쉬운 보편적인 에피소드들 채워져 있다.

입속으로 계속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객석에서는 잘 들리지 않지만(제대로 들어봐야 일본어겠지만)

그 능청스런 연기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에 쏙쏙 들어올 정도이다.
벗겨진 이마와 얼굴을 보면 연륜이 느껴지다가도 권상우처럼 잘 다져진 몸매를 보면
이 배우의 마임에 대한 열정과 장인 정신이 충분히 엿보였다. 역시 세계에서 통할만한
(적어도 한국에서) 연기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모토가 ‘우승 예상마’라면 그에 비해 젊은 고재경은 ‘다크호스’라고 하겠다. 
특히 얼굴 감정 표현이 정말 탁월해서 입이 딱 벌어졌는데, <살인의 추억>에서
“향숙이?”를 외치는 백강호 역에 고재경이 진짜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얼굴에서 영화에서 본 몇몇과 술집에서 본 몇몇, 그리고 잊었다가 
다시 떠오른 몇몇, 오고 가는 길에 만난 몇몇이 떠올랐다. 
이 말은 정말 칭찬인데 왜냐하면 내가 떠올린 이들은 친숙하고 낯익은 인물이
아니라 어쩌다가 우연히 만난 찰라, 혹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술에 취해 고개를 외로 꺾어 떨어뜨렸을 때, 탑 조명 때문에 생긴 강한 음영 때문인가,

그의 옆모습에서 판화가 최병수의 걸개그림 속 한열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고재경은 팔색조 같은 배우이다.

의자의 무자비하고 난폭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소극장의 장점이랄까, 배우의 방울방울 떨어지는 땀방울과

무대 동선에 따라 훅 끼치는 땀 냄새의 농도가 달라진다.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한 연습과 노력과 진지함이 팍팍 와 닿는다. 
이 정도면 억지웃음이라도 지을 자세를 갖게 된다.
(둘이 함께 펼치는 하모니에서는 다소 본 듯한 연출과 식상한 부분도 좀 있지만

억지웃음을 지을 정도는 물론 아니다.

야마모토는 실제로도 다한증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 갱 바깥으로 나오다 
1시간 30분 동안 엉덩이 한쪽만 걸치고 앉아 있어서 쥐가 난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지하 2층에서 지상으로 나왔다. 
이런 지하의 작은 소극장의 단순하고 소박한 공연에서 캐낸 원석의 힘이 
요즘 뮤지컬 부흥의 첫 시발이지 않을까, 돼먹지 않은 공익광고 같은 뻔한 생각을 하다가
S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 본 소감이 어때?" "더럽네." "일껏 잘 보고 뭔 소리야?"
"그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말야. 정말 열심히 하던데?"
"고작 그거야? 열심히 한다는 거?"
"그리고... 무척 재미있었지."
영화 보러 극장도 잘 안 가는 S가 마임을 보러 왔다는 게 '어디랴' 싶다가 
생각해보니 '재미있다'와 '열심히 한다' 이상의 찬사가 더 필요할까, 싶다.

<Hello! 마임콘서트>를 본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들의 흐르는 땀방울이
느껴진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흐름을 만드는 그들이 지금쯤 지구 어디에서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고 있을지, 그리고 또 얼마나 진화를 했을지 기대만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