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리스의 연인들] 순정과 치정 사이 : 오이디푸스 with 이오카스테

구보씨 2015. 4. 1. 21:02

제목 : 그리스의 연인들(3부작) - 순정과 치정 사이 : 오이디푸스 with 이오카스테

기간 : 2015/04/01 ~ 2015/05/31

장소 : 나온 씨어터

출연 : 송흥진, 민정희, 이 길, 곽지숙, 김승언, 황은후, 강명환, 신안진, 박창순, 강이다, 송은지, 김 정, 김누리, 윤대홍, 민아비

원작 : 소포클레스(오이디푸스)

재구성/연출 : 이수인

기획 : 아트플래닛

제작 : 떼아뜨르 봄날



작년 5월, 이즈음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두산인문극장 연극 <엔론>[엔론ENRON_두산인문극장 2014] 우리는 과연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http://blog.daum.net/gruru/2075 을 본 적이 있다. 이전까지 막을 내려 등퇴장용으로 활용한 좌우 공간을 터서 무대를 객석보다 넓게 벌려서 사용했고, 휴식 없이 120분을 몰아쳤다. (올해 두산인문극장 연극 <차이메리카> 150분 공연 전까지 소극장 공연으로 휴식 없이 가장 긴 공연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엔론>은 미국의 7대 기업까지 올랐던 대기업의 거대 금융 비리를 다룬 작품으로 꽤 인상 깊었다. 연출이 이수인이었다.

 

소극장 무대에 대기업 사기 사건을 다룬다 라, 자칫 익숙지 않은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설명 위주의 지루한 극이 될 여지가 있었지만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은 포기하고, 압축해서 핵심을 콕 집어서 잘 살렸다. 그러니 120분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로봇처럼 혹은 춤을 추듯 배우들에게도 극 전개에 필요 없는 대사, 감정, 동선 따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거슬러 떠올려 보니 2011년에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는 그가 조연출을 맡은 <황혼의 시>3월의 눈雪, 황혼의 시詩_오픈리뷰 칼럼] 장오와 배만의 집은 어디인가? http://blog.daum.net/gruru/1896 도 본 적이 있었다.


 

 

두 작품을 언급한 이유는 오랫동안 인상에 남은 작품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작품 유명세, 완성도를 떠나서 내 성정 때문인지 금세 휘발하는 작품이 적지 않은 바, 특이한 일이다. 이수인 연출이 국립극단 조연출 시절을 거쳐 두산아트센터에서 의뢰를 받을 경지에 이르기까지, 극단 떼아뜨르 봄날을 세우고 여러 작품을 올렸다. 극단 대표로 올리는 작품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니 자유로이 발휘하는 역량을 확인하기에 좋은 기회이다.

 

세 작품을 보면서 느낀 공통점은 공연시간이 길고(엔론 120분) 무난하고(황혼의 시, 90분) 짧고(그리스의 연인들 60분)를 떠나 작품이 간결하고 깔끔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잘 정리한 요약본이랄까. 감정이 넘치지 않고 배우들이 군더더기가 없고 딱 할 말만 한다고 할까. 그렇다보니 2대8 가르마에 감정을 섞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딱 할 말만 하는 은행원 혹은 사채업자 같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기고 연기하는 송흥진은 작품이 다르나 같은 역할을 하는 듯 보인다.

 

한계가 분명한 연기라 해석할 여지가 있으나, 반대로 일정 수준을 넘어선 연기라고 생각한다. 세월을 두고 수백 편의 연극을 보는 동안 송흥진 배우는 오롯이 기억에 남았다. 이수인 연출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싶은데, 주연이든 조연이든 단역이든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 드러내는 배우이다.



<그리스의 연인들> 1부 이아손 역의 손흥진

 

<그리스의 연인들>은 나온시어터 한 곳에서 한 달 동안 세 편의 그리스 희곡을 올리는 극단 프로젝트이다. 나온시어터는 소극장이고, 대학로 공연장 가운데 가장 먼 외곽에 있다. (아마도) 저렴한 대관비를 예상할 수 있는데, 한 달 내내 극단 배우들이 한 극장에서 돌아가면서 배역을 맡고 활용하는 만큼 극단 역량 강화를 위한 쇼케이스 분위기가 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젊은 배우 양성을 위한 과정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연극을 올리는 목적이 분명해 보인다는 게다. 이런 기획은 좋은 선배 배우들이 있고, 무엇보다 원작을 재구성하고 재해석 하는데 자신이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관객 입장에서 보면 맞는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시험을 앞두고 막판에 핵심 강의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리스 연극을 처음 보는 관객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만한 공연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고전으로 제한을 두지 않아도 최고의 연극으로 꼽는 한태숙 연출의 <오이디푸스>(명동예술극장 2011년 1월)를 비롯해 수많은 정통 혹은 변화를 준 작품을 본 관객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그리스의 연인들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버전 ‘오이디푸스 with 이오카스테’는 이수인 연출이 아니라면 내키지 않을 무대였다.



 

‘그리스 비극 <메데아> <오이디푸스> <페드라> 세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인간사의 오래된 주제인 애정과 배신과 복수와 파멸의 모티프가 한 가족사에 어떤 식으로 투영되는가를 비교해서 보여주고자 함이 우리가 이 작품들을 굳이 한편의 연작 시리즈로 묶어 상연하려는 의도이다.’ - 작품 소개 중


소개에서 보듯 이수인 연출은 대한민국 TV드라마의 필수 요소인 이른바 ‘막장’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 희곡을 체에 걸러 원하는 재료만 남겨 두었다. 의자만 놓인 무대, 배경, 의상, 소품 등 무엇 하나 알고 보지 않는 한 그리스 희곡이라고 짐작할 만한 여지가 없다. 공연 내내 등퇴장 없이 무대에 옹기종기 앉았는데, 그 중에는 기타, 첼로 연주자를 각각 두고, 코러스까지 두었다.

 

무대를 빙 둘러 앉으니 동선이 나오지 않는다. 앉았다 일어서서 세 걸음 범위 안에서 연기를 하는데, 비극미를 확장하기 위해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의 정사 장면을 약식으로 선 보이는 정도이다. 대사 중간 중간 유행가 가사를 섞는 등 지뢰처럼 장치를 해놔서 (개인적으로 변사를 떠올리게 하는 재밌게 본 부분이다) 엄숙하고 비장한 그리스 비극인가 싶지만 암전도 필요 없고, 무대 위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갖췄으니 형식은 그리스 야외무대 아크로폴리스의 재현, 세계에서 가장 작은 초超 축소판 응축 버전이다.



 

구성이 파격적인가 싶지만 뼈대가 되었건 혹은 화장이 되었건 원작과 일정 거리 이상 벌어지지 않는 경계를 영리하게 유지하는 셈이다. 제작비 등 여건을 고려한(고려했을) 구성이든 철저한 기획이든 소속 배우들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면, 다시 말해 배우들이 소화하지 못하면 어색한 코미디가 될 확률이 높다.

 

공연 첫날 젊은 배우들 입에 아직 대사가 잘 붙지 않고, 이오카스테 역 곽지숙 배우가 극 초반 앉아 있으면서 사례가 들려 고생을 했지만 그러려니 감내할만 했다. 여러 우물을 파지 않고 선택과 집중을 확실히 하니 관객들도 마음이 편하다. 예전 작품을 다듬기도 하고, 새로 추가하기도 하면서 세 편 연작으로 묶은 <그리스의 연인들>은 극단의 레퍼토리로 남을 터인데, 기회가 된다면 공연이 길지 않은 이상 휴식을 사이사이 두고 한 주제로 묶은 세 편을 연이어 올리면 어떨까 기대한다.

 

그러면 지금 기준에서 보면 다소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할 수도 있는 신의 지나치고 일방적인 개입 혹은 신탁에 빗댄 핑계를 들어내고 사람과 사람 사이, 2500년 전으로 세월을 거슬러 멀리 떨어진 반도의 작은 나라 관객들이 봐도 쉬이 이해할만한 다소 비굴하고 야비해 보이기도 한 솔직한 본성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 극단 떼아뜨르 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