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분노의 포도 - 앙코르 산울림 고전극장
기간 : 2014/07/18 ~ 2014/07/30
장소 : 소극장 산울림
출연 : 최현미, 윤정욱, 도창선, 이중길, 김승준, 송영미, 류성국, 안진혁, 이빛나, 장은주, 이봉하, 김기일
원작 : 존 스타인벡
연출 : 오세혁
주최/주관 : 소극장 산울림
제작 :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
연극이 끝나고 객석등이 들어오고 보니 내가 앉은 객석 바로 뒤가 조정실 겸용 자리였고, 오세혁 연출이 스태프와 쪼그리고 앉아 조명과 음향을 다루고 있었다. 재기발랄한 젊은 연출가, 오세혁에 대한 인상은 그렇다. 명랑만화 주인공을 닮은 생김새도 그렇고, 작품도 가볍지 않아도 가볍게 젊은 관객 입맛에 잘 맞추는 재주가 딱 프랜차이즈 체인사업을 하는 젊은 분식점 사장처럼 보였다. 극장 밖으로 나오니 관객들과 배우들 사이에서 언제나 그렇듯 눈에 익은 페도라를 쓴 그가 있었다. 참 알토란같은 연출가이다.
오세혁. 극단 걸판의 배우, 작가. 2011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동시 당선 (서울신문에 ‘아빠들의 소꿉놀이’,
부산일보에 ‘크리스마스에 삼십만원을 만날 확률’) 존경하는 인물은 찰리 채플린. ‘채플린 깊이보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쉬지 않고 연극을 올린다는 정도는 알았지만 벌써 고전까지 도전할 줄은 몰랐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라면 고전이라는 부담도 있고 해서, 자칫 즉 도식적인 결론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좋으나, 어떻게 1930년대 미국 대공황시대 농촌 문제를 2014년 서울 한복판에 연착륙을 시킬지 궁금했다. 게다가 이런 표현이 참 황당하다는 걸 알지만, 기회를 못 잡은 또래 연극인 중 누가 보면 오세혁 자체로 이른바 제약과 제한이 있고, 정치와 알력과 인맥으로 뭉친 연극계 지원 시스템에 대항하는 대신, 누구보다 잘 적응해서, 잘 이용하는 경우가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장소가 산울림소극장이다. 관객의 눈으로 보면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몇 안 되는 명소로 역사적으로도 보존가치가 높은 멋들어진 곳이지만, 연출가 시선에는 매력적인 공간만은 아닐 것이다. 반원형 돌출 무대는 극장 말고 용도 변경이 불가능하게끔 설계한 임영웅, 오증자 부부의 깊은 뜻이 있었으나 100석 규모로 사각이 없는 소극장에 어울리는 구조가 아니다. 세트를 세우기가 애매모호하고 동선을 넣기도 마찬가지다. 1인극을 하기에는 딱 좋지만 12명이 등장하는 무대치고는 좁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이래저래 기대와 우려가 오가는 가운데 극장으로 들어갔고, 나왔다. 오세혁은 영리하다. 아이디어도 좋지만, 원작을 줄이고 편집하는 데에도 주저가 없고, 우려가 될 만한 부분을 과감히 밀어붙이기도 한다. 객석 등이 꺼지면 12명배우가 반원 무대 끝에 객석에 바싹 붙어 서서 감정을 끌어올리면서 뿔난 황소처럼 온몸으로 씩씩대고 노려본다. <분노의 포도>에서 분노를 초장부터 다 보여준 셈이기도 하고, 결론이기도 하다.
좁은 무대에 12명이 서니, 중극장이라면 얻기 힘든 응집 효과가 제대로 드러나고, 어차피 움직이지 못할 상황이지만, 세월호 참사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위 현장이 그렇듯 바리게이트에 막힌 듯, 극장에서는 무릎이 서로 닿을 객석에 막힌 그 분노가 폭발 직전까지 확 끓어오른다. 자, 극이 시작할텐데 무대 앞 객석이 바리게이트라면 우리는 단순에 비유하자면 시위를 막는 의경으로 신분이 바뀐다. 알다시피 극중 대사처럼 땅을 뺏는 원흉이 자본가→지역은행→중앙은행→세계은행으로 확장하듯 원흉은 대립하는 그 현장과 수만 리, 아예 다른 세상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작은 극장에 비좁게 마주 앉은 관객은 의경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막고 선 청년들 역시 몇 년 전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처지였고, 신분은 학생이든 비정규직이든 그닥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의경에 빙의가 된 관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극장 밖으로 나가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야 한다. 고전하면 난해하다고만 생각하나 참 이해하기도 쉽고 팍팍 와 닿는 연출방식이다.
오클라호마에서 대대로 농사짓고 살던 조드(Joad) 가족이 극심한 불황과 모래바람에 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은행에 땅을 빼앗기고 선택한 캘리포니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떠나는 여정은 참 기고하다. 각목을 잇대 만든 조립식 소품은 침대도 되었다가 트럭으로 변신하는 등 트랜스포머이다. 고단한 여정을 표현하기 위해 바가지를 씌우는 야박한 주유소 직원들을 표현할 때 머리에 써 붙인 빵, 타이어, 기름은 아동극에서나 볼 법하다. 하지만 벌어지는 상황이 웃음과는 거리가 먼 기구함이 절절 묻어나온다.
지루할 틈 없이 전개가 빠르다. 배우들은 암전이 아닌 연기를 하면서 세트를 조립하고 분리한다. 지루해지는 순간, 동선보다 대사 위주의 공연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맘 놓고 치고받을 공간도 없으니, 배우들은 쉴 새 없이 등퇴장을 반복한다. 이런 연출 방식은, 앙코르 공연이므로 다듬어진 형태일 텐데도 거칠고 산만하다. 또한 빠른 전개와 일종의 서사극 운용은 가족의 죽음에 대한 애도나 가난이 빚은 참담한 현실에 대한 애절함을 느낄 새도 없다. 자칫 연출의 해석한 만큼만 보여주고 싶은 의도로만 일방적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연기력이 좋은 배우들이 조드 일가의 중심축을 잡고 갑작스러운 암전, 그리고 놀랍도록 작품과 잘 어울리는 할리우드 서부극 효과음과 비슷한 고음의 음악 덕분에 긴장감이 가면 갈수록 올라간다. 무엇보다 빠르고 거침없이 이 작품이 세밀하게 접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조드 가족과 갈등을 벌이는 이른바 중간 관리자, 하청업자들과의 관계이다. 일종의 악역들로 보통 갈등을 올리기 위해 특정 배우가 맡기 마련이지만, 1인다역으로 처리하고, 세쌍둥이로 분한 1인3역은 코믹하기도 하다. 즉 이렇다 할 캐릭터나 동기부여가 없는 그들이 대립각을 세울 특정 대상이 아니라는 게다.
그래서 갈등은 대거리를 하다가도 대부분 서로 이해하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 조드 가족이 볼 때 그들이 밉지만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고, 중간관리자가 보기에 조드 가족을 비롯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어서, 물건 값을 깎아주는 식이다. 오세혁이 이끄는 젊은 극단 걸판의 <분노의 포도>가 현실과 괴리감이 없는 이유가 갈등이 맞물리는 교집합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 현장에서 끌려와 방패막이로 선 의경과 싸워봐야 뭐할 것인가 말이다.
큰 아들 조드는 참다 참다 살인을 저지르고 가족을 떠난다. 쫓기는 신세인 그는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도는 가족을 두 번 다시 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집안의 중심인 어머니에게 ‘늘 곁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도 아들을 이해하고 슬픔대신 기꺼이 보낸다. 상투적인 결말이지만 감정적으로 객석 역시 달아올라 비장하게 보인다.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배우들은 객석을 쏘아본다. 시선은 아마도 출입구를 향한 듯하다만 정확하지는 않다. 관객 앞에 툭 하고 공을 넘긴 게다. 감정에 치우친 선동극이라고 불릴 여지도 있고, 클리셰의 반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힘이 넘치는 젊은 극단이 다소 소모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힘을 정확하게 어디로 쓸 줄 안다는 점은 이 시대에서는 칭찬할만한 미덕이다. 젊은이들이 힘을 어디에 쓸 줄 몰라 엉뚱하게 발산하거나 제풀에 힘이 빠지는 시절이고 보면 말이다.
최현미. 극단 걸판의 대표이자 배우, 작가.
2011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에 ‘팬티하우스 블루스’로 최종심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어머니 역 최현미 배우의 연기는 우리극연구소 시절, 연희단거리패에서 이오네스코의 <수업>에 단역인 하녀로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배우로 타고난 아우라가 있다. 연희단거리패 김소희 배우를 가장 많이 닮은 배우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힘을 뺄 줄도 아는 주목할 만한 배우이다.*
사진출처 - 극단 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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