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
기간 : 2014/07/12 ~ 2014/07/19
장소 :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출연 : 오순택 외 31명
희곡 : 토마스 베른하르트
연출 : 이윤택
주최 : 셰익스피어협회, 충무아트홀, 연희단거리패
낯선 이름이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어디선가 봤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로 나온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오순택 씨는 007을 돕는 영국 정보부의 홍콩요원으로 등장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뮬란>에선 뮬란의 아버지 역으로 목소리를 빌려줬고 <에어울프>, <맥가이버>, <쿵후>, <마르코 폴로> 등 국내 방영됐던 미국의 TV시리즈에서도 동양인 조연으로 빈번히 출연했다. TV나 영화에서 이름을 떨칠 배역을 맡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흑인과 백인의 키스조차 금기였던 시대에 피부색이 노란 남자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의 국적은 사라졌다. 할리우드에서 오순택은 중국, 일본, 한국, 홍콩 등 몇 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동양인 배우일 뿐이었다. - 씨네21, 2002-06-07 ‘할리우드의 한국인 배우 오순택의 연기 인생 40년’ 인터뷰 중에서
기사는 오순택이 연기에 대한 열정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놓치지 않았다는 상찬으로 마무리한다. 그가 그러나 한국 관객들은 그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기사에 언급한 정도가 조연 혹은 단역으로 나와 알 법한 정도이고, 대부분 작품은 <비버리힐스 닌자>, <거리의 심판자>와 같은 B급 액션물이다. 물론 주연은 아니다. 59년, 가난한 조국을 뒤로하고 미국을 건너한 젊은 오순택에게 애국심이 있었을까. 당시 깡패가 만드는 주먹구구식 한국 영화계에 대한 실망 혹은 멸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연극학교와 UCLA 대학원을 나왔지만 보란 듯 성공하지 못하고 국적이 없는 단역 배우 처지인 자신이 더 비참하지 않았을까. 글쎄, 모를 일이다. 냉정하게 말해 그가 나온 영화를 볼 일도 없고 그가 어떤 생각을 했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007시리즈 9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 1974)
연극을 처음 볼 때 어려운 점은 영화를 볼 때 대략 기준이 되는 ‘제작, 연출, 배우’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학로에만 매일여러 편이 올라가는 셰익스피어 등 유명작가의 원작만 믿고 보기에도 그렇다. 이러나저러나 연극을 보다보면 각자 안목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 경우 배우에 주목하는 편은 아니나 예전이라면 지나쳤을 영화 속 단역을 보며 반가워할 때가 있다. 연극에서 봤던 배우들이다. 단역으로 등장한 그가, 소극장에서 신들린 연기를 한 이상 영화나 드라마에서 단역을 맡았다고 단역 인생이 아니라는 걸 안다. 작은 배우가 있을 뿐 작은 배역이 없다, 는 말은 연극에서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다.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는 제자들이 만든 오순택 헌정 공연이다. 한국에 돌아와 제자를 양성했던 시기 그 밑거름이 열매를 맺은 경우이다. 내가 보러간 날 연희단거리패 김소희 대표가 매표소를 지켰다. 그녀 말고도 연희단거리패 젊은 후배들이 같이 있었다. 김소희 대표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면면을 보니 로비 한가득 배우 천지다. 헌정공연답게 오순택을 제외하고 극중 모든 배역이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배우들이 31명이다. 연출과 총괄 기획을 맡은 이윤택은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기획과 맞물려 작품 지원을 받아냈다. 작품 속 주인공 늙은 배우 미네티가 리어왕을 고전문학의 최고라고 추켜세우고, 그 역할을 다시 맡고자 30년을 기다렸지만 냉정하게 셰익스피어를 기리는 작품으로 적합한지는 모르겠다.
그는 주로 이렇게 서서 연기를 했고, 대사를 치기에도 버겨워보였고, 주위에서 후배들이 꾸미는 식이었다.
하지만 삶이 그렇듯 연기란 게 늘 뛰어다니지만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오순택에 대한 감회가 아니라면 작품은 지루하다. 헌정공연이 그렇듯 밀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공연을 시작하기 전 객석에서 무대로 등장하는 첫 장면을 위해 손녀뻘 앳된 젊은 여자 후배가 그를 부축해 객석 맨 앞자리까지 인도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배우는 무대 위에서 대사를 제대로 칠 여력이 없을 만큼 힘이 벅차다. 사무라이 복장에 칼을 휘두르던 할리우드 액션배우 오순택은 더 이상 카메라 앞에 설 수 없지만, 몸의 예술이고 시간의 예술인 연극은 역설적이게도 노인이 된 허옇게 센 머리처럼 삶 자체를 포용한다.
극중 미네티는 좀 더 기대에 벅차도 좋을 뻔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는 극단대표를 기다리며 초조해도 좋을 것이다. 오순택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다. 극이 어쨌든 무대 위에는 오순택이 있다. 그런데 잔잔한 듯 표정이 거의 없고, 몸짓도 둔한, 뭔가 연기를 맡기에는 버거운 극중 오순택도 ‘미네티’의 한 모습처럼 보인다. 30년 동안 리어를 연기하기 위해 강박에 빠졌다가 드디어 무대에 설 기회를 얻기 직전까지 왔지만 비극적 결말을 알고 담담히 기다리는 모습으로 새로운 해석의 미네티일 수도 있다.
2013 인천아트플랫폼 연극<처용, 오디세이> 네메시스 역으로 출연한 백현주 배우
그럼 점에서 연기를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도 좋겠다 싶었던 백현주 배우는 늘 억척스러운 역할만 맡았던 그녀 특유의, 고유의 연기를 선보였다. 작품을 여는 술 취한 주정뱅이 역할이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보기 좋은, 헌정의 의미가 절절하게 묻어나오는 대목이었다. 김소희 대표와 역할을 나누는 이상 김소희와 비교되거나, 그녀의 연기에 함몰되기 쉬운데, 내공만큼은 역시 누구 못지않은 게다. 한편으로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 처연하기도 한 광대 모습 그대로인 백현주 배우가 스승인 오순택이 객석에 앉아 바라보는 앞에서 진정한 헌정이 무엇인지 일깨운다. 오스트리아 바닷가마을 호텔 로비에 오순택과 백현주가 있으니 그곳이 곧 극장이 된 듯하다.
노배우를 배려해서일까, 1시간 10분 쯤 짧게 연극이 끝났다. 옆 자리에 앉은 일행 서넛 중 한 명이 소리죽여 울었다. 극장에 불이 켜지고 보니 내 옆에 앉은 관객은 이후 무대에서 설 예정인 배우였고, 아마 울음을 터뜨린 그녀도 배우였을 것이다. 그가 등장한 영화는 더 이상 극장에 걸리지도, 이른바 마스터피스에 꼽히지도 않을 것이다. 작은 배우는 있어도 작은 배역이 없다는 속설은 오순택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작은 배우도 없고 작은 배역도 없고, 그저 가장 행복한 배우가 있을 뿐이다.*
사진출처 - 연희단거리패, 극단 수수파보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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