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성인연극 [헤르메스HERMES] 헤르메스, 허메스 그리고 에르메스

구보씨 2014. 2. 4. 16:02


이른바, 화이트칼라 악인 연기가 뭔지 알고 싶다면 김영필 연기를 보라


제목 : 헤르메스HERMES

기간 : 2014/02/04 ~ 2014/04/30

장소 : 나온씨어터

출연 : 이승훈 , 김영필 , 강말금 , 이안나 , 김유진 , 이한님 , 김보희, 이재훈, 김문성

작/연출 : 김태웅

제작 : 극단 우인, NAMGUN



연극이 영화보다 낫다. 연극 <이>가 원작이지만 대부분 그렇듯 영화 <왕의 남자>를 먼저 봤다. 그런데 이 정도 작품이면 해외 공연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다음에 무대에 한정한 연극을 볼 때 실망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애초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도 그 만듦새는 빼어났다고들 했다. 연극은 영화보다 거침이 없다. 빠르고, 직설적이며 우직했다. 돌아가는 법 없이 관객을 끝까지 몰아붙였다.

 

연극 <헤르메스>는 개요만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자본에 몸과 영혼을 판 예술가라, 희곡 자체로 묵은 작품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소극장 연극이라는 점도 그랬다. 넓은 무대에서 확 내지르는 작품을 보길 바랐다. 또 비슷한 콘셉트 작품이 없지도 않다. 그래도 작가이자 연출인 김태웅을 무시하기에는 연극 <이>의 기억이 세게 남았다. 그리고 열연을 펼친 인상파 배우인 이승훈, 이재훈이 나온다니 관심이 가는 작품이다.

 


 

성인 연극 제작 현실을 향한 비판이라, 외연에서 김태웅이 겨눈 곳이 공연장에서 멀지 않다. 나온씨어터에서 1km 쯤 떨어진 소극장에서 성인 연극이 동시간대 공연 중이었다. 이 작품도 19금을 들고 나왔으니 성인 연극이란 이래야 한다고 가르치려는 의도일까. 성인 연극이 벗는 연극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걸까. 아무려나 동시대 연극계 풍토를 풍자하는 메타 연극이라고 볼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헤르메스가 누는 가늠자에 좀 더 선명하게 들어오는 타깃은 이른바 연예 기획사라고 보는는 게 맞다. 주인공 남 건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벗는 배우로 무대에 서거나, 여배우를 벗겨 눈요깃거리로 만들자는 게 아니다. 오직 돈이 목적이니 다단계판매든 부동산 투기든 상관없다. 성인연극이 아니라 연예기획사를 차릴 재주만 되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연예기획사를 차리고, 지망생에게 돈과 몸을 뜯은 사례는 기사거리도 아니다. 하물며 연예인과 기획사 사이, 기획사와 제작사 사이 고소 고발 비방은 다반사다. (참고로 4월 현재 16살 배우를 사이에 두고 기획사와 제작사가 겹치기 출연 계약을 두고 서로 탓하는 기사가 떴다. 웃기는 건 두 곳 모두 배우의 미래를 망치느니마니 하는 소리는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보도자료를 뿌리고, 변호사를 끼고 법정 다툼을 벌이면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아귀다툼을 하지만, 남 건은 과거의 양심이 파란만장한 앞길을 막는다. 그는 시청 광장 앞 더플라자 호텔(위치 상 아마도) 펜트하우스에 장님 안마사를 불러 몸에 똥을 싸달라고 돈을 뿌린다. 이른바 똥물세례로 자괴감에 미칠 지경으로 변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식이다. 이런 행동 역시 일종의 카타르시스(배설)라 섹스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칫 뻔히 속이 보이는 구성일 수 있으나 김태웅 특유의 무당 연출이랄지, 미친 존재감을 보이는 배우들이 상쇄를 한다. 이 작품에서는 속옷 정도 뿐 노출이 없다. 성교는 암전 처리한다. 80년대 방화도 아니고 웬 페이드아웃인가 싶지만 막상 극을 보고 있으면 <헤르메스> 특유의 박자와 분위기에 취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심지어 대본으로 읽으면 오글오글할 법도 한 남 건의 고민이나 내뱉는 대사가 21세기 한국에 발현한 햄릿의 그것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애초 눈에 보이는 타깃인 대학로 성인연극 논란은 들어오지 않는다. 이 작품은 장님 안마사 역을 맡은 강말금 배우를 제외하고 이중배역을 썼다. 남 건 역 이승훈 배우는 익히 연기 잘 하는 배우로 다 아는 이다. 연극 <이> 공연마다 장생 역을 도맡고, 영화에 조연인 팔생 역으로 나왔다. 허나 내가 본 <헤르메스>는 김영필이 남 건으로 나왔다. 공연보기 앞서 팸플릿 프로필을 보니 나왔다는 영화는 아예 본 적이 없고, 연극은 본 작품이 여럿인데 기억이 없다.

 


 

이승훈은 두 차례 <이>에서 연기를 봤고, 또 새로운 배우 연기를 보길 즐기는 편이라 상관없다만 무게감이 쏠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그럴 수도 있는데, 팸플릿 배우 순서 배치상 내가 보러간 날은 모든 배역이 그랬다. 부러 고르려고 해도 고르기 힘든 카드를 고른 셈이다. 그런데! 어쩌나 이날 안 봤으면 싶게 밋밋하고 순하게 생긴 김영필이 헤르메스로 활활 불타올랐다. 반전의 매력이랄까, 안 그럴 것처럼 생긴 놈이 그러니 더 양아치 같아 배신감이 철철 끌어 오르는 식이다. 역으로 김영필이 이 정도니 이승훈은 어떨까, 하는 심정이 들어 다른 캐스팅으로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 개성 넘치는 외모 못지않게 연기로 한 몫 하는 이재훈 대신 나온 김문성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1인 다역이 캐릭터를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다고 할까. 그래서 역으로 이재훈 연기 역시 보고 싶긴 마찬가지다. “말들의 무덤인 희곡에 영혼을 담아준 배우”라는 연출의 글이 실감이 든다.

 

창문 아래 시청 광장에서 보이는 촛불의 물결을 보면서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20년, 내려가는데 3초”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은 자가 촛불을 들 수 없듯 더 이상 촛불을 들 수 없다는, 정의로운 신념으로 행동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자조적 독백이다. 그래서 극 중에서도 자살하지 않고, 자살할 필요도 없다. 광장으로부터 그는 죽은 자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산 쇠고기 파동 당시 광장 촛불은 정당한 요구로 당위성이 있지만 소비자운동으로 제값을 주고 제대로 된 물건을 사자는 논리지 자본에 역행하거나 저항하자거나 미국산 쇠고기는 안 된다는 논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극중 남 건이 속했거나 그리워하는 당시, 짐작하건대 80년대 학생 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했던 시절에도 정치적으로 순수했을지언정 헤르메스(상인들의 신)가 될 여지가 없었던 건 아니다. 연출의 말을 보면 의도가 달라 보이지만 말이다.

 


 

이 작품이 19금이라면 옷을 벗는 노출보다는 숨기고 싶은 가슴 속 어두움을 도려내 객석에 던지는 데에 있다, 고 기대했는데 도려낸 살코기가 피를 뿜는다. 한국에서 어느 세대보다 빠르게 돌변해 자본숭배를 하고 있는 40~50대가 봐야할텐데, 본다고 뜨끔은커녕 찔끔이나 할는지 모르겠다.

 

제작자가 배우로 나선다는 설정이 자린고비라서가 아니라 자지고 똥구멍이고 다 까놓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 그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참고로 극중 인물들은 나이와 세대를 불문하고 헤르메스와 혈연이다. 급여 인상을 요구했다가 내쳐지면서 자살한 여배우 사례는 일자리를 두고 생기는 현실의 세대 갈등의 결과로 볼 수도 있지만 멀리 간 해석이다.*

 

 

 

사진출처 - 극단 우인

 

채널예스 김태웅 연출가 인터뷰 “내 몸에 똥 좀 싸주세요” http://ch.yes24.com/Article/View/24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