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당통의 죽음
기간 : 2013/11/03 ~ 2013/11/17
장소 :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출연 : 박지일, 윤상화, 이자람, 문형주, 최지영, 서광일, 임진웅, 김준호, 조영준, 이재준, 조장연, 이후성, 양원석
작창 : 이자람
희곡 : 게오르크 뷔히너
각색 : 안드라스 비스키
번역 : 김철리
연출 : 가보 톰파Gabor Tompa
협력연출 : 이곤
기획/제작/주최 : 예술의전당
공연이 끝나고 한 달이 흘렀다. 그 사이 난 스무 번 쯤 연극과 무용과… 극장을 찾았다. 쉬이 잊히는 작품이 있고, 잔상이 긴 작품이 있다. ‘당통의 죽음’은 그 중간쯤에서 좀 더 후자 쪽에 있다. 물론 내 주관적 판단은 참고 사항일 뿐이다. 잔상이 길게 꼬리를 드리웠다는 의미는 호의적인 경우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제발 잊었으면 하지만 잊을 수 있는 기억이 그렇듯 말이다. 이 작품이 엉망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볼 것이다.
2013년 초, 재개관 공사가 끝난 뒤 토월극장에 처음 발을 디뎠다. 지금은 CJ토월극장이라고 부르는데 이름을 두고 말이 많았다. 토월이 의미하는 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 조직한 신극운동단체 토월회(土月會)에서 따왔고, 현실(흙)에 발을 딛고 이상(달)을 추구하겠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란다. 671석에서 1030석으로 늘리는 공사대금 150억을 CJ가 댔으니, CJ씨어터가 될 뻔한 게다. 연극인들이 반발을 해서 얼추 타협을 한 셈이다.
글쎄, 이렇게라도 이름을 지킨 일은 다행이다만, 그 전에 이름에 걸맞게 토월극장이 그럴만한 연극들로 채워졌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눈여겨 볼 좋은 작품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관 위주의 경영으로 인해 기획작 빈도수가 적었고, 이름값을 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수익을 위해 뮤지컬 전용 극장을 만들고, 이름을 내주려 했던 일보다 앞으로 예술의전당이 고민하고 반성해야할 이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과거는 과거이고, 운영 주최가 휙휙 바뀌는 이상,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대관 사업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계획이 중요한데, 행보를 지켜봐야 알 수 있다.
개관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싶은데, 맞붙은 오페라극장이 공사에 따른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진행 하려면 일정 맞추기가 만만치 않았을 게다. 뮤지컬 열풍에 판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의도치 않게 여기저기 뮤지컬 전용 극장이 들어섰다. 것도 리뉴얼이 아닌 신식건물이 지하철역을 끼고 여기저기 들어섰으니, 규모, 위치, 시설 등등 CJ나 예술의전당의 야심찬 의도는 어정쩡한 모양새가 됐다. '살짜기 옵서예'가 CJ e&m이 ‘46년 만에 새롭게 리메이크된 국내창작뮤지컬 1호’라는 수석어를 내걸고 이런저런 구설수를 덮으며 개막작으로 올랐지만 그 의미만 남았다. 애초 뮤지컬을 보는 대다수 젊은 관객층의 취향과 거대 자본을 투자한 이상 흥행을 우선한 한국 뮤지컬 문화에서 ‘살짜기 옵서예’가 정말 살짝 오고 만 결과는 예측가능했다.
‘당통의 죽음’ 얘기를 두고, 갑작스레 이런저런 사설이 길게 붙었다. 이유가 있다. 류마니아 연출가 가보 톰바가 유럽의 유서 깊은, 그러니까 오래된 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다가 뮤지컬 연출이 가능한 CJ토월극장이 신통방통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게오르크 뷔히너가 쓴 ‘당통의 죽음’은 작품 자체로 뜨거운 혁명 열기 속 아수라와 정치 같은 상황을 무채색 유리창을 활용한 미니멀한 무대와 어둑한 푸른 조명으로 차갑게 블랜딩을 했다. 그리고 21세기 한국식 문화를 실험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라, 열기의 중심 격엔 군중을 이자람의 판소리 독창으로 누그러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뀐 CJ토월극장이 보여줄 수 있는 무대연출의 가능성을 죄다 실험하고 도입했지 싶다. 프랑스혁명의 대표적인 인물 둘을 21세기 한국 무대 위로 불러와 벌이는 굿판이 나름 재미지지만, 잔상으로 짙게 남은 인상은 뮤지컬 전용 극장을 염두하고 지은 극장이라 무대 세밀하고 오밀조밀한 오르내림을 비롯해 세부 조작이 가능할 정도로 극장이 참 이런저런 장치도 많고 세련되고 현란하다는 것이다.
가보 톰바는 무대 장치를 큼직하게 쓰는 한편 탁자, 침대 등 조밀하게 공을 들이면서 정작 그 위에는 배우 한 명만 남겨둔다. 애초 영화 레미제라블처럼 떼창을 위해 쓰일 여러 장치를 가지고 놀되, 역으로 기름기를 죄다 뺀 셈이다. 예술의전당 자체 기획작으로 외국인 연출가를 불러 당통의 죽음을 선택했을 때에는 스펙터클한 무대를 기대했을지 혹은 아닌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국내 연출가였다면 역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연출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보 톰바의 ‘당통의 죽음’은 그의 말처럼 적어도 35명의 배우가 필요한 당대의 시공간을 재현하는 대신 14명이 등장하는 “인간 딜레마의 최첨단 미로”를 보여준다.
그럼 가보 톰바의 말처럼 현실 자체가 혁명인가, 예술 분야에서 고루하다 싶은 주제이나 영원히 뗄 수 없는 양면이기도 하다. 혁명과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사료에 근거해 기록극, 역사극이라 불리는 이 작품은 현실인 동시에 늘 번질 수 있는 그 가능성에 중심을 둔다. 그러나 중심에 반영웅인 관용주의자 당통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광기를 경계한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말처럼 ‘쾌락만 추구하고 부도덕하고 타락한 혁명가’일 수도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체로 공포정치의 괴물이라 불릴 만 했으니 말이다.
지금 둘 중 누가 필요한 시점일까. 나에게 <도살장의 시간>으로 기억이 남은 박지일(당통)과 이제야 중심에 서기 시작한, 사랑하는 배우 윤상화(로베스피에르) 대립 사이 군중을 압축해 독무를 벌인 이자람이 또렷하게 삼각 구도를 이룬다. 보기도 좋고, 이해하기도 좋고, 작품과 헛도는 듯 묘수와 같은 연출이지만 흩어지지 않는 의지가 이렇게 몸을 이뤄 구도를 이룬다면 누군들 시민들의 맘을 얻으려고 경계하지 않을 것인가. 이자람으로 응축한 군중 심리는 말 그대로 이상향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극중 누구의 편을 드는 건 아니다. 다만 과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않는 이상 관용보다는 원칙에 살짝 치우칠 수 있다. 상징으로 봐서 그렇다.)
여기가 프랑스도 아니고, 지금 이 시대 필요한 건 원칙인가, 관용인가. 상식에 반하는 일들이 특히 정치와 경제의 실권을 쥔 자들의 자체 원칙을 내세우는 이상 오염되지 않은 원칙과 이성이 좀 더 필요하다. 대관 공연이야 어쩔 수 없지만 이름에 어울리는 좋은 기획작이 꾸준하게 오르길 바란다.*
사진출처 -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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