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가을반딧불이] 따뜻한 호떡의 익숙한 그맛

구보씨 2014. 2. 7. 10:02

제목 : 가을 반딧불이

기간 : 2014/02/07 ~ 2014/03/02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 이항나, 김정호, 이도엽, 배성우, 김한, 유승락, 이현응

극작 : 정의신

연출 : 김제훈

제작 : 조은컴퍼니

 

정의신 희곡은 호떡 반죽이다. 누가 굽느냐 따라 때로 타기도 하고 때로 덜 구워져서 반죽맛이 그대로 이기도 하지만 달인이 아니어도 서민의 사랑을 받는 수준의 호떡을 만들 수 있는 반죽이다. 그리고 호떡은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다.

 

<가을반딧불이>는 2013년 6월 초여름에 초연을 올리더니 6개월 만인 2014년 2월, 같은 극장 무대에 다시 올랐다. 반년 만에 재공연이라니, 전용극장을 운영하지 않는 이상 연극 제작 시스템을 고려하면 쾌속 행보이다. 짐작하자면 초연 때 공동주최로 참여한 한팩HANPAC, 한국공연예술센터(올해 이사장 교체 후 영문 이름이 바뀌면서 더 이상 한팩을 쓰지 않는다.)가 호평 이후 2014년 라인업에 바로 올린 듯하다. 헌데 이번 공연에서 예술센터는 주최에서 빠졌다. 요 사이 정치뉴스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이전 이사장(?) 힘빼기가 아닐까, 억측이 든다. (망할 놈의 한국 정치 트라우마라니)

 


 

본론으로 와서 정의신은 연극계에서 ‘용감한형제’쯤 된다. 생김새나 연배가 조용필 급이지만, 생김새도 비슷하지만 나이, 생김새, 취향, 성격과 하등 상관없이 핫! 하다 점에서 그러하다. 국내외, 시대를 막론하고 한국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오르는 희곡작가이다. 재일동포로 이 정도 환호를 받은 이가 있을까. 재일본 한국인들의 문제 외에도 주로 서민들의 삶을 미시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작품은 희곡으로 읽어도 쉽고 재밌게 잘 읽을 수 있다.

 

김제훈 연출은 <가을반딧불이> 초연 때도 그랬지만 이번 공연도 무난하고도 따끈하게 잘 구워서 내놓았다. 좋은 희곡에 연극을 올리기에 알맞은 중극장 규모의 극장에 좋은 배우들이 함께 했다. 반죽도 좋고, 터도 좋고, 호떡소도 좋고, 기름도 좋고, 불도 좋으니 어지간해서 먹지 못할 호떡이 나올 리가 만무하다.

 

작품 안으로 들어와 무대를 보면 한가롭기만 한 작은 마을 변두리 어디쯤 낡은 보트선착장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자살이나 해야 지역신문에 나올까, 남자 둘이 운영하는 이곳은 보기 안쓰럽다. 하지만 무대 앞쪽 연못가도 있고 주변에 풀숲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나름 운치도 있고, 빈티지한 매력이 물씬 풍긴다. 극중 상황으로 보면 한물 간 유원지에 재미거리도 없고, 미녀는커녕 늙은 홀아비와 비쩍 마른 총각뿐이니 돈, 명예, 권력, 매력 등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일종의 해방구이다. 그러니 갈등이 생길 여지가 없다.

 


 

딱 하나 남은 건 해방구로 공간의 역할이다. 이곳에 사는 삼촌 슈헤이와 조카 다모쓰, 삼촌의 애인 마쓰미, 손님으로 왔다 눌러앉은 사토시에 심지어 죽은 아버지 귀신 분페이까지 불쑥 등장하는 불청객 중 누구도 누구의 아래거나 위가 아니다. 은근슬쩍 눌어붙는 과정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극을 이끄는 약하지만 나름 갈등을 빚지만 관객은 애당초 관계에서 오는 갈등이 주요 테마가 아님을 금세 눈치 챈다. 내가 어떻게 살았든, 어떻게 죽었든 격식도 무엇도 따질 일 없는 자유로운 곳으로 보트선착장 설정이기 때문이다.

 

한물 간 곳, 돌아보지 않는 곳, 그래서 다툼이 벌어지지 않는 곳, 다모쓰가 떠난다고 할 때도 붙잡는 건 재산분할권 따위가 아니다. 결국 해방구로 이곳은 마쓰미가 임신한 아이가 삼촌의 아이가 아닌 생판 남의 피붙이고, 들통이 났다고 해도 이후 무사히 안착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극중 출산을 보지는 못하지만 관객은 아이가 나름 독특하나 자생력 있는 아이처럼, 연못가 잡초처럼 자라리라 마음 놓고 극장을 떠날 수 있다.

 


 

가족 개념에서 가문, 상속 등 몇 가지 이권, 관습, 기준을 걷어내면 남남이라도 얼마든지 성립가능하다고 얘기한다. 물론 이들은 착한 사람들이 아니다. 평범하지만 무능하거나 둔하거나 어수룩해 사회로부터 비자발적 격리를 당한 사람들이다. 마쓰미의 직업이 술집 마담이고, 사토시의 직업이 영업사원이었다는 전제를 보면-이들의 과거는 재현하지 않는다.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경쟁사회에서 가장 비위가 좋아야 하거나, 독해야 하거나, 속여야만 성공을 할 수 있는 냉정한 직업군이다. 그리고 다들 날카롭게 베인 상처를 숨기고 있다.

 

현실이라면 회사에서 잘리고 이혼 당한 뒤 빈털터리가 된 사토시가 늘어놓는 연못에 뛰어든다고 으름장이 으름장으로 끝나지 않을 테고, 다모쓰는 어릴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귀신을 보고 저주를 퍼부으며 부적을 내붙일 것이며, 슈헤이는 술집 마담의 마쓰미 아이의 실제 아버지일 가능성 높긴 하되, 절대 책임지지 않을 것이고, 마쓰미는 누구든 스쳐난 놈 중 하나를 잡으려고 혈안일 것이다.

 

그래도 이 조합이 지리멸렬하지 않고, 따뜻하면서도 유쾌한 이유는 경험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복기하면서 자책을 한다는 데에 있다. 현실에서는 잘못했으니 막가는 년놈이 대부분이나 극중 이들은 나름 양심의 끄트머리 쯤 잡고 놓지 않고 있다. 사회에 속할 때야 무능력자이지, 집에 와서 그리고 가족 앞에서 그럴 이유가 없다. 반딧불이가 유충 때 육식을 하지만 성충이 되면 이슬을 먹고 살 듯이 개똥벌레라는 별칭처럼 개똥 취급을 받을지 몰라도 반딧불이 군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족 개념이 워낙 다양하니, 공동체라고 불러도 좋고, 아무튼 정의신의 의견에 관객이 동의하는 건 사람은 살을 부비고, 냄새를 맡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약한 것들일수록 강한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뭉쳐야 한다. 그래서 강한 것들의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 가족애, 우정, 사랑 등등 뭐라고 부르든 새로운 방식을 강구해 살아야한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개가 돌을 무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설파한 니체가 보면 참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니체랑 똑같이 살 수만 있는가. 얼추 어울리면서 그렇게 은근슬쩍 돌도 물고, 흙도 파먹고 그런 거다. 그 정도면 연극 한 편이 손님을 위해 마련한 따뜻한 호떡 한 장으로 만족할 만하다.

 

무대 뒤 숙소 겸 사무실 겸 거실 겸 아무튼 작은 오두막을 두고 아옹다옹하는 5인 더하기 귀신 1명은 지지리 궁상으로 흘낏 보고 말 군상들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하나같이 주연급이다. 연극은 영화, 드라마와 다르게 주조연단역 구분 없이 카메라로부터 자유롭다. 같은 위치와 같은 조명 아래 동등하게 관객의 시선을 나눠 가질 기회를 갖는다. 물론 대부분의 작품에서 구분이 확실하다. 하지만 정의신은 연극이 가진 보편적인 매력을 가장 잘 활용하는 능구렁이로 고르게 인물을 내세운다. 그들은 카메라마사지를 받을 일이 거의 없을 법한 못난이들 투성이지만 무대 위에서 누구하나 기죽지 않고 하나같이 자기 얘기를 한다.

 


 

우리가 흔히 공간으로 집의 역할이 그렇듯, 집에 가면 동네 아줌마가 애틋한 어머니로, 말 수 없는 동네 총각이 자랑스러운 장남으로 둔갑하듯이 오두막, 무대 위에서 이들은 스스로 주인공처럼 빛난다. 딱 2시간 남짓 조명이 켜졌다가 꺼지는 무대는 초여름에 잠깐 보는 반딧불이의 짝짓기처럼 신이 났다. 스러지지 않고 끈끈하게 살아갈 이 가족을 위해 극중 가을 반딧불이의 등장은 희망차다. 남녀노소 누가 와서 봐도 좋을 작품이다.

 

<가을반딧불이>를 비롯해 정의신 희곡이 호떡반죽으로 맛집의 고유한 맛을 위한 재료라기보다 익숙하고 무난한 맛을 내는 데에 쓰임새가 대부분지만 장점으로 쳐야하지 단점으로 판단할 부분은 아니다. 때 늦은 가을반딧불이라니 각박한 도시살이에, 대뜸 이상고온현상이 떠오르지만, 복잡한 생각 따위는 접자. 그저 보트를 타고 망중한 즐기듯이 저 멀리 선착장에 사는 슈헤이 삼촌네를 살짝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진출처 - 조은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