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왕의 의자_두산아트랩 2014] 고통을 즐길 줄 아는 이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

구보씨 2014. 2. 6. 11:19

제목 : 왕의 의자 2014 두산아트랩4

기간 : 2014/02/06 ~ 2014/02/08

장소 :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출연 : 홍진일, 강기둥, 허지원, 신정식, 조재영, 강희제, 노가용, 이형구, 임윤호, 김보경, 배유미, 임예슬, 문지홍, 김민석

작/연출 : 지호진

주최 : 두산아트센터



70분, 쇼케이스치고 긴 편이다. 2014두산아트랩에서 선보인 <왕의 의자>는 나름 반전을 담은 기승전결로 구성 자체로 완성 단계 버전라고 봤다. 무용이나 무술 합을 선보이는 수준일 것 예상을 웃도는 결과물이다. 쇼케이스로 이 정도 성과면 관객 입장에서도 만족도가 높을 수 있다. 아트랩에 참여한 이상 감내해야 할 한계, 즉 연습, 극장, 무대 등 조건을 고려하면 대본을 묵혀두었거나, 근래 기획 예정인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장르마다 특성이 있어 단순 비교는 어려우나 배우가 무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공연임은 분명하다. 적어도 쇼케이스가 목적이 아닐 테고, 그 만큼 공을 들인 작품이다.

  

NG 끝에 카메라 워크나 편집으로 잡아낸 액션워크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소극장 무대, 추운 날씨, 바꿀 수 없는 확정 일정, 부상 위험 등 실제 액션극은 무대와 잘 맞는 장르는 아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상업극으로 성공과 별개로 기획자 입장에서 다양한 시도라는 측면에서두산아트랩을 비롯해 연극제 등에서 호응을 얻는 건 이해할 만하다. ‘서사는 간결하고, 움직임과 이미지를 극대화’한 작품이라고 비교평가한 지호진 연출의 전작 <남자가 로망>의 예가 그렇다. 2012년0 한예종 예술사 연출 발표작으로 학교에서 학생들과 올린 뒤, 바로 젊은 연극제와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두산아트센터도 차세대 예술가 발굴육성 프로젝트 ‘프로젝트 빅보이’로 <남자가 로망>를 올린 적이 있는데, 난 학교 공연, 최초 버전을 본 케이스다. 액션극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데, 학교 실험무대 소극장은 여느 소극장보다 좁은 데다 관객 수에 따라 객석이 무대로 밀고 나오니, 사고 위험이 없지 않다. 좌우 공간 활용 또한 벽과 객석 입장 통로라 활용이 불가능했다.

 

조명 활용도 마땅치가 않으니 분위기가 실제 싸움이 일어날만한 고등학교 지하 체육실이다. 이 작품은 유투브에 오를 조잡한 댓거리 수준이거나, 일진과 왕따 사이 사회축소판으로 그린 미시적인 접근이나 편가름이 딱 교실에서 벌어지는 그 풍경만큼 유치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전문배우들이 아닌 그들이 보여준 활극은 기대 이상이었다.

 


 

여건은 스페이스111이 당연히 낫지만 공간이 좁고, 이렇다 할 소품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비슷하다(무료 공연인 대신 쾌속 매진을 각오해야하는 점 역시). 같은 연출의 비슷한 작품을 상업 공연이 아닌 실험 공연만 봤으니 특이한 경험이다. 그러나 이는 한예종 공연이나 두산아트랩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 보장에 기인한 바가 크다. 다만 한예종 연극원 실습작 가운데 전후로 본 적이 없는 장르라는 점에서 <남자가 로망>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남자가 로망>이 직간접경험으로 학교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무대극 특유의 날것을 재현해 폭력이 가진 무거움 혹은 두려움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왕의 남자>는 어떤가? 폭력이 반복 순환하는 구조를 왕권이라는 절대 권력을 벌이는 암투로 빗대어 되짚지만 양상이 폭력이 오락물로 소비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것들과 속성이 다르지 않고, 차용한 부분이 엿보여 기시감이 드는 편이다.

 


 

느와르 영화에서 봤음직한 상황, 전개, 대사는 장르극으로 낯선 활극을 무대에서 익숙하게 보여주는 장치로 탓할 일은 아니다. 허나 구도를 이루는 주요인물인 형, 처, 장인이 전형적인 캐릭터라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알지 못한 채로 암투를 위한 스타일에 빠진 감이 없지 않다.

 

지호진 연출이 말한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연극으로 스타일이 이 작품의 특성이고, 장점이라고 하면 엄한 데서 작품의 완성도를 논한 건 아니다. 작품을 보면서, 극단 마방진의 <강철왕>, <칼로막베스>, <들소의 달> 등 몇몇 작품이 떠올랐는데, 준비 기간이 길고 고된 반면 결과물이 따라오기 힘든 방향을, 그간 좀처럼 가지 않은 쪽으로 방향을 잡은 이상 지호진 연출이 고민을 어떻게 풀어낼지 응원하고 지지하는 게 순리이다.

 


 

피지컬씨어터로 작품 서두에 보여준 짜인 군무가 좋았던 반면, 이후 서사에 치중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다. 그리고 현대무용을 할용하는 방식 역시 극단 마방진 초기작에서 보여준 바 있다. 마방진의 고선웅 연출이 초기작으로 보여준 성과물과 다른 모습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궁금하다.

 

종합이종격투기가 낯설지 않고, 리얼리티극으로 <주먹이 운다>와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더 이상 폭력은 영화나 게임으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지호진 연출이나 작품에 참여한 많은 배우들이 지향하는 부분도 단순하게 폭력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극 중 수많은 인물들을 죽이고 지킨 자리는 소품실에 나뒹굴 법한 딱딱한 의자이다. 쥐고 있는 건 소품용 칼과 총이지만 실루엣으로 왕의 고독이 그럴듯하다.

 

왕의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대를 이어 내려온 피의 악순환은 막이 오르고 내리는 시간 내내 까다로운 관객을 두고 사투를 반복하는 배우들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NG가 통하지 않는 무대에서 그 고통을 즐길 줄 아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