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반도체 소녀] 어쩌면 나도 반도체 아저씨

구보씨 2014. 10. 24. 15:00

제목 : 반도체 소녀

일시 : 2014/10/24 ~ 2014/11/30

장소 : 대학로 아름다운 극장

출연 : 오세철, 이민환, 전소현, 김동범, 이승연, 오주환, 공재민, 김진선, 염우림, 송인서, 백지원, 박윤희. 김서현

작/연출 : 최 철

주최: 장남주옷

제작: (가칭)연극〈반도체소녀〉 제작두레, 문화창작집단 날, 장남주옷

문의: 02-953-6542



대학로 아름다운극장은 아름답지 않다. 대학로의 오래된 소극장이 그렇듯 극장이 아닌 건물 지하를 개조해 만든 극장은 천정이 낮아 조명을 제대로 달기도 그렇고, 효과를 내기도 어렵다. 객석 역시 단 차이가 낮아 앞사람이 종종 무대를 가린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목을 지었나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엇비슷한 극장을 바꿔가며 4번째로 올라간 연극 <반도체 소녀>를 보면 그러하다. 이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전 지식이 없어도 되나, 연극이 제기하는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카페 http://cafe.daum.net/samsunglabor 를 들어가 보면 좀 더 작품을 이해하기 쉽다. 아니 반대로 이 연극을 통해 ‘반올림’을 아는 순서가 맞을 수도 있겠다. 2010년 12월 초연 이후 4년이 흘렀고, 그 사이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다.


 

다소 희망적이랄지, 당연한데 너무 늦었달 지, 점차 삼성 근로자들이 재해 판정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올라온다. 그간 구구절절한 얘기는 카페나 검색을 통해서 찾아보길 바란다. 다만 삼성이 변한 듯 교섭장에 나오면서도 ‘현장은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연극이 멈출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삼성과 한국 사회의 애증관계는 연극에서도 잘 다뤘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가전제품에는 반도체가 들어가고, 반도체소녀가 죽은 뒤에도 여기저기 떠돌 수 있는, 반대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주변을 둘러싼 가전제품이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화학제품 노출로 인한 질병 등 문제는 최첨단산업이라는 관련 전자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라, 삼성만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삼성은 극중 20대 청년 세윤이 그토록 가고 싶어가는 대기업 가운데 대기업이고, 반도체 소녀이자, 실제 모델인 故 황유미의 말처럼 입사 자체로 자랑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1등 기업으로 그 동안 벌인 은폐와 조작과 회유의 과정은, 포스트 이건희 체제 과정에서 보여준 말도 안 되는 불법 재산 승계 과정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뤄지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백혈병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삼성AS기사인 남편과 취준생 동생-해고복직 투쟁을 하는 동생의 여자친구’로 이어지는 가족 구조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 흔한 풍경인 동시에 사회 부조리가 21세기 서민층을 어떻게 잠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유효한 사례이다.

 

삼성AS기사인 남편 동영은 하루 휴가를 내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하다가 결국 심장마비로 죽는다. 이 부분 역시 냉정하게 삼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동생의 여자친구가 벌이는 복직 투쟁 역시 ‘재능교육’ 건물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인데-극장과 500m쯤 떨어진 곳이다-, 삼성과 무관한 듯 보이는 사건이다. 그러나 연극을 보고 나면 극중 상황이, 극장 밖 현실과 데칼코마니인양 똑같은 현상이 결국 체제의 문제 혹은 뭔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살아가는 근간의 문제라는 데에 동의하게 된다.

 


 

실제 사회운동가인 오세철 교수가 작품 안에 등장해 배우와 관객을 향해 말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제기는 극중 사건을 관통하는 물음이다. (매표소의 그의 저작을 판다. 저렴하고 읽을 만하다.) 하지만 단막극에서 다루기에 부피가 큰 문제이기도 하고,  너무 간략하기도 하여, 평소 고민의 퇴적층에 따라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허나 연극으로 관객으로 전달력만큼은 장르의 장점이고 매력이다.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백혈병 투병과 죽음으로부터 비롯한 반도체 공장의 현실은 여전한 듯하다. 카페 게시판에는 11월 5일자로 ‘파주 엘지필립스에도 백혈병으로 사망하신 노동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반올림, 투쟁! 응원합니다. 함께 하고 싶습니다.’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우리 옆에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외면한다. 각자 바쁘기도 하고, 자기 몸 챙기기에도 바쁘다. 그 중 이슈화 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이슈가 되어도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지지부진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 아무려나 <반도체 소녀>와 더불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탐욕의 제국> http://blog.naver.com/empire2014 이 있다. 극영화로 풀어낸 <또 하나의 약속>도 있다.

 

2014년 <반도체소녀>를 볼 수 있었던 데에는 크라우드 펀딩이 있었다. 시민들의 동참이 아니었다면 이 연극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4년째 올리는 연극치고는 연출이 투박하고 극 구조가 단순하다. 앞서 말했듯 극장은 후줄근하고, 소품도 조잡하다. 요 사이 연극도 제작극장 붐이 일어, 경쟁 아닌 경쟁이 생기면서 돈을 투자하니 관객으로 눈요기를 하고 다닌 통에 그럴 수도 있다. 아무려나 찾아가서 봐야 하는 작품이다. 극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노조에 가입하라는 동료의 제안을 주춤주춤 외면하는 동영의 모습은 마음이 짠하다. 10년 전쯤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당시 결혼을 했거나 애가 있었다면 나도 쉽게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바꿔야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흔들리지 않고 그 타깃을 정확하게 봐야 한다.*

 

 

 

사진출처 - 장남주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