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개천의 용간지] 개천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

구보씨 2014. 11. 8. 15:07

제목 : 개천의 용간지

기간 : 2014/11/08 ~ 2014/11/16

장소 :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출연 : 김자영, 임형준, 정진영, 정다빈, 신선한, 서혜숙, 박한영, 신민재, 강정후, 조민기

극작 : 한현주

연출 : 백석현

제작 : 극단 창세http://cafe.daum.net/CAC-Genesis

협찬 :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11월 11일, 쌍용차 노동자들이 정리 해고된 지 2000일을 맞았다. 벌써 길바닥에서 맞는 6번째 겨울이다. 77일간의 옥쇄파업과 단식, 노숙농성, 고공농성 등 목숨을 내건 투쟁이 이어졌고, 스물다섯 명의 노동자 및 가족이 목숨을 잃었지만 여전히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쌍차 정리해고 2000일, 고통의 시간 끝낼 수 있을까?' [참세상] 기사입력 2014-11-11 15:54

 

연극 <개천의 용간지>를 보고 온 다음날, 공교롭게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났다. 눈물을 흘리는 중년 아저씨들의 얼굴을 보면 당혹스럽다.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다. 쌍용자동차 공장 인근 고등학교 아이들이 주인공인 작품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아버지 혹은 삼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얼이 빠진 얼굴이다. ‘얼’이 빠졌으니 얼굴이 아니라 ‘굴’속처럼 먹먹하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현실이 무대를 압도하니, 그 모습에 스산하고 먹먹할 수밖에 없다.

 

  

13일 오후 서초구 대법원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 153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무효 확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정리해고가 유효하다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내는 판결을 내린 가운데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 조합원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철수 기자 

[민중의 소리] adin@vop.co.kr 발행시간 2014-11-13 18:33:53 최종수정 2014-11-13 18:33:53

 

연극 도입부, 2009년 4월 8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경찰특공대가 진압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틀었다. 언론에서 봤던 그림이다.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구급차에 실려 갔으되, 언론에 따라 사진 속에는 파란색 작업복을 입고 있거나, 검정색 경찰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시대, 우리는 1심과 2심을 거쳐 다른 판결을 내린 법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 불안했다. 이길 거라는 말을 자기 다짐처럼 하는 사설과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기사가 판결을 하루이틀 앞두고 올라왔다. 다만 내가 본 사설과 기사는 우리가 메이저라 부르는 언론의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전혀 관심이 없다가, 연극을 보고 판결이 난 후 찾아보니 그런 기사가 있었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개천의 용간지>도 그러하다.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언론에서 다뤄줄 법도 한데, 여느 대학로의 소극장 공연이 그렇듯 슬쩍 올랐다가 막을 내렸다. 극단의 홍보 미흡이 문제일 수도 있고, 초연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 연극이 쌍용차 노동자 대량 해고 자체보다 굵직한 사회 갈등 이후 벌어지는 파문을 사회 문제로 객관화하여 다루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극중 아이들은 아프다. 다만 아이들을 아프다고만 하는 건 연극에서도 이제 물린다. 갈수록 모든 세대가 아프지 않은 세대가 없고, <개천의 용간지>처럼 청소년들 사이 문제와 갈등의 원인을 가정과 가정을 둘러싼 사회 현실로 보기도 하여 해결책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농담처럼 이민을 가는 게 낫다, 는 논의가 농담이 아닌 매우 진지한 선택지가 되었다.

 


 

그간 봤던 공연에서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나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처럼 청소년 문제를 다루면서도 초점을 배우에게 맞춘 작품을 보면, 제작사 의도나 관객들 평가가 문제가 아닌 배우 몇몇을 주목하는 식이기고 보면 청소년문제는 작품에서 이제 진지한 주제라기보다 차용 정도로 보인다.

 

청소년기를 희망이라고 부르는 구호가 높을수록 현상은 그 반대라는 것쯤 우리는 안다. 냄새가 안 나는데, 향수가 필요할 리 없듯이 말이다. 극중 아이들은 해결책도 없이 방치된 채로 일방적으로 코너에 몰렸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아이들이 고민은 어른들의 것이라 청소년극은 아니다. 적어도 영화동아리 ‘필난다’의 아이들은 깨인 아이들 혹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들이다.

 

내가 현실에서 만난 아이들은, 쌍용차와 같은 트라우마를 겪지 않았지만, 맞닥뜨린 거대한 사건 혹은 현실에 대해 더 이상 사고하기를 원하지 않고 멈췄다. 1등부터 꼴등까지 본능적으로 본인들이 할 수 있는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맞닥뜨린 거대한 사건’은 가난, 이혼, 왕따, 성적, 연애 등 피부로 와 닿는 문제들이지,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학교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알아서 할 문제’. ‘넌 공부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어느 선 이상 나서지 않는 게 정답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현실이 진하게 배어든 작품이라, 솔직히 작품만 떼어내고 보기가 어렵다. 내가 대법원판결이 잘못되었다고 떠들어본들 달라질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극 마지막, 일방적인 해고를 한 기업의 낡은 TV를 아저씨들이 깨부수는 화풀이 하는 장면을 담길 바랐던 아이들의 의도와 반대로 진지하게 고치는 장면은 작위적이라고 해도 찡하다.

 

사회 정의니 법 진실이니 하는 거창한 질문에 앞서,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으로, 하루 세끼 먹고 새끼들 키우며 사는 기본적인 삶이라는 걸, 장삼이사들인 이들이 원하는 게 그렇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초기화시켜 일깨운다.*

 

사진출처 - 극단 창세, 민중의 소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