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라긴 - 6호실
기간 : 2013/09/25 ~ 2013/10/06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3관
출연 : 남명렬, 백익남, 김용태, 김철환, 전윤지, 장준환, 김경욱
원작 : 안톤 체홉
극본 : 김태현
연출 : 김원석
기획 : ㈜문화아이콘
주최/주관 : 명품극단
흔히 안톤 체홉의 희곡은 연출가라면 한 번쯤 도전해야 한다고들 한다. 연중 세일하는 마트처럼 의례히 공연장에는 체홉 작품이 내걸린다. 바냐 아저씨는 이제 이웃집 아저씨 이름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10/26부터 명동예술극장에 올라가는 이성렬 연출의 ‘바냐 아저씨’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하지만 내 야무지지 못한 생각에 체홉 특징인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 극적 갈등이 도드라지지 않는 일상의 나열은 무대보다는 카메라의 발명 이후 영화나 드라마에 더 어울릴 만하다. 1904년, 44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체홉은 희대의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보통 세계 최초의 영화 상영을 1895년으로 보고 있으니 접점이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간 게 아닐까 짐작한다.
그가 매주 한 편씩 신문에 칼럼을 썼던 경력이나 유형지인 사할린 섬에서 3개월 만에 주민과 만나 무려 8.000장이나 면접카드를 작성한 사례를 보면, 관찰자로 그의 성실함을 알 수 있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좋은 관찰자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확실한 경우가 아닌가 말이다.
체홉은 내가 5년 정도 공연을 보러 다니는 동안, 가장 자주 만난 희곡작가다. 하지만 같은 작품이라도 보고나면 같은 듯 다른 해석에 알쏭달쏭하고, 또 극단마다 개성이 다른 이유도 있지만 볼 때마다 새롭기도 하다. 무채색인 듯 연출가마다 개성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 되돌아보면 내용부터 무대까지 새롭게 각색한 작품이 많았다. 특히 무대가 각별한 작품들이 아직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중 러시아 연출가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의 <벚꽃동산>(2010.05)는 30m에 달하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현재 공사 후 이름을 바꾼) 깊숙한 무대에 대각선으로 나무 벽을 세워 원근감을 준 무대가 기억에 생생하다. 무대미술가 에밀 카펠류쉬는 깊고 어두운 벚꽃나무 숲속의 수백 년 세월을 견딘 고택을 한정된 무대 위에 놀랍도록 구현했다.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의 <벚꽃동산>(예술의전당 2010.05)
체홉 연극에서 무대가 중요한 이유는 앞서 말한 극중 갈등이 미지근하고, 캐릭터가 도드라지지 않은 배경이 인물들의 삶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 역할에 있다. 그래서 무대를 구현하기 힘든 소극장에서 본 체홉 작품은 연출가의 의욕이 앞선다는 인상을 준다. 19세기 말 러시아 중산계급층의 재현에 그리 관심이 없고, 작가 스스로 ‘동시대성’에 집중한 작가이니만큼, 당시 작품을 그대로 올리는 작품 못지 않게, 소극장에서 만난 새로운 체홉‘들’ 역시 얼추 만족하는 편이다. 어중간한 셰익스피어 작품이 오그라드는 대사에 자칫 코미디 변사극이 되기 쉽듯 어중간한 체홉은 밍밍하지 않은가.
이러나저러나 부러 찾지 않았어도 체홉 4대 장막극을 다 봤다. 한편으로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낯익은 연출가나 극단이 올리는 체홉이라면 가능한 한 찾아보는 편이다. 체홉을 대하는 연극인들의 특유의 진지함이랄지 강박이 의아할 때도 있지만, 체홉을 만날 때면 각별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쯤 알기 때문이다. (초연작도 아니고 비교평가를 해대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명품극단에서 체홉 작품 2편을 들고 나타났다. 두 작품 모두 기존 체홉 작품이 아니고 새롭게 각색해서 올리는 작품이다. 그중 체홉의 단편소설 <6호 병동>을 각색한 연극 <라긴>을 봤다. 단편소설까지 희곡으로 각색해 올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체홉은 희곡 못지않게 단편소설 작가로도 뛰어난 실력(게다가 의사였다)을 갖췄다.
이번 공연은 원소스멀티유즈인 셈이다. 다소 부담스러운 이름을 가진 ‘명품극단’은 연출가 김원석이 러시아에서 활동한 연출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고골(광인일기)과 도스토예프스키(죄와 벌)을 거쳐 체홉까지 왔다고 그는 소개에서 밝혔다. 작품에서 그들은 주변부 인생이나 작품 속에서 정신병동에 갇히거나 살인을 저지른다. 김원석 연출이 택한 작품들 속 인물들은 사회에 순응하는 인물이 아니다. 연출은 프랑스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 ‘몫 없는 자들’, ‘셈 밖의 자들’이라고 부른다.
규율을 어기는 자(정신병자)와 규율에 대한 정의를 점차 의심하면서 변하는 자(병원장 라긴)와 지키려는 자(나머지 인물들) 사이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풍자극으로 체홉의 다른 작품과 다르게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짧은 단편소설의 특징이기도 한데, 연극으로 인물들은 가름이 확실해 희곡과 또 다르게 구성이나 전개가 익숙하다.
지금도 그럴진대, 상류층이자 병원장인 라긴이 결국 정신병자로 죽음에 이르는 변화 과정이 작품의 핵심이다. 이반과 나누는 몇몇 대사에서 재기가 엿보이지만 소극장 위 간소한 무대를 비롯해-한 극단에서 작품 2편을 연이어 올리는 만큼, 역량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전에 봤던 체홉과는 색다르다. 다만 초연 첫날이기도 하거니와 남명렬과 백익남이 젊은 배우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만 두 사람 연기만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라긴이 자의적으로 택한,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선택에 의해 병원장에서 정신병자로, 또 변화의 중심이었던 이반에 의해 살해-혹은 놀이-당하는 장면은 현실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질문이다. 죽은 뒤 암전 후 라긴이 다시 살아나 등장해서 외친다. “코기토 에르고숨!”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로 사고(이성)가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어찌 된 것인가. 그가 다른 논지로 등장하는 이반과 나눈 꽤 지식수준을 요구하는 대화나 그의 죽음 자체가 그의 생각 안에서 벌어진 하나의 해프닝-놀이-일 수도 있는 셈이다. 단순히 상상이라면 지루하고 정부의 통제를 받는 정신병원장으로 그의 삶이 즐거울까.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 생각해볼 부분이다. 아무려나 그는 죽지 않았다.
광기와 이성의 경계가 정신병원 입원의 유무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체홉이, 그리고 명품극단이 라긴의 입을 통해 외친 ‘코기토 에르고슘’은 이성의 폐해라기보다는 역으로 이성을 가장한 몰이성 시대에 대한 풍자로 읽을 수도 있다*
사진출처 - 명품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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