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무빼밀리로망스
기간 : 2013/09/17 ~ 2013/09/22
장소 : 연우 소극장(대학로)
출연 : 전운종 , 문슬기(문올가) , 유승락 , 박미르
작가 : 윤영선
재구성/연출 : 김수정
제작 : 극단 돌곶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SeMA Green기획 김구림 초대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을 봤다. 오후 5시 쯤 여유 있게 고갱 작품전을 보겠지 했으나 사람들에 치여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작품을 한 번씩 빼놓지 않고 봤으나, 더운 열기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고갱전이 열리는 2,3층 아래 1층에 김구림 전시회는 넉넉하게 볼 만했다. 고갱전이 대관 전시라면 김구림 전은 공공미술관다운 전시다.
솔직히 말해 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동명 제목을 삼은 김구림 전시회를 본 이유는 가슴이 밖으로 비어져 나올 정도로 무척 큰 아가씨를 따라 나도 모르게 발길을 옮겼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두 시간 남짓 서 있었더니 다리가 쑤셔 나갈가 했지만 이층 계단에서 조망했을 때, 방금 고갱전시회에서 본 <타이티의 여인들>(1891)에 등장하는 팔다리 굵직한 그녀가 보였고, 난 마치 69일 동안 뱃멀미를 하면서 타이티에 도착한 고갱처럼 전시장에 따라 들어갔다.
다만, 전시장에서 난 그녀를 놓쳤는데, 이유는 바로 위층처럼 인파로 바글바글해서가 아니라 드문드문 관객보다 작품이 다섯 배쯤 많은 공간 안에서 김구림의 색다른 작품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60~70년대 한국에도 이런 아방가르드한 미술작가가 있었구나, 하는 다소의 놀람과 반가움과 신기함에 재밌게 둘러봤다. 멀리서 보면 풍경이되, 가까이에서 보면 현실이듯 몸이 큼직한 그녀는 당연히 타이티의 여인이 아닌 평범한 누구였다. 김구림 작품 속 여인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김구림이 연극 <나무빼밀리로망스>와 무슨 상관이람. 김구림(1936)과 故 윤영선(1956)은 동시대를 겹쳐 살았지만 나이 차이가 나는 편이다. 하지만 김구림은 윤영선을, 적어도 윤영선은 김구림 작품을 좋아했을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확인불가의 근거 없는 확신은 김구림 전시회에 본 연극배우와 벌인 몇몇 퍼포먼스-요사이 협업이라 부르는-리플렛에서 비롯되었다. (몇 장 놓인 가운데에 윤영선 이름은 없었다, 당연하다. 60~70년 윤영선은 청소년 혹은 청년이었다.)
김구림의 작업은 작가로 윤영선이 보고자 한 주변부의 이야기, 의도적 중심회피로 예술에서의 기존 잣대 혹은 해석에 대한 불신 혹은 무능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는 당연히 당시 사회에 대한 반항인 동시에, 스스로 새로운 양식을 통해 한 시대의 부정에 집착하여 박제되지 않고, 새로운 이슈마다 동시대성을 가지고 새롭게 반박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이 둘은 이미자, 윤복희, 남진, 나훈아, 신성일처럼 동시대 대중의 사랑은 받지 못하였으되, 작업물은 전시, 혹인 추모연극제를 올릴 만큼 좋은 작품을 만들고 썼다.
김구림의 작품에 얼음을 활용하는 등 물성의 변화에 대한 오브제가 많은 이유가 곧 그 스스로 시대에 포착되어 채집망에 갇히지 않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리고 윤영선이 교수로 재직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학생들이 새롭게 조명한 <사팔뜨기 선문답>, <떠벌이 우리 아버지 암에 걸리셨네>,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의 비논리적 혹은 비연극적 방식의 총합을 시도한 <나무빼밀리로망스>에서도, 해석에 대한 재해석을 일수 있으나, 윤영선이 김구림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은 의도가 보인다.
2013년 9월 왜 김구림 전시인가, 는 왜 윤영선의 연극인가, 와도 맞물리는 지점이다. 어쩌면 이 둘은 근대 이후 한국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겪을 작용/반작용의 속성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사이 유행하는 CF를 따라하자면 단언컨대, 윤영선 역시 김구림의 작품에서 공감과 아이디어를 얻었으리라 본다.
이 같은 논리로 작품을 들어가면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오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죽어 인천공항이 아닌 김포공항에 내린 아들의 불행한 가족사 혹은 어린 시절의 뒤틀린 경험을 마치 사고로 뇌가 뒤엉킬 때 그 안의 아비규환의 지옥을 겹쳐서 보여주듯 암울한 상황을 연출한다. “비극적인 역사가 희극적으로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는 이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대면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라고 되묻고 있다.
또한 김구림이 회화부터 조각,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듯 윤영선의 희곡 역시 난해하고 관념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이 가운데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 희곡에서 중심 개념을 따와 연결고리를 만들어낸 작업은 가치 있는 시도이나, 제대로 구현을 했는지는 되물어야 할 것이다. 이 대답은 그들만이 할 수 있을 텐데, 원작 역시 ‘말’ 못지않게 ‘퍼포먼스’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전제 아래 재구성한 희곡을 통해 드러낸 감정 과잉의 무한반복은 관객의 감각을 둔화시키고, 풍자 혹은 시대에 대한 반성을 깜박 잊게 만들 수도 있다. 무엇보다 배우들이 힘겨워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시대를 짊어진 상징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랬다.
돼지머리-귀를 잘라 먹는 장면에서 그 비싼 걸 매회 어떻게 조달하는지 궁금했던-나 닭의 내장을 끄집어내는 식의 비용대비 효과적이지만 다소 짐작 가능한 폭력적 상황 전달 방식은 좀 더 고민해볼 부분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연극을 통해서 느껴볼 수 없었던 새로운 촉각적인 경험을 선사”했는지는 고개를 갸웃거릴 만하다. 배우들이 보여준 퍼포먼스에 가까운 노고에도 말이다. 젊은 배우들의 살짝 거친 연기와 다소 어긋나는 호흡은 젊음 혹은 무한 체력을 바탕으로 몰아치는 열기에 상쇄되나, 그럴수록 연출은 더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
성교나 폭력 장면을 보면 극중 상황과 별개로 어쩔 수 없이 연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전후 극장 공기와 달라 긴장감이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정자만 싸질러 놓은 정도 수준의 아비인 주제에 권위를 내세우는 상징은 그 속사정을 정교하게 끌어내지 않으면 그간 너무 많이 써먹기도 했다. 이 작품이 의도하는바, 부녀간 정권 교체를 두고 얼마간 풍자를 하고자 했다면 좀 더 정교했으면 좋겠다. 획일화한 방식은 식상하게 보일 수 있고, 사람들이 예전과 달리 눈 등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세상, 어서 빨리 살아서 죽어야지.” 극중 자주 등장하는 대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야 한다는 역설로 들린다. 지루한 세상이 언제 살아나 모르게 후딱 지나가는 즐거운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다. 죽을 가치가 있지 않은 바에야 죽을 만한 가치를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가지만큼 넓게 뻗은 나무처럼.*
사진출처 - 극단 돌곶이
'연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긴] 몰이성의 사회를 향한 풍자 (0) | 2013.09.25 |
---|---|
[접시닦이들] 비추거나 혹은 깨부수거나 (0) | 2013.09.21 |
[모란이모] 객관적 시선이 필요한 이유 (0) | 2013.09.06 |
[이단자들]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0) | 2013.08.22 |
[빠뺑자매는 왜?_장 주네 탄생 100주년 기념] 하녀들을 보는 시선, 해석 혹은 왜곡 (0) | 2013.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