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접시닦이들] 비추거나 혹은 깨부수거나

구보씨 2013. 9. 21. 11:55

제목 : 접시닦이들The dishwashers

기간 : 2013/09/21 ~ 2013/10/06

장소 :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출연 : 박종상, 이승훈, 공주성, 남궁일

대본 : 모리스 핀치

각색/연출 : 전용환

주최 : (사)한국소극장협회

주관 : 연극집단 청춘오월당, 극단 가교

기획 : 휴먼컴퍼니



그렇다. 산다는 건 쉽지 않다. 누구는 안 그랬겠냐만, 요사이 조삼모사도 아닌 국민기만이라고들 하는 기초연금 논란이 그렇듯, 그래도 견디는 건 같은 층 비슷한 처지들을 보면서 위로를 삼을 수 있어서일 게다. 일상다반사를 뒤로 하고 직장에서 내 상황은 위층 상사들을 보면서 목표 의식을 갖거나, 혹은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만족을 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내일은 없고 오늘만 있을 뿐이다, 생각하면 살기가 머리가 한결 덜 복잡하고 사는 게 좀 수월해 보이기도 한다. 아무려나 퇴근을 하고, 연애를 하고, 월급을 받는다. 접시닦이든 조리사든.



 

여기 1류 레스토랑 지하 최하층에 접시닦이 3명이 있다. 정원은 둘, 자연스레 누구는 불안하고, 누구는 조율을 해야 하고, 누구는 눈치를 본다. 치매에 걸려 내쫓길 처지인 노인 석구를 챙기는 건 접시닦이 팀장 쯤 되는 중년 두식의 몫이다. 더러운 찌꺼기를 걸려내고 얼굴이 비칠 정도로 뽀얗게 닦이기만 하면 그만인 위층은 석구가 나가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 급여가 나가지 않으니 손해 볼 게 없다는 식이다. 두식은 눈치껏 고기를 빼돌려 판 돈으로 석구를 챙긴다.



올해 1월, 캐나다 프레리 극장(Prairie Theatre)


어느 곳이든 그 바닥에서만 통하는 그들만의 룰이 있다. 펀드매니저였다가 망해 신참으로 들어온 젊은 찬진은 두식의 임의대로 정한 방침이 맘에 들지 않는다. 접시닦이에 대한 부당한 조치에도 가만히 있는 두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곳은 방치된 공간인 동시에 그들만의 특별한 공간이다. 더러운 채로 들어왔지만 깨끗하게 닦은 접시에 처음 비친 얼굴은 내 자신이다. 청결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얼굴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그 아래는 개수대 찌꺼기가 늘러 붙은 하수구일 테니, 극중 구조 상 마지막 종착지 혹은 경계와 같은 곳이다. 찬진이 보기에 석구나 두식은 찌꺼기 인생이다.

 


올해 1월, 캐나다 프레리 극장(Prairie Theatre) 


한 층 위 누군가는 요리를 하고, 한 층 더 올라가면 누군가는 음식을 먹는다. 접시는 곧 누군가를 위해 포장(데커레이션)을 하고는 다시 더러워지는 순환구조이다. 저 입금의 환경도 열악한 노동자인 접시닦이들의 처지도 사회로 확장하면 접시와 신세가 다르지 않다. 과하게 얘기하면 다시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 꼴이다. 시시포스는 못된 짓이라도 해서 벌을 받는다 치고, 여기서 일하는 이들은 무슨 연유인가. 사표를 내는 건 자유지만 이들은 그럴 처지가 아니다. 자, 이를 당연하게 여길 것인가, 아니면 접시를 깨고 밖으로 나갈 것인가. 접시가 갖는 이미지는 양가적이다. 접시를 조심 아기 다루듯 닦고 광을 내지만 동시에 확 던져서 깨버리고 싶은 욕구 또한 비례한다. 더러운 접시를 깨고 싶지 않은 이유는 깨진 접시와 동격인 쓰레기 취급을 하는 데에 있다.

 

몇 가지 좋은 아이디어와 구성과 나이 대에 맞춘 고른 배우들의 캐스팅 및 연기에도 뭔가 아쉽다면 이유가 뭘까. 접시닦이의 설움은 작가인 모리스 핀치가 사는 캐나다나 미국은 어떨지 몰라도 더 지독한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에 한국에는 버글버글하다. 그러니까 작품 속 그들의 처한 상황이 그리 새롭다거나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2009년 6월, 미국 뉴욕 59E59극장(59E59 Theaters)


그러니까 어찌 보면 이슈로 관심을 끌기에는 꽤 늦은 소개가 된 감이 있다. 그리고 북미 공연 사진을 보면 그들 스스로가 접시와 다를 바 없이 지저분한 반면, 한국 공연을 보면 유니폼이 깨끗해서 몰입이 잘 되지 않는다. 연기 호흡도 더 보강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무대만큼은 정미소 특유의 뚫린 이층 구조를 잘 활용해 계단도 그렇고, 그럴 듯하게 꾸몄다. 극 안에서 주고받는 이야기의 밀도가 기대보다 낮다고 본 내 기준이 정확하지는 않다. 아무려나 사실주의 극이라면 좀 더 한국 현실에 맞게 다가갔어야 한다.

 

더해, 10월 30일부터 11월 17일까지 대학로 이랑씨어터에서 극단 청춘오월당이 극단 가교에 이어 같은 작품을 공연 중이다. 연출은 동일하지만 극장과 배우진이 달라지면서 번안극으로 한국 사회, 적어도 한국 관객들이 좀 더 수긍을 할 만큼 변화가 있으리라 본다. 같은 작품을 한 달 남짓 안에 다른 극장, 다른 출연진으로 올리는 데에는 그 만큼 원작이 좋다는 판단이 선 탓이라고 본다. 좋은 재료로 좋은 접시 위에 좋은 음식을 내놓듯 발전한 작품으로 호응을 얻길 바란다.*  



사진출처 - 휴먼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