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단자들]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구보씨 2013. 8. 22. 11:21

제목 : 이단자들(The Heretic)

기간 : 2013/08/22 ~ 2013/09/01

장소 :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출연 : 서이숙, 류태호, 장선우, 신사랑, 신문성, 이태린

희곡 : 리차드 빈(Richard Bean)

연출 : 박혜선

과학 자문 : 이승호

제작 : 극단 사개탐사



팩트(fact), 디스와 내란음모와 댓글놀이와 표절과 종북과 극우 논란이 벌어지는 SNS를 보면 결론은 팩트(fact)로 모아진다. 진실이 뭐냐, 증거가 있냐,를 따지는 데 우물쭈물하다가는 블록(차단)을 먹거나 찌질이, 바보, 베충이 기타등등 별의별 욕을 듣는다. 박혜선 연출이 세운 극단 사개탐사의 창단 공연 <이단자들>도 작품 논점은 팩트이다.

 

다이앤 카셀 교수 역을 맡은 배우 서이숙은 인터뷰에서 “핵심은 과학적 수치가 아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남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의심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선입견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당연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연극이 동시성과 공시성을 가진,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동일하게 적용되는 지구온난화를 화두로 꺼내지 않았다면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지구온난화를 둘러 싼 음모론을 덜어내면 가족 사이 상황이나 전개가 코미디 연극처럼 평이하다. (평이하다는 말은 편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과 교차한다. 적어도 이 작품은 그렇다.) 다루는 주제가 관객에게 어려울 수 잇다는 우려가 기존 연극에서 봤던 1인 다역의 코믹 앙상블의 등장 등 관객에게 안정감을 주는 익숙한 연출을 선택했다고 봤다.



 

전에 박혜선 연출의 작품을 몇 편 봤던 기억을 떠올리면 관객이 편히 즐길 수 있는 무난하지만 세심한 여성극이 그녀의 특성이다. 허나 작품이 주장하는 ‘합당한 의심과 휘둘리지 않는 도전’이라는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면, 기존 작품을 푸는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로 조연출로 내공을 쌓는 내내 겪은 극장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세운 극단 창단 공연이라면 한 발 정도는 더 도전과 시도를 향해 내딛어도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굳이 결론이 나기 힘든 논쟁거리를 소재로 내세운 작품이 아니어도, 박혜선, 서이숙 조합이면 그 자체로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일상이거나 짐작 가능한 시트콤 방식의 몇몇 튀는 상황이나 독특한 캐릭터가 고리타분할 수 있는 주제를 푸는 윤활유 역할을 했겠지만, 되레 한국 정서에서 보면 다소 과하거나 배우 연기와도 좀 어긋나 맞지 않는 부분이 보이니 연출은 물론 연기도 가진 재능이나 노력만큼 무대 위에서 발현했나 싶다.



 

결국 극중 핵심인 ‘행복’을 드러내기 위한 모녀 간 갈등이 중요할 텐데, 거식증과 신경쇠약에 걸린 딸 피비가 엄마 다이앤 카셀 향해 풀어내는 독설이나 행동은 과하고, 엄마와 환경주의자인 제자 벤 쇼터와의 초반부 묘한 관계도, 딸과 갈등 요소를 이끌어내는 해프닝으로 볼 수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생뚱맞다. 상사인 케빈 말로니 학과장과 과거 섹스 경험을 자녀나 제자 앞에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부분도 엄숙을 가장하는 한국 교수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영국식일 게다. (한국이라면 지구온난화 조작보다 ‘성상납, 교수 자리 거래’ 운운하는 가십이 더욱 화제가 되었을 게다.)

 

그래서“너무 사소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세한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번역으로는 그것을 충분히 보여줄 수 없어서.” 아일랜드의 시골 해안 마을을 강원도 바닷가로 바꾸고, 내내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번안극 <거기>를 연출한 이상우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가 있다. 배우들에게도 낯선 기후과학 이슈나 입에 붙기까지 애먹었을 과학용어를 섞어가며 인터미션을 포함해 150분 연극으로 풀어낸 의욕은 높이 살만하고 쉽지 않은 도전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안고 가려고 하면 역으로 기대만큼 관객 반응을 얻기 힘들다. 그래서 누구에게는 ‘어려운 과학 세미나’로, 다른 누구에는 ‘지루한 신파극’으로 극과 극의 반응이 일고 만다.



 

연극 만듦새에서 벗어나, 다시 팩트로 돌아오면 작품 속에서 지구온난화를 주장한 과학자의 컴퓨터를 해킹한 제자 벤의 미필적 고의에 의해, 온난화의 근거가 매우 빈약하고, 인류를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결국 이단자인 다이앤 교수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는 사실이 팩트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의 허무함과 ‘결국 그놈이 악당’이라는 예상가능한 결론은 코미디로 풀어낸 희곡의 한계일 수 있다.

 

연극에서는 거짓으로 팩트가 나왔다 치고, 극장 밖으로 나와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극에서 유엔 산하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가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큼 과도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한다. UN을 향한 비판이나 한계가 그렇듯 맞는 말이다. 새겨들을 만하다. 그리고 저탄소사업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환경운동가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앨 고어를 비꼬는 장면이 나온다. 고어는‘불편한 진실’로 한창 잘 나갈 때에도 ‘불편한 논란’ 이래저래 많았다.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역으로 앨 고어 등을 비롯해 IPCC를 끌어들이면 지구온난화를 두고 진실을 가리고자 하는 소수 혹은 이단자로의 규정한 주장이 무색해진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배출권을 두고 제재를 하자는 교토의정서 가입 거부하는 미국, 중국 등 강대국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가 주기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환경보호를 할 필요가 없고, 기존 방식을 그대로 미국처럼 기득권을 놓을 필요가 없거나, 중국이 그렇듯 기득권이 될 기회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권력과 정치 문제를 개입시키면 진실 규명 문제가 아닌 51:49 싸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사실을 기반을 둔만큼, 연극이 다루지 않는, 그러나 한국 초연 이전에 밝혀진 사실을 더하면, 연극과 달리 해킹을 한 주체가 누군지 불분명하나, ‘합리적 의심’으로 지구온난화 이슈를 덮으려는 측에 의혹을 두고 있고, 지구온난화를 주장한 교수는 해고를 당했으나 다시 복직을 했다. 그저 해프닝이라는 식이다. 복직을 했다는 의미가 그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영국 사정은 모르지만 툭하면 사면과 복직을 반복하는 한국에서는 그러하다. 연극의 주장, 엄밀히 희곡작가의 주장처럼, 그 역시 지구온난화라는 ‘돈벌이’ 이슈에 ‘절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라고 짐작한다).



 

문제는 순수하게 학문 영역으로 볼 수도 없고, 그렇지도 않은 이슈인 만큼 대중을 상대해 정보를 전달할 때에는 신중해야 한다. 케빈 말로이 교수가 그렇듯 기후온난화를 두고 벌어지는 과정마다 돈벌이 수단과 연결되므로 애초에 떼어 놓고 보기가 힘들다. 극과 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 문제이니 만큼 입장을 드러낼 때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 지구온난화 이슈를 소재로 활용만 했을 뿐이라도 말이다.

 

극 말미, 북극곰 인형의 앙증맞은 인사는 귀엽게 보이지만, 현실에서 멸종위기종으로 굶어죽은 북극곰 사진이 기사에 실리는 판이니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이다. (며칠 전 북극이 커졌다는 기사가 떴고, 지구온난화의 허구를 증명하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댔다. 역시 헤프닝으로 밝혀졌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로 찾아보시길.)

 

첫 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다. 극단이 생기고 없어지기는 비일비재하고 극단이야말로 극장 제작 시스템에서 멸종위기라 극단 창단은 반가운 일이지만 아무려나 앞으로 극단 이름처럼 사회와 개인을 좀 더 치열하게 탐사하길, 범주 안에서 논쟁이 아닌 범주를 뛰어넘는 이단자가 되길 바란다.*




사진출처 - 극단 사개탐사, 연합뉴스 강일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