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 비튼이 독신으로 살다가 관 속에 누으면서도 그레타 가르보에게 받은 노란 장미를 품에 안았다니, 그 열렬한 사랑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여배우들를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만나면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어도 좋았을 것을 말이지요.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신화에서 자신이 새긴 조각과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에서 세실 비튼은 사진 밖 그녀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짝사랑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 끊이지 않은 사랑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응결이라고 해야 할지, 박제라고 해야 할지, 이미지의 녹여내는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75년 전, 1935년 마를렌 디트리히 사진을 보면서 난 현실을 본다. 내가 보는 현실이란 영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농축한 패션 사진인 동시에, 도리어 화장술, 성형술이 발전하기 전, 자연미를 발견한다.
우습다. 꾸밀대로 꾸민 패션 사진을 보면서, 자연미 운운이라니.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35년 전위적인 마를렌 디트리히부터 71년 농익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까지, 동 시대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과 독재시대를 겪는 동안, 사진 속 매혹적인 여배우들의 사진은 지구 어딘가에서 그런 일이 있는 걸 상상도 못하겠다는 듯, 마치 물과 기름처럼 전혀 낯설어 보인다. 동시대의, 헐벗고 까무잡잡하고 추레한 전쟁 폐허와 그 안의 고아 사진이 더 익숙한 나에게 세실 비튼전은 이질적인 거부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그녀들의 매력으로 발길을 떼지 못하도록 이끈다.
리플릿에 실린 세실 비튼 소개를 보면 “요즈음 신예 패션사진가들조차 흉내 낼 정도로 인물에서 스테이지, 소품과 조명에 이르기까지 패션사진의 교과서가 되는 사진가”라는 평가를 내린다. 여성지 실리는 패션사진들, 둔한 내 눈에도 겹치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진속 여배우들이 워낙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기도 했으나, 사진전을 보는 데에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전시회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사진입니다. 오드리 헵번 뒤로 보이는 당시 런던 시가지가 유독 눈에 들어왔더랬지요.
모델에만 집중하지 않은 이중적인 작품이랄까요. (역마살 님 블러그에서 담아왔습니다.)
배경을 삭제하거나 최소화시키거나 흐릿하게 담은 사진들은 시대를 뛰어넘어서 내 옆으로 온다. 지극히 상업적인 작품들이나,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오드리 헵번의 앳된 얼굴도 반갑고,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젊은 시절의 놀라운 아름다움에서는 늙어 추하게 성형중독에 빠지거나, 스캔들을 일으키는 모습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젊어 워낙 강렬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욕심이라니, 한편으로 씁쓸하지만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가.
마를린 몬로의 이미지들은 딱 당시 대중이 좋아했던 이미지의 연속이다. 당시 수없이 찍었을 사진 중에 초점이 흔들린 사진이 전시장에 걸린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녀의 풍부한 표정은 그녀 주변의 옷, 배경, 소품 등 모든 것을 무의미화 시킨다. 허나 남성들을 미치게 만드는 묘한 백치미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벗어던지고 싶었던 굴레이기도 했다.
당시와 비교도 되지 않는 사진 기술의 발달과 사진의 쓰나미급 범람이 이는 지금, 3D 붐이 부는 요즘,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러 굳이 달려간 이유라면 기술의 발달이 찍는 자와 찍히는 자 사이 농밀한 관계까지 포착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녀들과 사진을 찍고 나서 가볍게 와인이나 맥주를 즐겼을 세실 비튼이 무척 부럽다. 주말, 어수선하고 쫓기듯이 관람하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들한테는 주말 전시회처럼 바글바글한 팬들로 둘러 싸인 게 역시 취향이고 행복일 것이다.*
Cecil Beaton, Greta Garbo, Plaza Hotel, New York, 1946
ⓒ Cecil Beaton Studio Archive at Sotheb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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