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주인이 오셨다] 어떤 말이 그를 주인으로 내몰았는가

구보씨 2011. 4. 21. 15:58

제목 : 주인이 오셨다

일시 : 2011.04.21 ~ 2011.05.01
장소 : 백성희장민호 극장
출연 : 조은경, 문경희, 한윤춘, 이기돈, 김준배, 천정하, 권택기, 김송일, 문호진, 안준형, 유명상, 유영옥
희곡 : 고연옥
연출 : 김광보
제작/주최 : (재)국립극단


2010년과 11년 연극 <루시드 드림>을 기억한다면 김광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습니다. 한국 연극계에서 소극장용 수작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이 작품은 단연 인간 내면을 소극장에 꽉 채워 밀도를 최고조까지 올린 공간감을 선사합니다. 인간의 내면이 응축되었다가 폭발하기 직전의 느낌이랄까요. 몇 번의 재공연에도 매진에 가까운 공연이 이어졌고, 제가 극장을 달리해서 찾았을 때도 늘 만원에 가까웠습니다.

 
고연옥 작가는 임영웅 연출로 산울림소극장에서 <내가 까마귀였을 때>를 <주인이 오셨다>와 동시에 작품을 올린 행복한 작가입니다. 행복이라는 수식어와 달리 그녀는 그리는 인물 군상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지점에 던져놓습니다. <내가 까마귀였을 때>는 밖으로 평범하고 단란해 보이는 중산층 가족을 그 안으로 파고 들어 그 아래 깔린 비극적 정서를 긴장감 가득 희곡에 담았습니다. 이 둘은 진작부터 콤비를 이루어 작품을 만들었다는데, 전 <내 심장을 쏴라>에서 처음 두 사람의 조합을 만났습니다. <내 심장을 쏴라>는 소설이 원작을 둔 중극장 공연인데요. 소극장 공연들에 비교하면  다소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지만 꽤나 멋진 하모니를 보여줍니다. 관객마다 평가는 제각각이겠지만 전 소설보다 좋았습니다. <내 심장을 쏴라>도 결국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멀리 벗어난 얘기는 아닙니다. '관계'에 대해, 특히 가족에 대해서 사회가 정의내린 오래된 관습과 틀을 해체하고 난뒤 남은 끈끈하고도 찐득한  온갓것들을 동시에 우겨넣는 솜씨로 이들만한 조합을 찾기 힘듭니다.
 
올 3월부터 국립극단이 재단법인으로 재탄생하자마자 연신 폭탄같은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연극인이라면 한 번은 꼭 서계동 1번지를 거쳐야 하는 듯한 뉘앙스랄까요.국립극장 봄마당 마지막으로 얼마 전부터 <3월의 눈>을 재공연하지만, 원래 <주인이 오셨다>가 수상한 봄, 꿈틀대는 봄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작품이었습니다. <주인이 오셨다>를 보면 딱 떠오르는 구절이 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 괴물의 심연을 오래 보면서도 괴물이 되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니체의 격언은 당부라기보다는 한탄처럼 들리지요. 영화 <악마를 보았다>로 더 유명해진 니체의 격언은 이제 이 시대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상투적 수사가 되어버린 듯 합니다.
 


<주인이 오셨다>의 연쇄살인범 자루는 소설 <죄와 벌>과 <성경>에서 끌어낸 ‘내 운명에 살인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루시드 드림>의 천재 살인마 이동원이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로 살인마를 겨냥해 자칭 ‘정의로운’ 살인마라는 한 인격체에서 완벽히 균형을 이룬 <덱스터>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그의 내부에서 그를 '주인'으로, 어긋한 '주체'로 만든 원인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고연옥 작가가 4년 전 실제로 벌어진 연쇄살인을 모티브 삼아 작품을 썼듯이 자루가 괴물이 된 원인은 사실 이동원처럼 고상하거나, 덱스터처럼 영재교육(?)을 받은 데에 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자연스레 양성된 살인마입니다.
 
요새처럼 매체의 화려한 매체 이미지에 둘러 싸여 있다보면 어느새 굳이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았는데도, 괴물로 변한, 혹은 변해가는 자신을 보게됩니다. 단지 그 순도가 자루와 다를 뿐입니다. 자루가 연쇄살인마로 막 허물을 벗는 순간을 연극은 보여줍니다. 첫 번째 희생자인 친구 어머니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자루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지만 그 이유를 딱히 극 중에서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스토리 전개에 따른 결과를 바탕에 둔 짐작이 아니라 시대를 견디며 살아가는 그녀가 보여주는 히스테리컬한 반응이 항우울증 치료제 '프로작'이 감기약 만큼 팔리는 한국에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망상이 빚은 강박은 곧 전염병처럼 주위를 오염시키고 결국 '실재'가 되고 맙니다. 
 
작품에서 유일하게 그 강박이나 망상에서 자유로운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착취를 하기 위한 의도로 한국인 시어머니와 남편이 말을 가르치지 않아 벙어리처럼 산 자루의 흑인 엄마 순이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성과 노동을 착취당하고 살았음에도 괴물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30년 가까이 우리 말을 거의 몰랐다는 점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괴물이 되지 않고 특유의 순수성을 보전했다는 설정이 좀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우리말을 몰라 소통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녀가 원초적 생명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도는 자루의 할머니 금옥의 대사 중에 "말을 가르치면 우리처럼 된다"는 주종 관계를 의미하는 대사가 그들처럼 괴물이 되지 않게 된 근거가 되는 역설로 쓰이는 지점을 보게 됩니다. 자유의지를 누르려는 소통의 가학적 단절을 의미하지만 폭력이나 협박이나(그런 의도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계약이 아닌 언어로 속박한다는 설정은 주목할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가 귀와 눈을 닫고 역으로 마치 아프리카 낯선 나라에 살 듯 '단절'만이 우리를 괴물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순이를 두고 내린 해석이 연극의 실제 의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언어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도그빌(Dog Ville, 2003)’처럼 낮은 블록으로 구획만 설정한 상징적 무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시각적 장치를 최대한 줄이고, 고연옥 작가 특유의 축약된 대사를 살리려는 의도지요.
 
이 작품이 결국 연극 밖으로 나와 현실에서는 좀처럼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 따라 결말부에서 얘기하는 순이와 자루 사이 싹트는 화해와 희망이, 작가와 연출의 희망사항일뿐 언뜻 와닿지는 않습니다. 다만  연극은 언어 자체보다는 그 언어가 쓰이는 공간에서 회복을 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순이가 자루를 위해 우리말을 배우고 구사하는 곳은 한국이 아닌 되돌아간 고국 탄자니아입니다. 즉, 오염된 지역에서 벗어나서야 소통의 여지를 열어둔 셈입니다. 그리고 킬리만자로에서 흐르는 생명샘이 상징하는 그 곳은 괴물이 되어버린 자루를 구원할 원초적 생명성이 넘쳐나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소통이전에 회복을 할 수 있을 만한 에너지가 충만한 곳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루가 순이와 말을 나누기 위해 탄자니아어를 익힌 공간은 사형수 신분으로 갇힌 좁은 독방입니다. 오염된 언어로부터 구원을 받는 방법으로 새로운 언어, 소통 방식의 전환은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감옥은 언뜻 순이가 있는 탄자니아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공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감옥이 자루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한 공간인 동시에 자루가 외부로부터 비로소 벗어난 공간이기도 합니다. 외부와 단절과 새로운 언어의 습득, 감옥은 어머니의 자궁과도 겹칩니다. 우리가 사실 새로운 언어를 처음 듣는 곳은 어머니의 뱃속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순이가 한국어를 몰라 표독스런 독기를 품은 시어머니와 남편의 욕설에서 자유로웠다는 설정은 자루가 엄마의 순수함을 잃지 않은 언어가 그의 시작이었고, 곧 결말에서 보여주는 구원의 여지가 가능했다는 복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의 암울한 이면을 무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현실의 유효한 문제를 끝까지 놓지 않으면서도 연극 미학으로, 새로운 형식으로 풀어낸 <주인이 오셨다>는 여러가지로 생각할 여지를 두는 작품입니다.*

사진출처 -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