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사형絞死刑
부제 : 국가, 괴물을 만들다
일시 : 2011.04.28 ~ 2011.05.22
장소 : 정보소극장
출연 : 전이두, 하지웅, 강동수, 김은혜, 이경섭, 김준원, 최재형, 문종선, 양종민
원작 : 오시마 나기사
각색/연출 : 윤복인
기획 : 바나나문프로젝트
주최 : 극단 풍경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를 묶은 <정의란 무엇인가>가 인문학 서적으로 드물게 100만부 넘게 팔렸다. 실제 사례를 통한 생생한 강의, 하버드대학 교수라는 명성, 베스트셀러에 쏠리는 독서문화 등 이 책이 한국에서 관심을 받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무엇보다 2010년과 2011년에 걸쳐 한국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데에 대한 갈등이 끓는점을 넘어선 데에 가장 큰 이유를 둔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요즘, 며칠 전 31년 기념일을 맞은 광주민주화항쟁 당시에 비하면 민주화된 사회인 점은 분명하나 경제적 박탈감에 더해 어째 피부로 느끼는 민주화 지수도 상대적으로 점차 낮아지는 듯하다. 4.27 보궐선거의 결과도, <정의란 무엇인가>의 판매부수와 연관을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본다.
<감각의 제국>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1968년 작 <교사형>이 연극으로 한국 무대에 올랐다. 영화는 1958년 8월 일본인 여학생 둘을 살해한 후, 언론사에 전화로 알린 재일교포 이진우의 사형을 두고 만든 작품이다. 일본과 한국 사이 민족 감정을 건드리는 요소가 많지만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국가 체제가 가진 폭력성에 주목했다.
연극이 동시대 호흡이고 보면 연극 <교사형>이 의도하는 바는 반일 감정이나 해묵은 감정을 끌어내려는 의도가 아닌 게 분명하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근로정신대 문제조차 제대로 된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는 지금, 이진우 사건이 일본을 보는 시각에 딱히 영향을 주는 건 아니다. 작품에서 한국인 차별 문제를 비중 있게 묘사하긴 하지만, 제3계급 차별은 역사에서 늘 상존한 문제이다. 당장 이주노동자, 중국 동포를 향한 우리 사회 시민의식 수준을 보면 남 얘기하듯 꺼낼 얘기는 아니다.
이 작품이 한일 간 미묘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보편적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는 건 이진우라는 실명 혹은 가명 대신 카프카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식으로 불특정다수를 의미하는 ‘R'이라 부르고, 그를 사회적 살인으로 내모는 이들에게 이름 대신 교육부장, 의무관, 신부 등 사회적 지위로 대신하는 데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극 안으로 들어가서, 이진우가 법정 교사형 시간 4분을 넘겨 살아난 이후 벌어지는 상황을 두고 그를 다시 죽이기 위해 벌이는 형태는 프란츠 카프카가 소설 <소송>이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프란츠 카프카는 오스트리아 치하의 프라하에서 지배자인 독일인도, 피지배자인 체코인도 아닌 어중간한 제 3자인 유태인으로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 15년 동안 근무하면서 법의 속성을 확실히 꿰뚫었다. 소설 <소송>에서 “죄가 없는데도 재판을 받을 뿐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에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이 재판제도의 특징”이라는 고백은 죽음이라는 심판이 기다리는 불안이나 소외에 대한 은유나 상징이라는 해석보다는 그가 몸소 체험한 현실을 지배하는 구조적 권력구조를 겨냥한 구절로 봐야 한다.
‘국가, 괴물을 만들다’라는 연극 부제는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한순간 무능력한 인물로 사회나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현실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로의 변태로 이어진다. 교사형을 받았으나 다시 살아난 이진영 역시 산 것도 아니요, 죽은 것도 아니며, 과거를 잊었으니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조센진’의 차별적 지위마저 박탈당한 벌레 혹은 괴물로 전락하고 만 존재이다.
사형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검사가 객석에 앉아 있다는 등장하는 방식이나 마지막 구호에 따라 통일된 행동을 하는 교육, 의료, 종교, 보안, 검찰 관련 인사들의 행동은 의미하는 바가 있지만 다소 그 의미를 직설적으로 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소극장 여건에 따른 제약일 수 있지만 틀만 세운 교도소 감방이 형태를 다 갖추지 못한 채로 집으로 변했다가 다시 사형대로 바뀌는 형태가 인상 깊다.
사회로부터 기인한 권력의 폭력으로부터 마지막 마지노선이 되어야할 가정이 이미 원폭을 맞은 듯 허물어진 형태에 그 안에 모인 가족들이 벌이는 행태가 감옥에서 벌어지는 아귀다툼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가정이란 게 얼마나 얄팍한 막으로 싸인 구조인가를 되묻는다. 그 구조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으로 연극은 조선인 여인을 등장시켜 R의 조선인으로 존재 가치를 일깨운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나,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구성은 그가 처음 교사형을 당할 당시에 죽기 직전 상상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허나 민족의식, 혹은 여성성이 과연 그 해답이 될까.
카프카는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혁명을 부르짖는 대신 내면부터 철저히 반권력적으로 뒤바꾸고자 했다. 나를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내 안의 성찰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극단 풍경의 2008년작 <마라, 사드>의 폭발력을 기대했던 데에 비하면 다소 아쉽지만 시의적절한 질문을 던진 작품이다. 요사이 목이 죄는 느낌이 들었던 게 괜한 노파심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사진출처 - 극단 풍경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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