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령화 가족] 가장 불행한 나이를 견디는 아저씨 아줌마들을 위하여

구보씨 2011. 3. 31. 15:50

작 품 명 : 고령화 가족

공연장소 : 설치극장 정미소

공연기간 : 2011. 3. 31(목) ~ 2011. 4. 17(일)

원 작 : 천명관

연 출 : 문삼화

각 색 : 황이선, 문삼화

조 연 출 : 김묘진

출 연 : 지대한, 오민석, 김지원, 김시영, 김대진, 한철훈, 김 설, 이현균

제작/기획 : 공상집단 뚱딴지



나의 삶 나의 역사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 287쪽

 

소설 말미, 주인공 오인모의 독백은 참으로 절절하다. <고령화가족>은 160Km 강속구를 던진다는 도미니카 출신 용병 투수 LG트윈스 리즈 씨가 종종 3회를 넘기면 스태미나가 떨어지듯 전작 <고래>에 비해 힘이나 모양새가 덜하지만, 썩어도 준치라! 천명관 소설답다. <고래>와 <고령화 가족> 사이 단편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있으나 <고래>와 <고령화 가족>이 서로 등을 바짝 맞대고 서 있는 식이다. ‘대하 구라’라 불리는 <고래>와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으나 한낱 헛꿈만 들이킨 ‘오인모’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낸 얘기가 <고령화 가족>이라 보면 될 게다. 40대 후반 주인공이 작가 천명관의 나름 아슬아슬한 인생 여정을 코믹 버전으로 풀어낸 인물이 아닐까. 트라우마가 될 뻔했으나 다행히 페르소나가 된 셈이다.

 

벨기에 소재 마스트리흐트 대학교 연구원 이코노미스트 베르 반 랑드흐헴 씨의 ‘연령별 직면하는 환경적 특징’ 연구 발표를 인용한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4월 17일 자 보도를 보면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나이가 45세란다. 가보지 못했지만, 분명 우리보다는 복지도 잘 되어 있고, 최고의 와플을 만드는, 그러니까 살기 좋은 서유럽 국가 벨기에마저 그렇다니! 참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삶이란 건 공평하달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저 나이를 한국에 적용하면 한 다섯 살쯤 당겨야 한다. 40살이면 한국에서는 이미 퇴물 취급을 받는 나이다. 제 2의 창업으로 제 2의 인생을 꿈꾸지만 뭐 ‘동네 사장님’ 소리도 경기 여건에 따라 그다지 오래 듣지 못하는 형편이다. 불혹(不惑)의 방부제 피터팬 서태지도 알고 보니 진작 혹했다가 혹을 붙였다 뗀 이혼남이 된 지 한참이라는 게 밝혀진 판이니 현실은 참 무쟈게 솔직냉정하다. 클렌징크림을 뭘 쓰는지 여전히 동안이지만 ‘과부 삼년이면 은이 서 말, 홀아비 삼년이면 이가 서 말’이란 속담을 적용하고도 남을 때가 지났다. (한국 법정 생각은 다르다는 게 상대방 주장이지만 말이다.)



  

뚱딴지

아무튼 자,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접착제 소설이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나이대 남성들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 똑! 라면 그릇에 떨구게 하는 소설이 연극으로 나왔다. “난 밀가루를 파는 사람이다. 밀가루로 어떤 빵을 만들든 파티쉐 몫이다”라고 얼추 비스무리한 얘기를 소설가 장정일 씨가 한 적이 있다. 90년대 한창 그의 소설을 원작삼아 영화가 쏟아져 나올 무렵, 작품성과 흥행성 평가가 제각각인 경우를 두고 한 인터뷰 내용이다. 옳다. 친환경 유기농 밀가루라고 해서 꼭 맛있는 빵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뭐, 브랜드를 보고 사도 쥐식빵 자작극을 보면 께적지근하긴 하지만 암튼 누가 파티쉐인지 확인해보지 않고 무작정 환호를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고령화 가족> 출간 1년 만에 전격 연극이라, 그 발 빠른 행보를 더듬어보니 극단 ‘공상집단 뚱딴지’이다.

 

2009년 <언니들>과 2010년 <안녕, 피투성이 벌레들아>로 만난 적이 있는 극단이다. 문삼화 씨 대표가 연출을 겸한 극단은 이름과 다르게 주로 치열하게 한 주제를 놓고 치열하게 파고들어 묵직한 작품을 선보인다. 다시 말하면 최치언, 최원종 등 문제작을 쓰는 희곡작가들과 주로 작업을 하고, 작품마다 형식미를 강조하는 경향이라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품을 올린다. 상업성에 매몰되지 않고 밀어붙이는 좋은 극단이라 생각하지만 <언니들>과 <안녕 피투성이 벌레들아> 사이 작품 편차가 있다고 본 터라 차기작을 두고 쉽게 단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희곡으로 읽어도 제대로 알아먹지 못할 상징으로 가득한 희곡에 이은 선택이 난데없이 천명관이라니! 우선 풀어내는 방식에서 “뚱딴지스러운” 연극적 실험과 무난한 <고령화 가족>이 잘 맞을까 싶다. 스타일을 봐서는 <고래>와 더 잘 맞지만, 또 그런 작업을 연극으로 해내길 원하지만, 제작 여건상 쉽지 않아 보인다. 암튼 어쩌다보니 매년 뚱딴지 연극을 1편씩 보고 있다. (<언니들>은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길 바란다.)


 

 

연극, 무대

천명관 소설가가 자칭 '가진 책이 가장 적은 소설가'라는 말하는 의미 뒤에는 ‘가장 비디오/DVD/다운로드 개수와 횟수가 많은 소설가’라는 반어법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 각색 및 작가 출신답게 묘사 대신 주어 서술어로 쭉쭉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이라, 무대로 잘 만들어도 본전이고 자칫 뚱딴지 특유의 스타일로 데코레이션을 했을 때는 “뭥미?”라는 한줄 평이 소보로빵 곰보만큼이나 다다닥 내붙을 판이다. 캐릭터를 잘 살린 원작이란 딱 양날의 케이크 검이다.

 

소극장 무대 공간을 비워두고, 대신 뒤로 돌리면 그림을 붙여 가구가 되는 이동식 의자를 주요 오브제로 삼아 자유로이 사용한다. 가족 구성원 5명에 맞춘 5개의 소품은 각각 독립적으로 고독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쓰이기도 하나, 가구란 게 한 가지라도 빠지면 살림살이가 불편하듯이 다섯 명이 한 가족을 이룬다는 중의적 의미로 쓰인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무대 뒷벽 위쪽에 왠지 옥탑방 옥상마당 느낌이 나는 높은 단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기타를 치는 최인영 작곡가 배치이다. 극단 뚱딴지와 인연이 깊은 그의 솔로 연주 및 노래가 서정적인 편이어라 코믹극에 잘 어울릴까 싶지만, 앞서 말했듯이 바탕에 4학년 5반의 4전 5기 특유의 짠한 분위기와 나름 잘 어울린다.

 

장편 소설 한 권 분량 에피소드 대부분을 연극에 고스란히 살린 탓에 축약시켜서 보여주는 통에 끝 간 데 없이 재기발랄에 빠질 수 있는 무대를 정서적으로 다독이면서 속도를 조율한다. 반대로 가족의 일상이란 게 허름하고 좁은 빌라에서 벌어지는 장면이 많지만 캐릭터마다 주조연 가리지 않고 집 안팎으로 두루 다니면서 사고를 쳐대는 통에 잦은 무대 암전과 전환을 보완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작은 콘서트 무대, 옥탑방이라고 했으니 달빛 소나타 무대가 연극 속도 관성이 아주 끊이지 않도록 이어받는 역할도 겸한다. 소극장 연극에서 보기 드문 생生연주가 묘미일 수 있지만 꼭 필요한 배치였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고심의 흔적으로 보이는 건 분명하다.

  

  

인물, 화상들

평균 가족 나이 49세의 중심축을 이루는 삼남매가 각각 참 별종들이지만, 그중 극강 캐릭터는 단연 손의 위치나 움직임이 참 민망하게 솔직한 첫째 오한모이다. 조카 빤스에 코를 박고 자위를 하거나, 추리닝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북북 긁어대거나, 콧속을 헤집는 백수건달의 제왕이다. 지천명(知天命)의 의미를 어떤 면에서 제대로 깨달은 오한모 역에는 연극보다 영화로 눈에 익은 지대한 씨가 맡았다.

 

가끔 형사반장 역할도 맡지만 주로 쫓는 대신 쫓기는 사채업자, 산적, 불법음반사장 등에 익숙하고 돌돔, 도끼 등 왠지 윤리적, 도덕적으로 사람 역할을 하지 않을 게 뻔한 영장류가 아닌 호칭으로 불리는 역할을 내내 맡아온 이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역할은 심형래 감독의 가족SF액션 영화 <파워 킹> 몬스터 역이다. 따로 이름이 없다. 그냥 몬스터다. 포스터를 보면 흠, 그리 많이 분장하지 않은 듯)

 

천명관 소설가가 그를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닐까. 지대한 씨는 <고령화 가족>이 영화가 된다 해도 동시 캐스팅 영광을 안아 마땅하게 역할을 소화한다. 지대한 씨 외에도 극단 뚱딴지 소속 배우들 연기가 꽤나 능청스럽다. 전작 <안녕 피투성이 벌레들아>에 비해 한결 덜 죽고 덜 비극적이며 덜 무거운 작품이지만 물을 만난 듯이 소설 속 인물들을 잘 살렸다. 이 배우들을 그대로 영화나 드라마로 옮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엄마를 부탁해

젊은 총각 한철운 배우가 모래밭 이복 삼남매의 중심축 엄마 역할을 맡은 선택을 두고는, 해석이 좀 멀리 가지 않았나 싶기는 하다. 그 나이 또래 중년 여성 연기자들이 흔치도 않고 신파극에 익숙하다고 보면 별나기로는 멀티 역으로 등장하는 동네 깐족 할멈 3인방을 묶어 덤벼도 이길 캐릭터인지라 섭외 및 연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나이 든 노인들이 무성성을 띈다는 점, 일방적 희생 혹은 사랑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도 접점이 없지는 않고, 사고뭉치 삼남매를 홀로 키우려면 마른 장작마냥 빠짝 마른 그이가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것은 또 아니다.

 

자살 외에 다른 선택지가 남지 않은 홀아비 아들 둘과 바람피우다 쫓겨난 딸과 되바라진 외손녀를 “6·25 전쟁 때는 한 집에 62명이나 함께 산 적도 있었는데 다섯 명이 같이 사는 거야 별 거냐”며 받아들이는 부동산등기부 갑구 소유자 항목에 홀로 올라 있는 엄마는 집안 중심축으로 극중 비중에 비해 가족이라는 주제로 보면 작품 100%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다 꺼진 재를 뒤져서 겨우 되찾은 가족애 재확인 해피엔딩 전개를 연극이 바꾸지 않았으니, 엄마는 꽤나 중요한 인물이다. 다만 딱 떨어지게 뚜렷한, 혹은 전형적인 다른 역할에 비해 상대적으로 모호한 캐릭터인지라 배우 연기를 탓할 수만은 없다. 다만 연출의 남자 배우 선택이 그리 효과적이지 않아 보이는 건 사실이다. 일흔을 넘겨 한때 불륜 상대이자 셋째 인숙이 친아버지인 옛사랑과 재혼을 해 식지 않는 사랑을 과시하는 에피소드와도 잘 연결되지 않는다.

 

 

  

잉여인력

누가 읽어도 공감할 만한 원작 선택으로 누가 관람해도 재밌게 관람할 작품이 극단 뚱딴지 작업에서 연속선상에 있다면 이전 작들이 내내 소외된 계층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겨누는 시선, 풀어가는 방식, 주제 의식이 다르달지, 보다 편해졌달지 그렇지만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연극으로 ‘남루한 인간애 희망 찾기’를 보는 재미는 한편으로 반가울 만하지만 주인공 오인모가 에로감독으로 인정을 받는 마지막 장면 등은 에로 장르가 ‘과장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성상’ 이라는 등의 이유로 아마 극단이 문제 제기를 할 법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원작의 구라 아우라에 부담이 크지 않았나 싶다. 


(극단 뚱딴지는 바로 이어 제7회 여성연출가전에 리어왕을 여왕으로 세 딸을 세 아들로 재설정한 <리어 - 셰익스피어, 여장하다>로 참여했다. 이 작품도 모자간에 초점을 맞추면서 고령화 사회와 비슷한 선상에 있는 소재를 다룬다.)

 

뭐, 안다. 연극 <고령화 가족>은 원작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래도 두 시간 남짓 연극 안에 그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기란 애초에 무리였다고 본다면 보다 굵은 에피소드에 집중을 했으면 극단 특유의 개성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굳이 오인모의 에로 영화 감동 성공을 짚고 가는 이유는 ‘19금 전성시대… 에로영화 시장은 한파'라는 2011-03-31자 머니투데이 기사에서 보듯 에로비디오 시장이 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천명관이 소설을 쓸 당시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출간 당시인 2010년에도 죽을 쑤긴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연극이 동시대와 호흡을 하려면 요런 점은 수정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에로영화시장의 한파를 안타까워하는 관객 입장에서도 그렇고, 신인 감독(?) 오인모가 10년 전에 비해 10분의 1로 줄어든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리뷰 첫 단락에서 인용한 ‘나의 삶, 나의 역사’가 자칫 유서(?)처럼 읽히면서 가슴이 더욱 짠했다. 웃기만 하자고 만든 연극은 아니니 관객을 위해서, 또 실제 비슷한 30~40대 루저들을 위해서 좀 더 세밀해야 한다. 극중 첫째 오한모의 지지리 궁상을 보면 알겠는데 할 일없는 그 나이 또래 남성들에게는 에로시장 불황은 참 민감한 부분이다.

 

팸플릿을 보면 뚱딴지 포인트 쿠폰이 달려 있다. 공연 추천을 하면 공연 할인 혜택과 1,000원 캐시백을 해준단다. 직접 계좌로 돌려준다는데, 그러기에는 노고가 많다는 생각이 들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다. 황이선 각색과 김묘진 조연출은 극단301 소속으로 전에 종종 만난 적이 있는 능력 있는 젊은 연극인들이다. 선후배 연극인들이 가족처럼 한 작품을 만드는 걸 보면 이 작품은 두루 연극인들이 봐야할 작품이겠다.*

 

 

사진출처 - 극단 뚱딴지, 연합신문(강일중 기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