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만월[Full Moon]처럼 꽉 찬 당신의 삶이길[This is your life]

구보씨 2009. 11. 6. 16:27


“치명적인 달빛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다”

그러니까 특별히 치고받고 살지도 않은 주제에, 남들 사는 꼴로 살겠다고 용을 쓰는 사이에 뭣 하나 제대로 버무려놓지도 못하고, 만두소를 한 양재기 재워놓고는 피를 빚다만 꼴로 무심코 손에 더덕더덕 붙은 삶의 이력이라고 부르는 군더더기들이 뭔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 어느새 사는 게 재미없어진 나는 새로운 자극을 찾게 된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배운 것들로는 해석이 안 되는 방식을 찾는 것인데, 여기에는 참을 수 있는 방식과 참을 수 없는 방식이 있다. 전자는 이제 얘기할 '댄스씨어터 까두'의 까고 또 까도 눈물만 빼놓지 속내를 들키지 않는 둥근 양파 같은 무용극 <Full Moon>이고, 후자는 대부분 신문에 나오는, 왠지 쇼 같고 어이없는 애들 장난 같은 대부분의 얘기들이다.


만두, 양파, 달 뭐가 떠오르시는지, 둥글기도 하지만 싸구려 중국집에서 물만두 놓고 마시는 고량주 한 잔, 날 떠난 그이 생각으로 눈물짓던 과거가 그이에 대한 죽고 싶은 과오와 겹쳐 떠오르지 않으시는지. 그때는 둥근 것들을 놓고 삐죽삐죽한 날 두고 후회를 거듭했던 기억만 가득하다.


갑자기 뭔 헛소리인가 싶겠으나 치명적인 달빛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다, 라는 공연 카피는 ‘치명적인’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달빛의 아름다움’에 잠시라도 ‘사로잡히다’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나마도 그때였다는 말이다. 상투적으로 내뱉자면, 종이컵 맑간 고량주에 뜬 달이 위안이 되었으니 여태 별 일 없다는 듯 살지 않았겠나.

 

신이 허락한 창조의 원동력 <Full Moon>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는 무용을 전공하지 싶은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바짝 올린 머리모양새가 또 잘 빚은 만두로도 보이기도 했고, 그러니 하나하나가 작은 달처럼도 보여서 근사했다. 뭔 달이 이렇게 많냐고 하실 량이면 달빛이라는 게 스스로 내는 빛이 아니라는 것쯤 상식이라니 앞자리에 바짝들 모여 앉아서 뚫어져라 무대를 보는 요 아이들이 뒷머리가 공연에 덧대서 갓 털이 나기 시작한 새끼 새 알머리통 마냥 참 예뻐 보였다는 거다.


신이 허락한 창조의 원동력이라, 아무리 공연이 좋아도 거창해서 좀 어색하다. 때때로 깨졌다가 붙은 거울 혹은 메워졌다가 다시 솟아나는 샘처럼 무대 뒷막에 달이 오르락내리락 앞뒤로 왔다갔다 시시각각 달라지며 바뀐다.  밀물과 썰물이 달의 당기는 힘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지만 물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건 지구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자전을 하기 때문이라지.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달의 색채 속에 숨겨진 광기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서 달의 광기가 아닌 ‘광기를 찾아가는’ 주체로 까두 무용수들의 공연은 탁월하다.


공연 메인 이미지로 쓰인 4장, 밑에서 사람이 받쳐 들어 길게 늘인 몸을 붉고 풍성한 셔링 드레스로 감춘 무용수의 등장은 분명 실체가 그렇다면, 아니 붉게 물든 만월을 배경 영상으로 두고 음악과 조명과 합일치가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매혹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습이 실체라면 기형 혹은 괴물이요, 실체가 아니더라도 거리 조절에 실패해서 코앞에서 두고 봐도 기괴하다 여기기 십상인데, 지구와 달과의 일정한 거리가 달을 매혹적인 무엇으로 보이게 하듯이, 무대 뒤쪽에서 객석과 충분히 거리를 두고 펼치는 몸짓을 보는 내내, 느릿느릿한 관능에 빠져 가슴이 두근두근 달떠서 아찔아찔했다.

 

까두加頭답게 머리를 모았으면 이제

까두는 한자로 더할 가(加)에 머리 두(頭), 가두(加頭)로 상호 교류하고 있는 여러 장르의 아티스트간의 머리를 합한다는 뜻이란다. 외골수로 치닫지 않고 머리를 모은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리고 이제 가두에 더해서 달덩이만한 대두(大頭)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소리다. 정신병원을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의외로 정신병 환자들의 이른 바 광기는 밖보다 안에서 요동치기 마련이긴 하지만, 춤만큼 인간의 RPM을 올리고 온도를 올리고 머릿속에 분쇄기를 넣은 양 하얗게 형상화 하는 게 또 없는 법이라 광기에 참 잘 어울리고, 또 잘 표현했다.


피를 닦아내다가 결국 하얀 옷에 피칠을 하고는 요동을 치는 3장이나, 보기에는 가장 이질적일 수 있는 여성 보정 속옷을 입고, 팬티스타킹을 뒤집어쓰고 정신 줄을 놓지 싶게 품에 몰입한 5장은 광기가 형상화로 드러난 대목이다. 하지만 3장, 5장은 광기가 스며드는 과정이라기보다 되레 지극히 당연한 인과 관계로 보인다. 3장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씻는 행위로부터 시작된 진행은, 공연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자살 시도였든 살인 이후 남의 피였든 혹은 실수로 살짝 베었든 어떤 행동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씻는 행위 이전이 광기라면 광기이지, 감추려거나 지우려는 의도가 광기일 수는 없다.




5장은 광기가 아니라 즐거운 욕망의 분출이다. 양복 차림의 남자는 막 퇴근한 듯 무대를 뚜벅뚜벅 걸어온다. 서류가방을 열면 여성 속옷이 들어있다. 그리고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옷을 벗으면 여성 속옷을 입고 있다. 이른바 복장 도착증[Transvestism]인데 이를 두고 광기라고 한다면 정말이지, 갑자기 이 작품이 해묵은 윤리 교과서로 전락하는 꼴이다. 광기라는 듯이  춤사위가 난잡스럽기는 하지만, 난 기꺼이 환희의 절정으로 봤고, 만약 광기라면 춤추는 주체가 그 환희를 제대로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 군무 전, 7장 안무가 박호빈이 솔로이스트로 선보이는 태극권은 극의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좋은 순서에 놓였고,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삼은 무술이라 영 동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전체와 어울려서 동의하기에는, 볼 때는 좋다고 하면서 봤는데, 6장에서 저승사자 카론이 등장한 뒤라 급작스러운 인상을 준다. 춤으로 형상화한 태극권 경지에 오르려면 지난한 수행의 과정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움의 일부인 달의 변화, 그에 따라 변하는 물 스미듯 찾아오는 광기가 태극권이라는 의지로 마무리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광의로 해석하면 우주의 질서를 조율하는 누군가, 이른바 절대자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너무 손쉬운 해결이라 맥이 빠진다.  

 

사두(思頭)가 되거나 이대로 돌이 되거나

<Full Moon>에 이어 잠시 숨을 고르고 올라간 허용순의 모던 발레극 <This is your life>는, 내내 말이 없던 옆자리 일행이 딱 자기 얘기를 모아놨다고 좋아했다. 그래, 딱 이게 당신의 인생이었고, 나의 인생이었다. 무용수들이 여느 배우들 못지않게 말도 잘하고, 연기도 잘해서 익숙한 패턴이지만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고개를 들어 원경(달)을 쳐다보던 시선이 숙여서 근경을 보여주는 셈이다. 서로 다른 작품이지만 박호빈과 허용순은 단짝이다.


공연을 본 11월 7일(토)로부터 딱 1년 전, 2008년 11월 7일(금)에도 2008서울국제공연예술제 국내초청작 ‘허용순과 박호빈의 만남 Crossing the Dance’를, 극장도 같은 곳인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무용극이냐며 내쳤던 게 기억난다.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인간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왜냐하면 머리가 발보다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경험뿐이니까.) 그러나 나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한 것은 돌이나 혹은 짐승일 것이다.” 


위대한 갈대, 파스칼이 <팡세>에서 한 말인데, 맞는 말이다. 작년만 해도 사는 게 재미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렉lag이 걸렸다. 이제라도 내가 모르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엉성하게라도 머리를 쓰는 건 참 즐겁다. 달을 볼 때마다 만두에 고량주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될 좋은 기억을 담았다.*


사진출처 - 2009서울국제공연예술제(www.spaf.or.kr/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