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북한에 억류된 가족이 윤이상의 권유로 월북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종종 언론에서 봅니다. 故 윤이상의 가족과 그들의 주장이 대립하면서 법적 절차를 거쳐 해결을 기다린다는 소식입니다. 그 사이 통영에서는 윤이상을 기리는 음악제로 알려진 통영국제음악제를 두고 이런저런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결론이 나지 않은 주장이고 법적인 절차를 밟고 있다면,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하는 통영국제음악제를 두고 새삼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윤이사, 나비 이마주>가 지금 올라갔다면 논란이 될 수 있겠다 싶지만 그가 왜 독일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전에 쓴 연극 후기를 올리다 보면 지금 현실이 다시 보이기도 합니다.)
제목 : 윤이상, 나비 이마주
기간 : 2009.10.22 ~ 2009.11.08
장소 : 문화공간 엘림홀
출연 : 최홍일, 이병술, 강승민, 유화영, 고기혁, 김경환, 이선희(피아노 반주 문선영)
희곡 : 홍창수
연출 : 김수연
제작 : 은세계 시어터컴퍼니
무대 배경 한 가운데, 거대한 첼로 형태의 구조물이 서 있다. 음악의 거장, 윤이상을 상징하는 조형물일 게다. 그런데 다시 보면 첼로의 목이 잘려나갔다. 첼로 위로 영상을 투사하기 위한 무대 장치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인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東伯林은 당시 동독의 수도였던 동베를린을 한자로 음차한 명칭이다.)이라고 부르는 '동베를린공작단 사건'으로 독일에서 서울로 강제소환, 예술혼이 절정에 달할 즈음에 2년간의 옥고를 치른 과거를 비유했지 싶다.
사람들은 대중가요 작곡가 윤일상은 알아도 윤이상은 잘 몰랐다. (연극을 보고 술 자리에서 만난 이들 중에 실제로 윤일상과 윤이상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 연극을 보기 전까지 나라고 막연히 ‘세계적인 작곡가’에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알량한 수준이었으니, 누구를 탓할 게 아니다. 연극을 보는 내내, 피아노 라이브 연주로 윤이상 작품을 연주하지만 하나같이 귀에 낯설다. 부끄러움 이전에 독특하고 생경한 음악은 윤이상이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았고, 왜 당시 유럽에서 화제를 모았는지 짐작을 하게 했다.
마흔 살 뒤늦게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직후부터 마지막 생을 마감할 때까지, 윤이상의 일대기를 그런 작품은 예술에 대한 윤이상의 무서운 집착이 드러난다. 옥고를 치른 계기가 된 북한 방문 역시, 연극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작품, <IMAGES>를 작곡하기 위해 '고구려 강서고분 사신도'를 찾아간 일이 계기이다. 특별한 연극적 장치 없이 조명의 전환으로 무대와 시간의 전환을 선택하는 연극에서, 영상으로 특별히 강조하는 강서고분 사신도와 이에 열광하는 윤이상의 모습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민족의 화합이 한 맥에서 나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단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그의 발상은, 이후 옥고로 이어지지만 옥중에서도 그의 자유로운 예술혼은 <나비의 꿈>을 내놓는다. 이후, 그의 71년 독일 귀화는 남북한의 화합을 염원하는 그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연극에서는 그에 대한 정치적 박해와 더불어 그의 정치적 견해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정치적 지원 활동과 전두환 집권 이후, 군사독재에 대한 강한 적의 역시 마찬가지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81년 <광주여 영원하라>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음악이 흐른다.
윤이상의 삶은 장자의 호접몽과 아우슈비츠 나비에 대한 비유로 마무리된다. 삶이란 한 순간 꿈일까. 우주의 음악을 듣고 만지고 보고 싶어 했던 그의 바람을 잘 보여준다. 그 무한한 시공간에서 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짧고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서 한낱 나비의 꿈인가 싶지만 하늘하늘 제한 없이 가볍고 자유로운 날갯짓은 우주와 소통하는 방식이고 또 그 찰나의 조우이다. 아우슈비츠 나비는 나치 치하, 게토에 살면서도 희망을 노래했던 유태계 아이들의 시 ‘나비’에서 따온 것이다. 끔찍하고 암울한 지옥에서,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짧은 인생을 마감하지만 그 아이들의 노래는 희망을 노래했다. 이는 귀화와 이후 조국으로부터의 냉대, 멸시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윤이상, 나비 이마주>는 연극적 이해 이전에 윤이상에 대한 이해가 먼저여야 비로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품격을 유지한 공연은 거장의 삶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이지만, 선이해가 동반되지 않으면 다소 딱딱하고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그의 삶의 이력과 예술혼과의 조화에 좀 더 고민을 해봐야한다. 듣는 귀게 천박한 나는 잘 모르겠으나, 같이 간 지인은 윤이상 역 최홍일 배우의 발성이 매우 연극적이면서 또렷했다고 했다. 직접 작곡을 하거나 연주를 할 수는 없겠지만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했다. 어느 정도 동의하는 대목이다.
호접몽의 나비와 아우슈비츠의 나비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와서 윤이상에 이르러 합쳐지지만, 자칫 두 마리 토끼, 즉 두 마리 나비를 놓칠 수도 있다. 그러나 윤이상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조명은 후대 우리의 과제이다. 그가 날갯짓을 한 궤적을 좇는 일은 남북한의 분단 현실이 답보를 거듭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예술과 참여가 하나가 된 그의 삶은 분명 둘 중 무엇 하나 변변하게 하지 못한 대부분의 예술가 혹은 정치가들에게, 그리고 장삼이사에게도 그렇다.*
사진 출처 - 은세계 시어터컴퍼니, 뉴스스테이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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