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게릴라극장 젊은 연출가전 4 <코뿔소>
기간 : 2009년 11월 27일 ~ 2009년 12월 11일
장소 : 게릴라 극장
원작 : 외젠 이오네스코
각색, 연출 : 오동식
출연 : 김호윤, 김현후, 홍민수, 김철영, 신주연, 김지훈, 이기현, 김현주, 제은화, 박혜린
제작 : 연희단거리패
올해 이오네스코 탄생 100주년으로, 기념 페스티벌이 지난 3월과 4월에 걸쳐 열렸다. 그때 놓친 출품작 가운데 느지막이 11월에 연희단거리패의 <코뿔소>를 만났다. 극단 노을의 <수업>과 더불어 겨우 두 편을 봤을 뿐이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난 <코뿔소>는 이오네스코를 기리는 의미에 더해, 작품의 품은 함의로 보건대 한국 연극계에 전 방위로 몰아치는 좌파 논란을 비롯한 각종 한파를 견주어 꽤 시의적절한 작품이다.
‘이오네스코 탄생100주년 페스티발’ 주최와 공동 기획으로 게릴라극장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만큼 이오네스코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코뿔소>를 두고 기대가 연출가 오동식의 말을 빌자면 “한 없이 커지는 새로 온 하숙생의 몸덩어리”처럼 컸다. 하숙생 몸덩어리를 어떻게 무대에서 구현할지 골머리를 앓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말이다. 연출가의 고뇌와 배우들의 수고는 곧 관객의 기쁨이라고 보면 연희단거리패가 쌓은 신뢰는 코뿔소 껍질처럼 두껍고 그 뿔처럼 우뚝 서 있다.
우선 오동식 연출의 걱정에 한마디 더하자면 “블록버스터 급 영화의 CG가 연상될 정도의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이오네스코식 무대 활용을 연희단거리패는 코뿔소가 등장하는 순간 부서지는 벽과 뿌연 코뿔소 방귀로 생동감 있게 잘 살려냈다. 손쉬운 선택으로 영상을 사용할 법도 한 게, 또 요새 연극에서 흔히들 사용하는 바라 공연 시작 전에 그리 짐작했다. 하지만 연희단거리패는 소품 벽돌을 하나하나 일일이 벽에 꿰맞춘 뒤, 벽을 흔들어 떨어뜨리는 방식을 우직하게 택했다. 거기에 코뿔소를 등장시키는 대신 관객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뿌연 코뿔소 방귀를 사방에서 쏘아댄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게 아닌 것이 이런 제작 방식을 CG대신 실제 스턴트를 고집하는 액션 배우의 얘기를 다룬 류승완 감독의 <타임리스> 입을 빌자면 “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 진짜엔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것”이다. 말로 확인되는 가치도 아니고, 어쩌면 관객이 알아주지도 않을 수도 있지만 CG로 아무리 똑같이 만들어도 감동이 다르다는 게 그 영화의 지론인데 이는 연극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소 호흡이 안 맞기도 하고, 뻔히 뒤에서 벽을 흔드는 게 보이기도 하는 게, 자칫 어설픈 특촬물 세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코뿔소> 무대의 우직함은 단순히 우직하다는 찬사에 그치지 않는다. 세트라는 걸 관객들은 이미 알지만 제법 단단해 보이는 벽돌 벽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순간, 그러니까 코뿔소의 뿔에 받혀 쉽사리 부서지는 벽은 상식, 이성, 관습 혹은 베랑제가 쌓은 기반에 대한 믿음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그런데 스티로폼 소품의 속성인 벽 자체의 유연함이 무대 자체를 탐지 불가의 혼돈 속으로, 정체 모를 거대한 유기체로 뒤바꿔버린다. 비유를 하자면 뭉크의 <절규> 속 배경처럼 말이다. 베랑제가 딛고 서 있는 거리, 집, 회사 어디든 단단한 실체라는 오감마저도 실제가 아닐 수 있다는, 현실과 정신의 혼재 속에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극장과 작품과의 숙성 과정이 좋은 작품의 전제 조건이라고 보면, 의도된 바가 아닐 지라도 연희단거리패 땀이 밸대로 밴 게릴라 극장과 작품과 한덩어리 된 정점에서 나오는 효과일 것이다.
<코뿔소> 무대의 우직함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대 구현이 쉽지 않은 이오네스코의 작품 세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올해 100주년 기념으로 국내외에서 수도 없이 무대극으로 올랐을 <코뿔소>를 제각각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코뿔소>를 ‘연극적’으로 완성도 높게 형상화를 시킨 전례가 있다고 한들 이는 이미 과거의 틀일뿐이다. 그러니까 따라하는 순간 답습이 되고 만다.
이는 작품에서 풍자하는 권력, 명예 등 ‘거대함’ 잡아먹힌 집단의 속성에 대한 답습이 되는 바, 풍자하는 대상이 자신들인지도 모르는 블랙코미디가 되고 만다. (사실 이런 작품을 언젠가 꼭 한번 보면서 제대로 웃고 싶기도 하다.) 이오네스코의 화살은 파시즘, 나치즘이라는 규정된 속성이 아니라 규정이 아니라 시대마다 그 형태와 이름을 달리해서 때때로 정의, 교육, 합법, 다수의 형태를 띠는 하는 그 ‘속성’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대화 불가’야말로 이오네스코의 ‘연극적 미학’이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소극장 연극의 제작비 한계와 상관없이 새로운 방식인 CG나 영상이 이오네스코의 연극에 위배될 까닭이 있을까. 연희단거리패의 우직함이 과연 이오네스코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인 이오네스코가 영화 붐이 일던 당시 이 작품을 시나리오로 쓰지 않은 이유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허위나 아미지가 아닌, 실재(實在)하는 현실을 실제로 재현하는 연극성의 극대화! 물론 이번 작품에서 무대를 보다 세련되게 꾸밀 수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고, 의도된 효과인지는 의문이지만 분명 이오네스코 100주년 기념작답게 그 정신을 우직하게 살리는 작업의 일환에서 나온 시너지 효과임에는 분명하다.
공연장에서 받은 마스크가 호주머니에 그대로 있다. 앞쪽에 앉기는 했지만 코뿔소 방귀가 미숫가루라는데, 애써 막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정작 극장 밖에서 나를 코뿔소로 만들려고 달려드는 TV, 라디오, 전화, 애인, 친구(이상 베랑제가 처한 상황)를 비롯한 모든 상황은 미숫가루처럼 고소하거나 달콤하지, 지독하지 않다. 그러니까 멋도 모르고 코뿔소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방귀를 들이마시면서 살았던 건 아닐까. 그저 관객 배려일 수 있지만 연희단거리패가 보기에 작품 속 현실과 2009년 12월 실제 현실이 구분을 짓는 게 무의미하다는 은유로도 읽혔다.
코뿔소가 되는 과정은 들이받는 그 뿔처럼 힘에 의존하는 협박과 폭력의 속성 만 있는 게 아니다. 코뿔소의 방귀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으로 틈입해서 속에서부터 자라기도 한다. 베랑제를 회사에서 별 쓸모도 없는 주정뱅이로 설정한 이유 역시, 자의든 타의든 조직사회의 ‘코뿔소’의 속성에서 가장 거리가 먼 자발적 이탈자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제일 먼저 코뿔소가 된 회사 동료 누렁이가 코뿔소가 된 이후에도 회사에 나오기 위해 배회한다는 설정 역시 마찬가지다.
코뿔소만 있는 세상에서 인간은 ‘괴물’이다. 괴물은 알다시피 천시 받을 운명을 타고 났다. 괴물로 살아갈 자신이 있는 사람은 장담하건대 아무도 없다. 장과 데이지(그녀의 이름이 왜 `돼지`로 혼동되어 불리는지 마지막에 알게 되었다)처럼 자발적인 선택이 한편으로 이해가 가고 당연하다. 그러니까, 아직 인간일 때 인간으로 남으려는 노력을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
사진출처 - 연희단거리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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