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짠듯이 월요일! 5시! 즈음에 리뷰를 정리하고 쓰기 시작했는데요. 물론 그 사이에 좀 다른 볼일을 봤습니다만, 제목과 묘하게 어울리는... 지난 리뷰를 올리는 주제에 궁색한 변명이었습니다. 오달수 배우는 코믹한 이미지로 굳은 영화와 달리 연극에서는 진중한 연기를 펼치곤 합니다. 안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해님지고 달님안고>처럼 대사도 없이 스윽 스윽 지나가는 연기를 보다보면 어느새 빠져들고 말지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연극을 보는 색다른 재미입니다. 오달수 배우는 신기루 만화경의 대표입니다. [2013.01.21]
제목 : 먼데이 5PM
기간 : 2009/11/06 ~ 2009/11/29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3관
출연 : 오달수, 김은희, 최재섭, 조지환, 김태욱, 조아라, 황도연, 이 강, 윤효석, 유영애, 전윤희, 김은영, 임윤진(이상 화목토 팀)
희곡 : 박성철
연출 : 이해제
제작/주최 : 극단 신기루 만화경
주관 : ㈜아트브릿지
‘훌륭한 기술이야말로 승리의 근원이다! 특히 복싱은 개인기가 승패를 좌우하는 기술 집약형 스포츠이다. 정확하고 날카로운 타격, 즉 쳤을 때 그 방향에 시선을 집중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만이 진정한 승자의 패턴이다. '훌륭한 기술에 의해 승리를 얻는다' 이것이 바로 복싱의 본질이다.’ - ‘복싱교본’ 책 소개
위 소개에 따르면 봉세, 그러니까 오달수는 복싱을 잘하려야 잘할 수가 없다. 그의 큰 머리는 상대방의 주먹이 굳이 정확하지 않아도 즉 ‘고도의 기술을 가진 정확하고 날카로운 타격’이 아니어도 얼추 휘두르면 맞을 만하니 딱 표적감이다. 게다가 눈두덩에 살이 많은 작은 눈은, 눈이 작다고 덜 보이지는 않겠으나, 타격이나 버팅 등으로 부었을 때 시야를 냉큼 가릴 테니 이 역시 영 마뜩치 않다.
전적 25전 10승 15패의 3류 복서 '봉세‘, <먼데이 5PM>의 주인공으로 오달수는 부러 만들어도 나오기 어려운 최고의 캐스팅이다. 물론 그이의 외모가 100% 싱크로율의 원동력은 아니다. 배우로서 오달수가 겪은 파란만장했을 역경 과정도-그러고 보니 그쪽 바닥도 외모가 성공에 꽤 중요한 요소다-봉세의 전적과 그리 다르지 않을 터다. 다만 봉세와 다르게 어느 순간부터 차근차근 승수를 쌓고 있는 최근 행보가 다르지만.
봉세의 특기는 들러붙기, 복싱 용어로는 ‘클린치(Clinch)’다. 떨어지면 맞으니, 최대한 달라붙어야 한다. 뭉툭한 글러브를 낀 손으로 땀에 젖어 미끄덩거리는 몸을 부여잡기라니, 참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한숨이 저로 나온다. 상대방이 장어처럼 요동치고 있는 사이, 심판이 식가위처럼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어거지로 떼어놓는다. 삶이란 이런 것이다. 링 밖에서 한가로이 조망할 수 있는 인생이란 장삼이사들에게는 병풍 뒤에서 향내 맡을 때나 가능한 얘기다. 들러붙어서 최대한 한숨이라도 돌려야 떨어졌을 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흥신소에서 잡일을 하면서 나이어린 사장 용삼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진드기처럼 들러붙어야 한다.
봉세만 사정이 그런 건 아니다. 봉세와 서로 사랑하는 라운드걸 민자도 노래방 도우미로 근근이 견디고 있다. 그녀의 분노와 절규를 담은 노래와 탬버린 율동은 복싱 장면만큼이나 절절하고 처절하다. 속사정을 알고 보면 용삼도, 민자랑 바람을 피우는 만복도 인기가 한물간 복싱 처지와 비슷하다.
어쨌거나 봉세도 오달수도 프로다. 프로는 남들이 비웃든 말든, 깡패 양아치가 설레발치는 판과 노는 물이 다르다. 흥신소에서 일하던 봉세가 의부증이 격하게 심한 강 변호사 의뢰로 미행을 나섰을 때, 간단하게 주먹 한 방으로 깡패를 정리한 모습만 봐도 그렇고, 더러워서 흥신소를 때려치우고 나오면서 용삼의 기를 납작하게 누르는 대목에서도 그렇다. 월요일, 오후 5시.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놔버리기에도 어정쩡한 시간이라고 연극에서는 되풀이해서 말한다. 비유하자면 봉세와 민자는 시계바늘이 멈춘 바뀌지 않은 월요일 오후 5시의 인생들이다.
더블캐스팅으로 극단원들이 돌아올 권투 열기를 기리며 관객처럼 우르르 나오는 공연 중 월수금마다 봉세로 링 위에 오르는 박성철이 대본을 써서 2002년에 초연을 올린 <먼데이 5PM>은 이해제의 독특한 연출을 만나 2009년에 맞는 감수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감수성의 차이는 2002년과 2009년 사이 권투에 대한 관심이 급락한 현실과 맞물린다.) 초연을 보지 못했으나, 적어도 2009년 버전은 괜히 무게 잡거나 어설픈 감동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링 위처럼 사각의 틀만 내놓은 심플한 무대는 조명의 탁월한 사용과 적절한 음악, 음향으로 빈 도화지 같은 무대를 절묘하게 살린다. 배우들의 짜임새 있는 동선으로 시공간 교차로 소소한 재미를 준다.
연극을 볼 때마다 싸움하듯 머리를 싸매고 의미를 찾는 데에 골몰했다면 정작 대결이 목적인 복싱을 뼈대로 삼은 작품을 보면서는 느긋하게 즐겼다. 아마도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운드걸 민자를 사랑해서 복싱을 시작했다는 봉세 탓일 수도 있다. 다들 남들을 이기고 위에 서려고만 할 때, 사랑 때문에 시작한 복싱이라니, 여흥으로 아는 라운드걸을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사랑하는 복서는 정말 멋지지 않은가. 봉세의 특기가 클린치인 건 그래서 당연하다. 사랑을 할 때 어정쩡한 시간은 없다. 월요일 오후 5시는 꽤나 찬란하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정이나 배경을 보면 결코 가볍거나 쉬운 얘기가 아님에도 봉세의 가벼운 아웃복싱 스텝처럼 연극은 경쾌하다. 연극의 한계와 그 장점을 잘 다뤘다. 다만 빈 무대를 꾸미려다 보니 무대를 비워둘 수가 없다. 그래서 동선을 비롯해 짜임새가 복잡하고 전개가 빨라서 소소하게 눈에 걸리는 대목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프로복싱경기처럼 어느 정도 버팅이나 로우 블로우가 생기듯이 이해할 수 있다.*
사진출처 - 극단 신기루 만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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