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39계단] 배우 4명이 펼치는 몸CG 블록버스터 연극

구보씨 2009. 2. 22. 12:54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좋은 위치에 앉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어제 공연 시작 전에 "박해수"를 외쳐서 선물로 소설 <10번 교향곡>을 받은 커플입니다. 역시나 그녀의 철판 + 눈에 확 들어오는 자리 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요전에 <웃음의 대학>을 뒷자리에서 보다가 대사가 잘 안 들려서 좀 그랬거든요. 그런데, 자리가 뒤였어도 헤니 역의 박해수 씨의 경우에는 발성이 좋아서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원 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라는 얘기를 많이들 하는데, 대부분 원작보다 못하거나 비슷한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요. 우선 존 버컨의 첩보소설로 <39계단>이 출판된 시기가 1915년이니, 거의 100년을 걸친 영화와 연극이 아직까지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히치콕이 ’간택‘한 영향이 크겠지만요.)

 

소설은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영화의 맛을 제대로 살린 공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가 구조적으로 단순하고 명쾌해서 무대극으로 올리기에 무난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캐릭터 설정이 애매모호한 면도 있고, 또 장면마다 세밀한 배치는 물론, 극적 요인으로 조명, 음악 등으로 뛰어나게 포착했던 작업 스타일을 보면 무대 위로 옮기는 작업이 정말 쉽지 않으리라고 보거든요.

 

그런데 코미디로 거듭난 <39계단> 내내 히치콕이 보이더란 말이죠. 영국을 온통 휘젓고 다니는 내내 히치콕의 연출 특징다운 조명을 최대한 사용한 그림자극(호~ 그 놀라운 스케일이여!!)이나 파티 장면 등등 물론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위한 음향 삽입 및 강약 조절, 공연을 리드하는 적재적소의 음악 등은 강약 조절로 81분짜리 원작 영화보다 외려 더 긴 공연이었음에도 보는 내내 마치 히치콕의 새로운 작품을 보는 기분에 푹 빠졌더란 말이죠.

 

전혀 지루할 틈이 보고 나왔는데요. 막상 극장을 나와서 생각해보니 단 배우 4명에, 팔뚝 1개, 인형 1기가 고정된 무대에 등장해서 이런 재미를 줄 수 있었다니~ 단순히 재미만 주는 연극이 아니라 얼마나 짜임새 있게 만든 완성도나 높은 연극인가를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습니다. 알려진 대로 ‘코미디 + 스릴러’의 정교한 교합이었습니다.

 

공연 리플릿에 대학로 공연장 소개와 더불어 영국과 미국의 공연장 소개가 같이 있었는데요. 보고 나니 그 이유가 그만큼 동일한 완성도를 자랑한다는 의미로도 읽혔고, 또 가래침을 유발하는 동네인 ALT-NA-SHELLAC를 찾아 헤매는 헤니처럼 리플릿 한 장 달랑 들고 공연장을 찾아 미국, 영국으로 헤매는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번뜩 들기도 했습니다.

 

알토란같은 배우 4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석준 씨의 헤니를 보지는 못했지만 박해수 씨는 나이답지 않게 딱 헤니 나이인 37살다운 약간 느끼하면서도 시크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구요. (여담으로 여자 친구는 이석준이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가, 덕분에 박해수라는 이름을 외워서 낼름 소설을 받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지만, 공연 이후에는 감탄사를 여간 남발한 게 아니었습니다.)  관능적인 애너벨라와 순진한 마가렛~트, 도도한 파멜라를 오간 정수영 씨 역시 감칠맛 나는 연기에 매력에 홀딱 빠지기도 했습니다. (호텔 장면에서 스타킹을 벗을 때에는 어휴 제 가슴이 쿵덕쿵덕 뛰어서 혼이 났습니다.)

 

그리고 70가지가 넘은 배역을 소화하는 멀티맨 홍태선 씨와 임철수 씨는 정말 뭐랄까, 영화의 제작 당시 유행했던 슬랩스틱 코미디나 팬터마임의 진수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기도 했습니다. 쿵짝 쿵작짝 호흡이 딱딱 들어맞는 게 장소팔 고춘자의 환생이랄까요, 채플린과 이주일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들라고 하면 제 느낌이 그래서일까요. 영국이나 미국 사정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히치콕의 영화가 그 의도와 다르게 매니아적인 영화로 알려진 바람에 “머리 쓰는 골치 아픈 고전 영화” 정도로 치부된 영향이 아닌가 싶었는데요,  <39계단>이 <싸이코>나 <새> 등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탓도 좀 있겠구요. 연극 <39계단> 역시 부러 정보를 찾지 않으면 단순히 무거운 스릴러물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평일 공연이기도 했지만, 그 속내를 알고 보면 빈자리가 분명 줄어들리라고 보구요. (그러면 대사가 바뀌어야 겠지요~.) 이번 공연도 앙코르 공연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후 앙코르 공연 계획이 잡히면 이런 점을 좀 더 보강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메인 포스터 삽화가 정말 맘에 들지만 다소 무거운 이미지가 한국 관객들의 성향이나 연극 내용과 다소 동떨어진 듯해 보입니다. (요즘 워낙 먹고 살기들이 힘들다 보니 더 무겁게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도 있구요.)

 

또 아무래도 영화 <39계단>을 보고 나야 연극의 참맛을 알텐데, 쉽게 보기 힘든 영화라는 점에서, 공연을 올리지 않은 월요일 공연장을 활용 연극을 본 관객 대상으로 ‘배우와 함께 영화도 보는 1석 2조 이벤트’ 등 관련 상품을 개발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39계단>을 통해 ‘영화와 연극의 극대화된 만남’이라는 노하우를 쌓은 에이콤에서 한국영화를 놓고도 그 연금술을 발휘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당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나 만화 등에 인기에 업고 올리는 공연이 아니더라도, 한국영화 잊힌 그 수많은 역작들도 얼마든지 무대로 옮길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일례로 지금 한국영화박물관(www.koreafilm.or.kr/)에서 하길종 감독 30주기 전시를 하는데요. 이처럼 무대로 옮겨도 주옥같은 작품들을 눈여겨보셨으면 합니다.

 

‘연극 속에서 히치콕 감독은 언제 등장하는가?’에 대한 답을 올리려다가, 얘기가 주구장창 길어졌는데요. 히치콕 감독은 헤니가 경찰들을 피해 조던 교수를 만나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널 때 저 멀리서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면서 느긋하게 보고 계십니다. 그림자극에서 그 자태를 여전히 뽐내고 계시던데요? 공연 말미에 갑자기 등장한 손이나 인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만, 히치콕이 등장할 때는 늘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화면 꽉 차는 배를 내보인다는 점에서 그 분이 분명 그 분이 맞는다고 봅니다.

 

사진출처 - 39계단 공식 홈페이지